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꽃
'꽃'이라는 시가 있다.
김춘수 -- 꽃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 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학교때 국어시간에 배웠던 시다. 선생님께서 로맨틱한 연애시가 아니라 '존재'에 관한 시라는 걸 강조, 또 강조 하셨던 기억이 생생하다. 누가 나의 이름을 무엇으로 불러주느냐에 따라 내 존재가 '규정'된다는 심오한 내용을 다룬 시라는 얘기셨다. 심오한 해석에도 공감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심오한 깊이와 별개로, 연애시가 못 될 것도 없을 것 같다. '연탄'이나 '슬리퍼', '대걸레', '휴대전화료 요금 고지서' 같은 하고 많은 이름 대신 '꽃'이라는 이름으로 상대의 존재를 규정해 주는 관계라는 건 일단 로맨틱하지 않은가 말이다.
2. '新 모계사회'
'가정의 달'을 맞아 2007년의 가정을 돌아보는 시리즈를 마련하면서 '新 모계사회'라는 '이름'을 걸었다. 사실 이 이름은 A안과 B안이 첫 방송이 나가는 날까지 경합을 벌였을 정도로 고민의 대상이었다. 고민의 핵심은 "지나치게 남성중심적인 '규정'이 아닐까?"하는 부담이었다. 그 부담의 배경에는 '모계사회'라는 단어를 둘러싼 혼동과 오해가 있다.
엄격한 의미에서 '모계사회'는 '모권사회'와는 다르다. '모계사회'는 혈연적 측면에 주목해서 어머니를 중심으로 가족구성원들이 유지되고 재생산되는 사회를 일컫는 개념이다. 반면, '모권사회'는 어머니가 '권력'을 쥔 사회를 말한다. 최근 외할머니 손에서 크는 아이들이 늘고 처가 근처에 사는 가족들이 늘어나는 것은 어머니든 아버지든, 사회학자든, 문화인류학자든, 여성학자든 아무도 토를 달지 않는 '현상'이다. 이런 측면에서 2007년 우리 가정은 분명 원시 모계사회를 닮아가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취재 과정에서 만난 대부분의 여성들은 이 '新 모계사회' 안에서 예전보다 더 많은 고통과 부담을 호소했다. 딸 가진 엄마는 이제 자녀를 수십 년 키워서 결혼까지 시킨 후에도 손주 기르고 딸네집 살림도 봐 줘야 하는 무한책임에 내몰렸다는 하소연들이었다.
하소연의 내용을 좀 더 들여다보면 이런 거다. '新 모계사회' 도래의 가장 큰 이유 가운데 하나는 맞벌이 부부의 증가다. 일하는 엄마가 느는 것은 여성들의 성취욕이 커진 이유도 있지만, 남자 혼자 벌어서는 먹고 살기 어려워진 현실 탓도 크다. 그런데 이렇게 점점 늘어나는 맞벌이 가족의 자녀들을 맡아주고 길러줄 제도와 환경이 부실하다. 사회적 시스템의 문제다. 할 수 없이 수많은 여성들이 '만만한' '친정 엄마'에게 손을 내민다. 그 결과, 사회가 마땅히 책임져 줘야할 것을 책임지지 못한 탓에 생기는 고통과 피해가 상당부분 딸 가진 죄인인 '여성'들에게 전가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적지 않은 매체에서, 혹은 삼겹살에 소주 한 잔을 앞에 놓고 모인 남성들의 대화 속에서 자주 언급되는 '新 모계사회'는 꽤 자주 여성들이 똘똘 뭉쳐서 엄청난 권력과 영향력을 행사하는 '모권사회'와 혼동되고 있다. 이렇다보니 많은 여성들이 '新 모계사회'라는 신조어의 등장 자체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다. 학자와 전문가들 역시 성별에 관계 없이 우려를 나타낸다. 그래서, 혼동과 오해가 포함된 개념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 이름을 불러주는 건 그런 오해와 혼동의 '존재'를 더 확산시키는 게 아닐까, 하는 우려 때문에 마지막 순간까지 많은 고심을 했었다.
3. 엄마 그리고 아버지
고심끝에 '新 모계사회'의 또 다른 이름으로 '엄마 그리고 아버지'를 걸기로 했다. '오해'와 '혼동'까지 포함해서 '新 모계사회' 현상 전체를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엄마 뿐 아니라 '아버지'를 함께 봐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아버지들을 만났다.
한 시간 넘게 '삼겹살에 소주 한 잔'을 놓고 이어진 방담은 또다른 '하소연'의 장이었다. "마누라 눈치 보여서 무슨 말을 못하겠"고, 딸내미가 아버지를 "흑싸리 껍데기로도 안 여기고", 어쩌다 잔소리 한 마디 했더니 아들이 "왜 아빠까지 난리냐?"고 하더란다. "아무리 충성해도 더이상 정년을 보장해 주지 않는 회사에 정이 떨어져서 이제 정말 믿을 건 가족 뿐이구나" 싶지만, 모처럼 얘기라도 한 마디 하려고 다가갔더니 "여태 엄마랑 모여서 떡볶이 먹으면서 얘기하던 아이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벌떡 일어나서 뿔뿔이 흩어지"더란다. 어찌나 진솔하고 애끓는 한탄들이 이어지던지 들으면서 덩달아 한숨이 나왔다.
그런데 이 외롭고 서러운 아버지들이 내린 결론이 주목할만 하다. 한 아버지는 애들과 얘깃거리를 찾으려고 "SG워너비, SS501, 신화...가수 이름을 외웠"댄다. 그랬더니 "공부 얘기하면 아빠가 뭘 아냐고 하던 아이들하고 대화가 되더"란다. 한 아버지는 아이들과 눈을 맞추다보니 바닥에 무릎을 꿇게 되더란다. 그렇게 앉아서 "니 맘도 알지만 아빠도 힘들다"고 했더니 딸이 아버지를 "끌어안고 울더"랜다. 또, "듣기 싫긴 하지만, 들어보면 마누라 잔소리가 대부분은 맞는말"이더란다. "집안에서 권위 내세워서 뭐 하"냔다. "아버지의 진정한 권위는 스스로 주장해서 생기는 게 아니라 아내와 아이가 인정해 줄 때 생기는 거"란다. 이래저래 신세 지고 살다보니 처가 눈치 볼 일도 늘고, 일에 쫓겨 밖으로만 돌던 사이 멀어져 버린 아이들과 거리가 멀기만 하지만, 그 거리를 좁히고 가족안에서 자리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과정이 "사랑을 배우는 과정"이랜다. 그리고 그 "사랑이야말로 가정이 화목해지는 방법 아니냐"고 반문한다.
4. '新 모계사회', 또다른 '죽음의 트라이앵글'
취재 초기 단계에서 한 전문가에게 물었다: "행복한 가정의 조건은 뭔가요? 아무래도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의 '균형'이 중요한 거겠죠?" 지극히 뻔하고 당연한 질문이라고 생각하면서 별 뜻 없이 물었는데, 묻고 나서 야단맞았다. '균형'이란건 겉 보기엔 그럴듯 해 보이지만 실은, 특히 아이 입장에서 볼 땐 아주 위험한 거랜다. 어느 한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균형은 다른 각도에서 보면 두 힘의 팽팽한 대립이다. 서로 다른 두 힘이 팽팽하게 대립하면 그 사이엔 긴장이 생긴다. 전문가의 설명에 따르면, 엄마와 아빠가 팽팽한 긴장관계를 형성하면 아이는 그 안에서 갈등을 겪는다고 한다. 쉽게 말해서 어느 입장에 서는 것이 자신에게 더 안정적이고 도움이 되나 눈치를 보게되고 불안정해 진단다. 또 하나의 '죽음의 트라이앵글'이 생기는 거다.
아동심리학자인 전문가가 제시한 '대안'은 반대로 기계적이고 표면적인 '균형'에 대한 미련을 버리라는 거였다. 부모들이 주어진 처지와 상황에 따라 각자 주관하고 관여하는 영역을 나누라고 했다. 역할을 분담해서 자신이 더 잘 할 수 있는 분야에 집중하면서 서로의 노력이 시너지를 낼 수 있도록 의논하고 조절하고 도와야 한다고 했다.
많은 전문가들이 최근 우리 가정 안에서 어머니들의 영향력이 커진 가장 속에 교육이 가정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가 됐다. 그런데 경쟁이 워낙 치열하다보니 최근 자녀교육은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서 정보를 수집하고, 고민하고, 공부해야 하는, 거의 '전문 직업' 수준이 돼 버렸다. 서점마다 가정•생활 분야 서가의 전면을 점령하다시피 하고 있는 각종 '엄마 지침서'들은 이같은 사실을 잘 증명한다. 이런 상황에서, 책 사 읽고, 각종 강연회, 설명회 찾아다니면서 설겆이 하는 시간만 빼고 종일 아이 교육을 '공부'하는 엄마들의 정보력과 교육경쟁력을 아버지들이 따라갈 수 없는 건 당연하다. 가정의 '핵심'인 교육을 장악(?)한 어머니가 자녀들과 더 많이 접촉하고, 갈수록 많은 결정권을 갖게 되는 건 굿이냐 배드냐의 논쟁이 의미 없는 '현실'이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강해진' 엄마들이 아버지들이 생각하는 것 만큼 즐겁고 행복하기만 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많은 어머니들이 아이가 엄마의 '성적표'가 된 현실 속에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고 호소한다. 이 골치 아프고 힘든 교육 문제를 엄마에게만 떠맡기고 있다가 성적표 나올 때만 혀를 차는 아버지들이 야속하다고도 한다. 그렇게 받은 스트레스는 자녀에게 고스란히 돌아간다. 애정에 '책임감'과 '의무감' 때로는 옆집 엄마에게 질 수 없다는 '경쟁심'까지 더해진 엄마의 교육열은 아이들을 살인적인 시간표와 학원버스 속으로 몰아넣는다. 그리고 뭘 배우러 다니는지도 모르는 아들이 모처럼 다가와서 수학문제를 내밀 때, "아빠는 그거 모를거야!" 옆에 있던 딸이 던지는 한 마디는 아버지 가슴에 깊은 생채기를 낸다. 어머니는 힘들고, 자녀는 괴롭고, 아버지는 서럽다. 이 또한 '죽음의 트라이앵글'이다.
5. "아버지의 이름으로"
대학 1학년, 심리학 개론 수업 종강시간이었다. 교수님께서 커다란 투명비이커와 물이 가득 든 양동이 하나, 그리고 만년필 한 자루를 들고 들어오셨다. 비이커에 3분의 1 쯤 물을 붓고 말씀하셨다: "이건 여러분이 세상에 태어날 때 가지고 나온 마음입니다." 이어 그 물에 만년필로 잉크를 떨어뜨리기 시작하셨다: "살다보면 여러분은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지치고 상처받습니다. 그런 상처가 쌓이면서 맑았던 여러분의 마음은 점점 혼탁해 집니다." 그리고나서 교수님께서 물으셨다: "이 물을 다시 맑게 되돌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잠시동안의 침묵. 한동안 조용한 교실을 둘러보던 교수님께서 다시 양동이의 물을 떠서 비이커에 붓기 시작하셨다. "이미 퍼져버린 잉크를 물과 분리해서 건져내는 건 불가능합니다. 물을 다시 맑게 만들려면 새로 깨끗한 물을 계속 붓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후 꽤 오랜 시간동안 교수님은 아무 말씀 없이 계속 새 물을 비이커에 붓기만 하셨다. 투명비이커 속에서 잉크로 얼룩졌던 혼탁한 물이 점점 맑게 변해갔다. 침묵 속에 투명해져가는 비이커를 바라보며 느꼈던 감동은 초중고대학을 통틀어서 셀 수 없을만큼 많았던 수업과 강의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한 순간이었다.
新이라는 글자가 붙긴 했지만 '모계사회'라는 제목으로 시작한 시리즈에서 결국 부르고 싶었던 '이름'은 엄마가 아니라 '아버지'다. 엄마는 대를 잇는 가사노동과 보육, 교육문제에 무한책임을 강요받으면서 버겁고, 아버지는 자녀들에 대한 장악력을 앞세워 집안까지 혼자 쥐고 흔드는 듯 보이는 엄마의 위세에 서럽고, 아이는 그런 엄마와 아버지 사이에서 눈치보면서 이리저리 치이고.... 모두가 불행한 이 新 '모계사회' 논란에 이제 그만 종지부를 찍자는 얘기다. 그러기 위해서는 두껍고 선명해진 어머니의 이름을 지우고 축소하기 보다 작고 가늘어진 아버지의 이름을 키울 방법을 찾는게 더 현명하고 현실적이지 않을까?
"꽃"이 "꽃"이 되기 위해선 누군가 그 "꽃"을 "꽃"이라고 불러줘야 한다. 그러나 누군가 무엇을 "꽃"이라고 부르기 위해선 그 무엇은 그에 걸맞는 "빛깔과 향기"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2007년의 가정이 원하는 '아버지'의 "빛깔과 향기"는 뭘까? 쉬운 질문은 아니다. 한집 한집 사정과 형편에 따라 다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세상이 변해도 달라지지 않는 공통분모는 있다. 엄마든 아버지든 자녀든, 가정 안에서 "우리는 모두/무엇이 되고 싶"고, 모두가 서로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바람을 그럴듯한 '이름'으로 승화시키기 위해서는 엄마든 아버지든 맞서 싸우고 긴장 속에 대립하는 대신 서로 격려하면서 돕고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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