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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시한 카르멘, 뮤지컬보다 재밌다

김수현

입력 : 2007.06.29 15:53


안녕하세요. 하루만에 다시 인사드립니다. 재미있는 공연을 만난 감흥이 컸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어제 고양 아람누리에서 러시아 스타니슬랍스키 극장 오페라단 초청 공연 '카르멘'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잠을 설쳐가며 썼던 글, 여기 보내드립니다.

오페라가 지루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은 공연이 생겼다. 고양 아람누리의 개관 기념 공연, 러시아 스타니슬랍스키 극장 초청 공연 오페라 '카르멘'이다.

'스타니슬랍스키'는 사후에도 연기론으로 전설적인 명성을 누리고 있는 러시아의 배우이며 연출가, 이론가이다. 이 사람의 이름을 딴 극장에서 하는 오페라라면, 일반적으로 접하는 오페라와는 뭔가 다를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공연장에 갔다.

과연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고백하자면 내가 지금까지 본 오페라 '카르멘' 가운데 가장 재미있었다. 일단 노래 실력은 기본이다. 오케스트라 반주도 극적인 드라마를 잘 받쳐준다. 그러나 이 오페라의 가장 큰 매력은 무엇보다도, 본격적인 연극 못지 않게 실감나고 자연스러운 출연자들의 연기에 있다.

금발의 메조 소프라노 엘레나 막시모바, 멋지다. 1막 담배공장 장면에서 짧은 흰색 나이트가운 같은 것을 입고 나와 뇌쇄적인 몸짓으로 남자들을 유혹할 때에는 딱 영화 '원초적 본능'의 샤론 스톤이 떠오를 정도였다.(위의 사진을 참조하시길) 그때그때의 사랑에 몸을 던지고, 예고된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정열적인 집시 여인 카르멘이 현대의 옷을 입었다. 카르멘이 오페라 무대에서 이렇게 섹시해 보이기는 정말 처음이다.

돈 호세 역의 테너 미하일 베쿠아. 처음엔 좀 실망했었다. 카르멘보다 눈에 띄게 키가 작고, 머리도 조금 벗겨진, 왜소한 아저씨였기 때문이다. 카르멘이 유혹하는 장면에서는 왜소한 돈 호세가 풍만한 카르멘에게 안기는 느낌이어서 적응이 안 됐다. 그런데 웬걸, 공연을 보다 보니 점점 이 '왜소하고 안쓰러운' 돈 호세가 아주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이미 마음이 떠난 카르멘에게 '다시 한 번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해 보자'고 호소하다 카르멘이 새로운 사랑 에스카미요를 찾아가려 하자 찔러 죽이게 되는 마지막 장면에서는,  아아, 정말이지, 이 아저씨의 고통과 절망이 그대로 전달돼서 소름이 끼쳤다. 돈 호세 역을 맡기에는 조금 아쉽게 느껴졌던 외모나 체격도, 우유부단하고 심약하고 카르멘에게 매달리는 캐릭터로 해석하는 데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이 그야말로 열연을 보여주는 이 마지막 장면에서는 "사랑이 식었을 때 남자(여자)가 매달리면 매달릴수록 여자(남자)는 더욱 매정해진다'는 불변의 '연애학 진리'를 정말로 '체감'할 수 있다.

돈 호세의 약혼녀 미카엘라, 투우사 에스카미요, 장교 주니가 등 다른 등장 인물들도 대체로 만족스러웠는데, (특히 미카엘라 역의 소프라노 나탈리아 무라디모바는 큰 박수를 받았고, 건장한 에스카미요는 왜소한 체격의 돈 호세와 선명하게 대조됐다.)  모두가 선남선녀는 아니지만, 맡은 역에는 아주 잘 어울리는 캐스트였다.

무대 장치는 아주 간결하고 별로 변화도 없지만, 지극히 효과적으로 사용됐다. 흰 색과 나무 색을 주조로, 현대적이고 세련된 느낌을 준다. 무대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다리처럼 생긴 구조물이 공연 내내 버티고 있는데, 이 다리가 마치 '2층 무대' 같은 역할을 하면서 마을과 병영, 담배 공장, 집시들의 소굴과 밀수 현장, 투우장 등을 상징적으로 표현해낸다. 투우장은 소 모형과 조명, 음향을 이용해 그림자극으로 그 열기를 보여주는데,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등장인물의 동선과 시선 하나하나에 다 이유가 있었고, 노래와 그냥 대사가 아주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소품도 아주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물을 적시거나 뿌려 인물의 심리를 암시하거나 강렬하게 드러내는 수단이 되게 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카르멘이 수도꼭지가 여러 개 달려있는 병영의 세면대 위에 올라가, 물을 틀어 자신의 몸을 적시면서 돈 호세를 유혹하는 장면이나, 유혹에 마음이 흔들리던 돈 호세가 찬 물로 세수를 하는 장면 등이 아주 생생하게 다가왔다.

휴식 시간 두 번을 합쳐 거의 세 시간에 이르는 공연이었지만, 지루할 틈이 없었다. 이 정도 재미있고 생생한 오페라라면 잘 나가는 뮤지컬 부럽지 않다.

스타니슬랍스키 극장은 오페라단과 발레단, 합창단과 오케스트라를 거느리고 있는 모스크바 시립 극장이라는데, 지난해에는 오페라를 125회 공연(60여개 작품)했고, 발레를 100회 공연(40여개 작품)했고, 모든 공연을 자체 제작하고 있다. 공연 시즌에는 1주일 내내 서로 다른 레퍼토리를 선보이며 (무대 장치를 최대한 간결하게 하는 것도 빠른 철거와 설치를 위해서인 것 같다.) 거의 매일 만석을 기록한다니, 대단하다.

스타니슬랍스키 극장은 1941년 러시아 연극운동의 중심에 있었던 두 사람, 스타니슬랍스키와 네미로비치 단첸코가 각각 운영하던 극장들을 합병하며 설립됐다. 볼쇼이 극장이나 마린스키 극장이 귀족과 상류층을 대상으로 만들어진 것과는 달리, 스타니슬랍스키 극장은 처음부터 서민들을 위한 극장으로 만들어졌다. 

서민들의 생활 중심으로 파고들어 쉽고 재미있는 공연을 선보이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대부분의 작품들을 현대적으로 새로 해석하고, 젊은 가수들을 과감하게 기용해 다른 극장과 차별화하면서 독특한 입지를 점하고 있다. 

스타니슬랍스키 오페라단은 '카르멘'을 30일까지 공연한다. '금발의 카르멘'은 첫날 나온 엘레나 막시모바 뿐인데, 다른 가수들도 각기 나름의 매력으로 '섹시한 카르멘'을 소화한다고 한다. 카르멘 외에 돈 호세, 에스카미요, 미카엘라 같은 주요 배역들은 모두 날마다 다른 가수들이 맡는다. 다른 가수들은 어떤 연기를 보여줄지, 궁금해졌다.

이 오페라단은 7월 1일 아람누리 야외극장에서 러시아 음악의 밤 공연을 펼친 뒤, (날씨가 좋아야 할 텐데. 이 공연은 무료 공연이라 금상첨화다. 고양문화재단 콜센터 1577-7766으로 전화 예약을 하고 예약 번호를 받은 관객에 한해 선착순 무료 입장이라 한다. 자세한 정보는 홈페이지 www.artgy.or.kr 참조) 7월 2일에는 아람누리 음악당에서 오페라 갈라 콘서트도 연다. 7월 5일부터 7일까지는 차이코프스키 작곡 오페라 '스페이드의 여왕'을 선보인다.

'스페이드의 여왕'은 몇 년 전 볼쇼이 오페라단의 내한공연 때 접했지만, 솔직히 별로 재미를 느끼지는 못했던 작품인데, 이번 '카르멘'을 보고 나니 이 오페라단의 '스페이드의 여왕' 역시 보고 싶어졌다.

'러시아 민중 극장'이라 할 스타니슬랍스키 극장 오페라단의 '카르멘'. 예술이 서민들 생활 속에도 깊이 뿌리 내린 문화강국 러시아의 저력을, 이 오페라 한 편에서 느꼈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