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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표 "그 목소리 기억하는 것 알리고파"

입력 : 2007.01.05 14:42

이형호 군 유괴사건 다룬 영화 '그놈 목소리' 연출


"단 한 구석도 피해자 부모의 심정을 벗어나지 말자, 연출이나 스타일이나 영화적 재미보다는 그 아이 부모를 연기하는 배우 중심으로 가자는 원칙이 있었습니다. 절박한 마음, 절실한 마음만으로도 헤쳐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박진표 감독이 또 다시 실제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한 편으로 의미 있는 목소리를 낸다. 2월1일 개봉을 앞두고 있는 '그놈 목소리'(제작 영화사 집)는 1991년 대한민국을 통탄으로 빠트렸던 이형호 군 유괴 살인사건을 다룬 영화다.

70대 노부부의 사랑과 성을 다룬 '죽어도 좋아', 에이즈에 걸린 여자와 그를 애절하게 사랑하는 남자의 이야기를 담은 멜로 영화 '너는 내 운명'을 통해 팩션(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영화라는 시도를 지속해왔던 그다.

박 감독은 "영화를 아직 내보이지 않은 채 인터뷰를 하긴 좀 뭐하지만…"이라면서도 조용조용히, 그러나 확신에 찬 목소리로 영화에 대해 설명했다.

4일 열린 제작보고회에서 선보인 메이킹 필름과 예고편은 이 영화가 공개된 후 우리 사회에 질문과, 자성과, 또한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들에 대한 반향을 불러일으킬 것이란 짐작을 하게 했다.

다음은 박 감독과의 일문일답.

--또 다시 실제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다. 언제 결정했나.

▲늘 듣는 질문이긴 한데…. 굳이 상상하지 않아도 너무나 영화 같은 일이 현실에서 벌어져 그 버릇을 못 버리는 것 같다. 1992년 '그것이 알고 싶다' 1회 주제였던 이형호 군 유괴사건 취재차 형호 군 부모님을 만났다. 어렸을 때부터 영화를 하겠다는 꿈을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만약 내가 정말 영화를 하게 된다면 이 사건을 꼭 영화로 만들겠다'고 생각했다. '너는 내 운명'을 개봉시켜놓고 곧바로 형호 군 부모님을 다시 찾아뵙고 허락을 구했다. 선뜻 허락해주셔서 감사하다.

--실화를 영화로 만드는 것에 대한 어려움은.

▲경계선을 지켜야 한다는 게 늘 어렵고 위험하다. 이 영화만 해도 별다른 기승전결이 없다. 아이가 유괴당한 이후의 상황이 시종 그려지기 때문이다. 많은 분들이 소름 끼치는 스릴러 영화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그렇지는 않다. 이번 영화를 만들 때 나름대로 원칙과 법칙을 세웠다.

--그게 무언가.

▲원칙은 단 한 구석도 피해자 부모의 심정에서 벗어나지 말자는 것이었다. 영화적 재미를 위해 연출이나 스타일로 뭔가를 만들어내지 말고, 그 아이 부모를 연기하는 배우 중심으로 가자는 원칙이었다.

또 이 사건을 다루며 세 가지 법칙을 세웠다. 첫째, 범인의 행동을 예상하지 말자. 둘째, 납치된 아이의 모습을 지속적으로 보여주지 말자. 셋째, 부모의 심정을 왜곡해 보이지 말자. 사실 이 세 가지를 모두 지키면 영화는 재미없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절박한 마음, 절실한 마음만으로 헤쳐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고, 다행히 그 원칙을 지킨 것 같다. 영화적 재미를 위해 경계선을 넘었을 때 영화화를 허락해준 그 부모의 심경이 어떻겠는가.

--'그놈'의 목소리에 강동원이 출연한다. 목소리만 출연하는데 선뜻 응하던가.

▲무명배우나 알려지지 않은 사람의 목소리를 쓰면 훨씬 더 긴장감이 강할 수 있지만 관객이 그 배우를 진짜 유괴범으로 착각할 가능성도 있다. 그래서 잘 알려진 배우를 썼으면 했고, 강동원 씨에게 맨 먼저 시나리오를 건넸는데 선뜻 동참해줬다. 강동원 씨는 스스로 발돋움해가려는 배우다. 영리하기도 하고. 촬영장에 단 하루도 안 빠지고 나와줬다. 유괴범의 협박전화 자체가 이 영화의 또 하나의 주인공으로 존재한다.

--배우 캐스팅 당시 아이가 있는 남녀배우를 원했다는데.

▲제 1원칙이었다. 연기를 잘하는 훌륭한 배우가 많지만 아이를 가진 배우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너는 내 운명'에서 호흡을 맞춘) 전도연 씨의 경우도 '밀양'에서 아이 엄마 역을 하고 있고, 잘하리라 생각하지만 아이를 가진 배우는 좀 다를 거라 생각했다.

--예고편과 메이킹 필름에 소개된 설경구, 김남주 두 배우의 연기가 인상적이더라.

▲그 두 배우들에게 '연기 잘했다'고 말하는 건 욕으로 들릴 것 같아 한 번도 연기 잘했다고 말하지 못했다. 연기 잘했다는 건 테크닉을 지칭하는 것 같아서, 그건 칭찬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두 배우가 그 인물이 돼줬다. 연기 지도는 감독이 하는 게 아니다. 이미 쓰인 시나리오에 생명을 불어넣는 건 배우다. 다만 나는 '그 당시에 밥이나 먹을 수 있었겠어?' '잠은 잤을까?' 이런 식으로 툭툭 던졌을 뿐인데 두 배우 모두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고 촬영장에 왔다. 심지어는 나조차도 밥을 못 먹었으니.

김남주 씨의 경우 '그 여자네 집'을 인상 깊게 봐 연기력에 대한 의심은 추호도 없었다. 도회적인 이미지의 그가 지금까지 보여주지 않았던 모습을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노메이크업에 퉁퉁 부은 얼굴의 김남주 자체가 이 영화의 비장의 무기일 수 있다.

최근 강한 모습을 보여왔던 설경구 씨도 약자로 등장한다. 많은 분들이 설경구 씨가 이 작품을 한다는데 놀랐다. 배우들이 사회적 공분을 만들어내는 데 동참하고 싶었던 것 같다.

--유괴사건이라는 민감한 사안이어서 부담감이 심했을 텐데.

▲유괴사건이라는 가슴 아픈 사건을 영화로 만들면서 상업적으로 오해할 수도 있고, "그래서 뭘 어쩌자는 건데?"라는 시선을 받을 수도 있다. 이 영화는 개봉이 된다 한들 완성되는 게 아니다. 완성은 관객이 해주는 것이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 영화의 숨은 목적은 공소시효에 대한 문제다. 쉽게 잊어버리는 우리의 모습에 대한 반성이다. 범인이 잡힌다, 안 잡힌다의 문제가 아니다. 범인은 아직껏 잡히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옆에서 살 텐데 그에게 적어도 나는, 우리는 너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다는 걸, 우리 사회가 널 주목하고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다. 아직은 범인이 안 잡혔기 때문에 희망적 공분이 일어났으면 좋겠다.

--예상할 수 있는 사회적 반향에 대한 생각은.

▲개인적으로 영화가 가져갈 수 있는 역할이 어디까지일까를 알아보는 실험이 되기도 한다. '영화를 통한 사회 참여' 같은 그런 거창한 사명감은 아니다. 내가 보고 싶은 사랑, 내가 살고 싶은 세상을 영화를 통해 표현하고 싶을 뿐이다.

--이 사건은 지난해 1월 공소시효가 만료돼 범인을 잡아도 처벌할 수 없다. 영화가 개봉되고 나면 공소시효 연장 등에 대해 사회적 논의가 있을 수 있는데.

▲공소시효에 대한 논의가 영화의 목적이기도 하다. 반인륜적 범죄, 이를테면 살인이나 유괴, 성폭행 등에 대해서는 달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개인이 모여 사회를 이루고, 국가가 되는데 개인의 아픔이 무시돼서는 안 된다고 본다. 내가 용서가 안 됐는데 왜 나라에서 용서를 하나.

공소시효에 관한 한 우리나라가 가장 관대하다. 미국만 해도 특정 사안에 대해 공소시효가 없는 주도 있으며, 우리 형사법이 참조했다는 일본도 공소시효를 25년으로 연장했다.

현재 사안별 공소시효 연장에 대한 개정안이 국회 법사위에 계류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법이 통과될 것이라고 믿지만 이런 사회적 움직임에 동참했으면 한다.

어떤 식으로든 범죄의 대가는 치러져야 한다. 사형제 폐지에 대한 논의는 별개다. 형호 군 유괴살인범의 목소리를 잊었거나 몰랐던 사람들에게 '그놈 목소리'를 알게 해주고 싶다. 영화를 보면 이렇게 영화를 직설적으로 만들었나 생각하실 것 같다.

(서울=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