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2일 남북 장관급 회담이 끝났습니다.
이번 회담에서는 북한이 6자회담 합의에 따라 영변 핵시설을 폐쇄해야 하는 4월 14일 이후에 경추위(경제협력추진위)를 개최하기로 함으로써, 북한의 핵폐기와 대북 쌀 지원이 사실상 연계됐습니다. 즉, 북한이 4월 14일까지 영변 핵시설을 폐쇄하지 않으면, 이후 열리는 경추위에서 쌀 지원이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핵폐기에 따른 쌀 지원이라는 연계고리가 형성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재정 통일부 장관이 회담이 끝난 뒤 기자들에게, 북한에 쌀 40만톤을 주기로 합의했다고 말했다가 취소하면서 이면합의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회담에서 이면합의는 관례적
이번 장관급 회담에서 합의문에는 공개되지 않은 숨겨진 부분이 있지 않느냐는 측면에서 이면합의가 관심을 끌고 있지만, 사실 각종 회담에서 이면합의는 관례적으로 있어왔던 일입니다. 회담 당사자들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상황에서 합의를 도출하기 위해서는, 합의문에 표현되는 문구 이외에 어느 정도는 양 당사자간의 구두 약속이 불가피한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남북 회담 뿐 아니라, 6자회담, 기타 여러 회담에서 수많은 이면합의가 존재하리라는 것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면합의는 그러한 합의가 이후 회담에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한다면, 반드시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습니다. 대표적으로 지난 1월 북미 베를린 회동에서의 이면합의가, 2월 13일 6자회담의 합의로 이어졌던 사례를 볼 수 있습니다.
이면합의보다는 북한의 핵폐기 이행여부가 관건
이번 회담에서도 분명히 남북간에 이면합의가 있었을 것입니다. 장관급 회담 합의문을 보면, 이산가족 상봉이나 적십자 회담, 열차 시험운행과 관련된 문구는 있지만, 북한이 가장 절실히 필요로 하는 쌀 지원에 관한 부분은 '경추위를 개최한다'는 문구 밖에는 없습니다. 상식적으로 북한이 아무 것도 얻어가는 것이 없는 상태에서, 남한과 합의문을 작성해줬을 리가 없습니다.
아마도, 우리 측은 북한이 핵폐기만 제대로 이행하면 원하는 쌀을 다 주겠다라는 식으로 북한을 설득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북한이 영변 핵시설을 4월 14일까지 폐쇄하기만 하면, 이후 경추위를 열어 북한이 원하는 쌀 40만톤을 주겠다고 약속했을 것입니다. 북한도 이런 약속을 믿고 이번 합의문에 동의를 했겠지요.
하지만, 지금 상태에서 이러한 이면합의의 존재 여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만약 북한이 4월 14일까지 영변 핵시설을 폐쇄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이면합의가 있다 하더라도, 국제적인 여건상 쌀을 지원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북한이 영변 핵시설 폐쇄 약속을 충실히 이행한다면, 이면합의가 없었다 하더라도 이후 경추위에서 북한에 대한 쌀 지원을 결정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이면합의가 있건 없건 나타나는 결과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번 장관급 회담에 이면합의가 있느냐 없느냐를 가지고 따지는 것은 극히 소모적인 논쟁에 불과합니다. 지금 단계에서 중요한 것은 이면합의의 존재 여부보다는, 북한의 핵폐기라는 목표를 위해 우리가 쌀 지원이라는 무기를 얼마나 적절히 활용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재정 장관의 가벼운 입이 문제
이번 이면합의 논란의 발단이 된 이재정 장관의 발언은 비판받아 마땅합니다. 남북간에 이면합의가 있었으리라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것이지만, 이 장관이 직접 이면합의의 내용을 언급함으로써 향후 남북회담에 오히려 부담을 주게 됐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말이 많으면 실수를 한다고 합니다. 더구나 국가대사를 책임지고 있는 정부 주요 당국자라면 그 누구보다도 입이 무거워야 되겠지요. 회담이 끝났다고 너무 긴장을 놓아버린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마도 이재정 장관은 앞으로 상당 기간 동안 이 문제로 시달려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북간에 이뤄진 이번 합의의 의미마저 퇴색시켜버려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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