안녕하세요? 무더위에 장맛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씨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건강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초등학교 다니는 딸의 연극 만들기를 보면서 쓴 글, 보내드립니다. 이번달 클럽 발코니 매거진에 실린 글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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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2학년인 딸 은우가 학교에서 연극을 한다고 며칠 동안 수선을 피웠다. 담임선생님께서 반 아이들을 몇 조로 나눠서 동화를 간단한 연극으로 공연하도록 했다고 한다. 은우는 자기 조에서 대본 쓰기와 해설을 맡았다. 은우는 고심 끝에 '인어공주'를 바탕으로 한 간단한 대본을 썼다. 선생님이 내용을 조금 바꿔도 된다고 하셨다며 나름의 창작을 덧붙였다.
원래 동화에서는 왕자를 보고 사랑에 빠진 인어 공주가 다리를 얻고 육지로 나가는데, 은우의 대본은 반대로 인어공주에게 반한 왕자가 인어가 되어 바다 속 궁전으로 찾아간다는 내용이었다. 왕자는 '육지 마녀'를 찾아가서 1년 동안 가정부로 일한 뒤 '인어가 되는 약'을 얻게 된다. 황당하기도 하지만, 어린이다운 상상력이 느껴지는 대본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완성된 대본을 학교에 가져갔던 아이가 집에 와서는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 왕자 역을 맡은 친구가 이런 대본으로는 못하겠다고 했단다. '내가 미쳤냐, 이런 말을 하게?' 하면서 대본을 던져버렸단다. 문제는 왕자가 처음 인어공주한테 반하는 장면이었다.
왕자: 아, 어쩌면 저렇게 예쁠까. 당신은 누구세요?
인어공주: 저는 인어공주예요.
'아, 어쩌면 저렇게 예쁠까'라는 대사에 왕자 역을 맡은 아이가 불만을 강하게 표시한 것이다. 그러자 다른 아이들도 이런저런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고, 결국은 아이들끼리 되니 안 되니 다투느라 시간만 보냈다고 한다. 은우는 공연 발표 날이 얼마 안 남았는데 자기네 조만 연습을 하나도 못했다며 걱정이 태산이었다.
은우가 징징대는 모습을 보면서 갑자기 내 대학 시절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대학교 1학년 가을, 단과대 연극반에서 공연을 앞두고 한창 연습에 열중하던 때였다. 내가 다니던 단과대에 여학생이 적어서, 즉 여배우가 적어서, 나는 등 떠밀려 연극에 참여했었다. 우리가 공연할 연극은 나보다 1년 위의 선배가 대본을 쓴 창작극이었다.
대학 연극의 현실 참여적 성격이 강할 때였다. 작가는 5월 광주부터 노동과 계급, 남북문제까지, 참 많은 내용을 연극에 담으려 했고, 대본은 마치 요즘 일일 드라마 '쪽 대본'처럼 하루에 한 장 두 장씩 나왔다. 그러면 우리는 각자의 '정치적 노선'에 따라 갈려 극의 내용과 대사를 놓고 격론을 벌이곤 했다. 솔직히 엉성한 구석도 많은 대본이었지만, 참여하는 사람들의 열정은 대단했던 것 같다.
그런데 나의 가장 큰 고민은 사실 '정치적 노선'보다는, 나의 첫 대사에 있었다. 내가 맡은 역은 진부하리만큼 전형적인 인물 '강남의 벼락부잣집 딸, 오렌지 여대생'이었다. 천박하고, 문란하고,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가차 없이 짓밟는, 틀림없는 악역이었다. 이 여자가 남자와 '놀아나며' 뱉어내는 '교성'이 무대 뒤편에서 흘러나오며 연극이 시작되면, 한 사내가 엉거주춤, 바지를 끌어올리며 무대를 가로질러 가게 돼 있었다. 당시 대학연극에서는 꽤 파격적인 장면이었다.
나는 대본이 처음 나오던 날, 주로 '교성'으로 구성된 내 첫 대사를 보고 기겁을 했다. 아무리 연습을 해도 이 장면은 자연스럽게 되지 않았다. 선배들은 왜 그것밖에 못하냐며 나를 볶아댔다. 중요한 것은 내가 이 대사를 잘 못 했다는 것보다도, 하기 싫었다는 점이었다. 내가 맡은 역이 얼마나 천박하고 못됐는지 보여주는 장면은 안 그래도 많은데, 왜 굳이 연극을 시작부터 '선정적'으로 가려 하는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선배들한테 읍소하기도 하고, 눙치기도 하며 이 장면을 고쳐달라고 요청했다. 내 의견에 동조하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하지만 조연출과 대본을 맡았던 선배가 꼭 필요한 장면이라며 강경하게 나섰기 때문에 여러 차례 대본이 수정됐지만, 이 대사는 살아남았다.
나는 이 장면을 연습할 때만 되면 혀가 굳어지는 것 같았다. 공연 날짜가 다가올수록 자신이 없어졌고, 내 연기는 나아지기는커녕 날마다 퇴보하고 있었다. 이 장면 때문에 연극 자체가 하기 싫어져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던 날, 나는 연습 도중 연습실을 뛰쳐나와 버렸다. 대본을 집어던지고 말이다.
내가 그렇게 대본을 던져버렸던 것처럼, 지금 왕자 역을 맡은 은우 친구도 대본을 던져버린 것이다. 대본을 던지게 된 이유도 본질적으로는 비슷하다. 대사가 마음에 안 들었던 것이니까. 당시 대본을 던지고 뛰쳐나갔던 내 모습에, 은우 친구가 대본을 던지는 장면이 오버랩 됐다. 세상일은 이렇게 돌고 도는 것일까. 비약인지 모르지만, 내가 그 때 대본을 집어던졌던 대가를 지금 딸이 치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당시 나의 돌발 행동에 놀란 선배들은 긴급회의를 열었고, 결국 그 대사는 내 주장을 받아들여 삭제됐다.
"은우야, 친구랑 다시 한 번 얘기해 보고, 그래도 정 못 하겠다 그러면 그 대사는 그냥 빼 버려라. 없어도 줄거리에 지장은 없잖아."
'그래도 그 대사가 있어야 더 재미있단 말이야' 하던 은우는, 결국 '눈물을 머금고' 이 대사를 빼기로 했다. 다행스럽게도 이렇게 대본을 수정한 이후, 왕자 역을 맡은 친구 뿐 아니라 다른 아이들도 모두 열심히 맡은 역을 연습했다고 한다. 그동안 대본 때문에 티격태격하느라 연습 시간을 허비했으니, 그만큼 더 열심히 한 셈이다.
은우가 연극을 준비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공연 한 편 올리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실감했다. 어린이들이 10분도 안 되는 간단한 극 한 편 올리는 데도 이렇게 '작가와 배우의 갈등' 같은, 고전적인 '문제'가 발생하는데, 하물며 예술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본격적인 공연은 어떻겠는가.
공연 한 편을 무대에 올리는 것은, 장르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긴 하지만, 작가와 배우, 연출가, 제작자와 기획자, 기술 스태프 등, 무대에 관여하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하는 과정일 터이다. 결국 공연은 본질적으로, 여러 사람이 때로는 갈등하고 때로는 타협하며 이뤄내는 합의의 산물인 것이다. 은우 선생님이 반 아이들에게 연극을 하게 한 것도 이런 '과정'을 경험하게 하려 했던 것 아니었을까.
공연 발표가 있었던 날, 은우는 학교를 다녀와서 만족스러운 얼굴로 발표가 순조롭게 진행됐다고 전했다. 그러면서도 일말의 아쉬움이 남는 듯 이렇게 덧붙였다.
"아이, 그 친구는 좀 촌스러워. 연극에서 하는 얘기는 진짜로 하는 얘기도 아닌데, 그것도 모르고. 다른 조에서는 '신데렐라' 갖고 연극 하는데, '오! 신데렐라! 사랑합니다. 저와 결혼해 주세요' 이런 말도 잘 했단 말이야.”
이 말에 내가 또다시 뜨끔해졌다. 그럼 그 때 나도 촌스러워서 그랬던 걸까. 마치 은우가 나를 책망하고 있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은우야, 엄마 촌스러웠는지도 모르겠는데, 그래도 정말 열심히 했어. 그 대사는 없어도 되는 거였다고. 엄마 연기 그렇게 나쁘지 않았어. '저런 미친 x!'이라는 욕까지 들었으면 된 거 아니냐고.(욕 먹은 사연은 https://ublog.sbs.co.kr/shkim0423?targetBlog=20589 '악역의 추억'이란 글을 참고하시길.)
하지만 엄마가 대학 다닐 때 연극하던 사연을 알 리 없는 은우에게, 나는 그냥 이렇게 말해주고 혼자 웃고 말았다.
"그래, 엄마도 그 친구가 좀 촌스러운 것 같아. 하지만 은우야, 이런 점도 생각해야 돼. 아무리 대본이 좋아도 그 대본을 배우가 싫어하면 좋은 연극이 나올 수 없는 거야. 연극은 혼자 하는 게 아니라 여럿이 같이 하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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