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분간 정치적 논란될 발언 자제 불가피할 듯
청와대가 19일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의 최근 정치적 발언에 대한 선관위의 거듭된 선거중립의무 위반결정을 "존중한다"면서도 앞으로 대통령의 정치적 발언에 대해 선관위에 일일이 물어보겠다는 입장을 밝힌 것은 일종의 '합법적 투쟁' 방안을 선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헌법기관인 선관위 결정을 마냥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대통령의 정치적 발언권을 포기할 수도 없는 처지의 '딜레마'에서 비롯된 청와대식 대처법으로 보인다.
선관위 결정을 고스란히 수용할 경우 임기말 노 대통령의 정치적 운신의 폭은 급격히 위축될 수 밖에 없다는 점도 감안됐다는 해석이다.
◆형식적으론 존중, 내용적으론 강한 불만 = 문재인 비서실장 주재 정무관계수석회의 논의를 거쳐 이날 발표된 청와대의 공식입장에는 선관위 결정에 대한 예상보다 강한 수위의 불만이 표출돼 있다.
형식적 측면에서는 "대통령이 선관위 결정에 충돌하지 않도록 발언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며 존중 입장을 취했지만, 내용에서는 선관위 결정을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을 강하게 시사한 것이다.
"선관위의 권한을 확대 강화하고 권위를 드높인 결정"이라고 냉소가 짙은 역설적 표현을 사용한 점이나 "앞으로는 일일이 발언하기 전에 선관위에 질의하고 답변을 받아서 하도록 하겠다", "법도 법이지만 운용도 답답하다"는 대목에서는 불쾌감이 묻어난다.
특히 "선거중립 때문에 공무원들이 국회요구 자료 제출도 선관위에 물어봐야 한다는 해괴한 일도 벌어지고 있다"고 주장한 데서는 잇단 선관위의 결정으로 오히려 국정혼선이 빚어지고 있다는 책임론까지 제기하는 듯 하다.
실제로 청와대는 이번 선관위 결정 결과를 전해듣고 적잖이 당혹스러워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선관위 논의 대상에 오른 원광대 강연이나 6.10 민주항쟁 연설, 한겨레 인터뷰의 경우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끔찍하다"로 상징되는 참여정부 평가포럼 특강 발언과는 달리 법적으로도 문제될 수 없는 대통령의 통상적인 정책.정치연설, 인터뷰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인식이었던 터라 선관위 결정에 대한 청와대 관계자들의 반응은 "그럼 어디까지 대통령 발언이 허용되는지 선관위에 묻고 싶다", "대통령은 말하지 말라는 얘기 아니냐"는 불만이 대체적 기류였다.
특히 한나라당이 제기하지 않았는데도 선관위가 이번 판단 범위에 한겨레 인터뷰(6월13일) 내용까지 넣은 점에 대해서도 청와대가 문제로 지적하는 부분이다.
실제 천호선 대변인이 발표한 공식입장에서도 "선관위 결정의 결과는 '대통령의 입을 봉하라'는 것"이라며 "그런데 문제는 어디까지는 허용되고 어디부터는 걸리는지 판단을 할 수가 없다. 어려운 것이 아니고 불가능하다"는 인식으로 표출됐다.
◆대통령 발언 사전심의 자청, 선관위로 `공' 넘겨= 그렇지만 청와대는 이 같은 인식을 바탕으로 선관위의 결정을 정면으로 무시하는 선택을 하지는 않았다. 선관위를 상대로 직접 공세를 펼 경우 부정적 여론이 조성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청와대가 이날 선관위 결정에 극도의 불쾌감을 표시하면서도 "대통령은 선관위 결정을 존중하려고 한다", "선관위 결정에 충돌하지 않도록 발언하는 수밖에 없다"고 밝힌 것은 적어도 형식적으로 선관위의 판단을 수용하는 것을 전제로 대응 방향을 신중히 모색해 나가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그러면서 "앞으로는 일일이 발언하기 전에 선관위에 질의하고 답변을 받아서 하겠다"는 방침을 밝힌 것은 청와대가 다시 선관위에 공을 넘긴 것으로 풀이된다. 대통령의 발언을 사전에 선관위로부터 '검열'받겠다고 자청한 것은 선관위로서도 부담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일종의 '압박'이라고 해석될 여지도 있다.
천호선 대변인은 이날 오후 정례브리핑에서 "선관위 해석에 의하면 정치적으로 문제제기가 될 수 있는 소지가 있을 발언에 대해서는 실제로 선관위에 물어볼 계획"이라고 말했다.
청와대 핵심관계자는 "우리로서는 방법이 없다. 정책적.정치적 발언을 하면 한나라당이 고발하고, 또 선관위가 경고하고 또 더 이상의 조치를 받을 수도 있는데, 이를 피하기 위해서는 선관위에 물어볼 도리밖에 더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일종의 준법투쟁이라고 볼 수 있다.
청와대의 추가적 대응도 법적 테두리 내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천호선 대변인은 "이번 선관위 결정까지를 포괄해서 조만간에 법적 대응 방침을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7일 선관위가 노 대통령의 참여정부 평가포럼 특강에 대해 선거중립의무 위반결정을 내린 이후 청와대에서는 헌법소원과 권한쟁의심판 청구 등 법적 대응 방안을 검토해왔었다.
◆한나라당 '형평성' 불만 표출 = 이와 함께 청와대가 선관위의 이번 판단에서 불만스러워 하는 부분은 한나라당과의 '형평성' 문제이다.
"하루도 빠짐없이 대통령과 정부에 대한 비판과 비난을 퍼붓고 있는" 한나라당의 말은 문제삼지 않고 "근거 없는 정치공세에 정당한 방어권을 행사하는"(정무팀 핵심 관계자) 노 대통령의 말에 대해서만 지나치게 법적 잣대를 들이댄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청와대는 대변인 브리핑에서 "한나라당은 오래전부터 '정권교체', '대선승리'를 끊임없이 외치고 있다. 모아보면 수백건도 넘을 것"이라며 "이런 발언이 사전 선거운동은 아닌지 선관위에 물어볼 일"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천 대변인은 "한나라당이 수없이 (대통령을 공격하는) 발언을 함에도 불구하고 그 부분에 대해 선관위가 적극 대응해 오지 않았고, 이런 것이 공정하지 않다는 의미"라고 부연 설명했다.
이로 미뤄 청와대는 앞으로 선거법 논란과 관련해 선관위나 야권에 대한 직접적인 대응은 가급적 자제하면서 논란의 핵심인 선거법 9조의 '위헌성' 및 '모호성', 그리고 한나라당과의 형평성 문제의 부당성을 제기하는데 초점을 맞출 것으로 예상된다.
이와 맞물려, 노 대통령 또한 대선정국에 영향을 끼치거나 법적 시비를 낳을 수 있는 특정 정당 및 후보자에 대한 정치적 발언을 당분간 삼가거나 자제할 것이란 관측이 나오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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