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이제 정말 가을입니다. 어떻게 지내고 계신가요?
참 오랜만에 편지를 띄웁니다. 이상하게 한동안 글이 잘 써지지 않더군요. 공연은 여러 편 봤지만 여러 가지 잡생각이 많아서인지 진득하니 앉아서 감상을 정리할 여유가 나지 않았습니다. 이래선 영영 못 쓰겠다 싶어 오늘은 마음을 다잡고 앉았습니다. 여러분께 인사도 드릴 겸 해서요.
최근 비보이 열풍이 대단합니다. 한국인 비보이들이 전세계 배틀을 다 휩쓴다고 하더니, 이제는 본격적으로 공연장까지 진출하고 있습니다. ‘비보이를 사랑한 발레리나‘라는 퍼포먼스가 홍대 앞에 전용극장을 열어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고, ’난타‘의 송승환 씨가 차기작으로 비보이 소재 공연을 제작하기 위해 오디션을 열었을 때쯤, ’점프‘ 제작팀도 차기작으로 비보이 공연을 추진하고 있다는 소식까지 접하고, 브레이크 댄스를 비롯한 거리의 춤이 본격적으로 공연의 소재로 부각되고 있다는 내용의 기사를 쓴 적이 있습니다. 그게 7월이었죠. 그런데 그 이후에도 비보이 공연들이 엄청나게 쏟아져 나왔습니다.
지난주가 피크였던 것 같습니다. 익스프레션 크루가 출연하는 비보이 퍼포먼스 ‘마리오네트’, 최승희의 후계자로 불리는 동아시아 무용가 백향주 씨와 T.I.P 크루가 함께 하는 ‘더 코드’가 공연을 시작했고, 비보이와 일렉트릭 클래식이 어울리는 뮤지컬 ‘굿모닝 비보이’가 쇼케이스를 열었습니다. 그래서 이 공연들을 중심으로 ‘비보이는 실험 중’이라는 기사를 썼습니다. 다양한 예술 장르를 접목하고, 다른 장르의 예술가들과 함께 하는 공연들을 통해 비보이가 공연예술에서의 가능성을 타진해 보는 단계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지요.
당시 기사의 맨 마지막 문장에 저는 ‘적절한 기획과 연출력이 가세할 경우’에, 비보이 공연이 한 때의 유행을 넘어 경쟁력 있는 문화상품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썼었습니다. 사실 요즈음 비보이 공연들을 몇 편 보면서 이 ‘전제’가 굉장히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거든요.
‘비보이를 사랑한 발레리나‘가 맨 처음 본 비보이 공연이었습니다. 우아한 발레가 최고인 줄만 알았던 발레리나가 우연히 비보이들의 춤을 접하고 그 매력에 빠져든다는 내용입니다. 공연을 보면서 비보이 춤의 역동성과 활력에 대단한 매력을 느꼈고, 이를 공연물로 만들어 낸 아이디어에도 감탄했습니다. 객석은 꽉 찼고, 90분간이 별로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뭔가 허전했습니다. 아마 종합 선물세트‘를 보여주기 위한 보조 장치로만 기능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나 봅니다. 개인적으로는 비트박스나 비보이들의 ’배틀‘이 이어지는 장면은 보여주기에 치중해 지나치게 길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지난주 본 ‘마리오네트’ 공연은 줄인형극 마리오네트의 움직임과 브레이크 댄스의 분절적인 동작이 비슷하다는 데 착안해 만들어졌습니다. 인형극장을 무대로, 인형사와 영혼을 가진 인형들의 희로애락을 그린 여러 편의 에피소드가 펼쳐집니다. 에피소드 사이사이에는 애니메이션 영상이 곁들여져 이해를 돕습니다. 이 공연은 짧은 에피소드들로 나뉘어 있긴 하지만, 드라마가 좀 더 다가온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전문 배우가 아니다 보니, 아무래도 연기가 미흡하고, 장면 장면의 연결이 자연스럽지 않아 흐름이 자주 끊기는 게 아쉬웠습니다.
또 하나, 비보이들이 마리오네트의 움직임에 갇히다 보니 극중에서는 제대로 현란한 춤동작을 보여주지 못해 답답해 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출연자들이 ‘프리 스타일’로 춤 실력을 보여줄 수 있는 앙코르를 굉장히 오래 하더군요. 현란한 기교로 많은 박수를 받기는 했지만, 앙코르가 너무 길어져 자칫하면 본 공연의 감흥이 확 식어버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본 공연 중에 춤 실력을 한껏 발휘할 수 있도록 구성을 보완하면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면 줄의 속박에서 벗어나 인간이 되고 싶은 인형이 꿈속에서 인간이 되어 춤춘다든지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백향주 씨와 T.I.P 크루가 함께 춤추는 댄스 퍼포먼스 ‘더 코드’는, 비보이들이 패거리로 싸우다가 경찰에 쫓겨 미술관으로 숨어들어가고, 고구려 벽화 속에 잠들었던 천년의 무희를 만난다는 설정으로 진행됩니다. 백향주 씨는 ‘근대춤의 예술성과 현대춤의 폭발성이 만나서 새로운 장르를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이번 공연에 도전했다고 말했습니다. 전설의 무희 최승희가 살아 돌아온 듯, 신비한 느낌의 관음보살무에 비보이들이 가세해 ‘천 개의 손을 가진’ 관세음보살을 표현하는 장면을 비롯해, 전혀 다른 이들의 춤이 한 무대에서 어울리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공연 역시 아쉬운 점이 눈에 띄었습니다. 무대 전환이 원활하지 않고, 중간 중간 불필요해 보이는 장면들이 삽입돼 극의 긴장을 떨어뜨렸습니다. 무대 중앙에 강렬한 느낌의 영상이 비치고 문이 양쪽으로 열리면서 천년의 무희가 등장하는 장면은 반복적으로 나와 너무 뻔하고 단조롭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이질적인 춤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지 않고, 따로 논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었습니다.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 참가했던 댄스 퍼포먼스 그룹 ‘묘성’도 비보이를 공연에 끌어들인 경웁니다. 탈을 쓴 비보이들의 춤을 선보이는 등 한국적 전통을 비보이에 접목한 공연으로 관심을 끌긴 했지만, 전체적인 구성이나 연출에 있어서는 미흡했다는 게 현지 출장을 다녀온 후배 기자의 얘기입니다.
그러니 비보이가 등장하거나, 비보이를 소재로 한 공연들이 많아져 열풍을 넘어 ‘과열’로 비쳐질 정도이지만, 한 때의 유행에 그치지 않고 공연계의 ‘주된 흐름’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비보이 공연에 공연으로서의 완결성과 작품성이 미흡하다면, 단순한 춤 구경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고, 그렇다면 지금은 새롭게 느껴지는 비보이 공연들도 조금만 지나면 신선함을 잃게 될 테니까요.
현재 우리나라에는 비보이 공연 연출가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현재 올려지는 공연들은 출연자들 스스로 안무를 짜고 구성한 게 대부분입니다. 물론 비보이 공연이라는 것 자체가 이제 새로 등장한 것이어서 ‘비보이 공연 전문 연출가’가 있기 어려운 상황이지만, 기존의 연극이나 뮤지컬 등에서 인정받은 인력이 적극적으로 이런 공연에 투입됐으면 좋겠습니다.
비보이들 자신도 이런 과제는 잘 알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T.I.P 크루 리더이며, 닉네임 ‘바이러스’인 황대균 씨는 인터뷰 도중, 비보이 공연에서 성공하려면 적절한 기획력과 연출력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제 지적에 공감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배틀은 개인기가 주가 되고, 배틀을 잘 한다고 해서 공연을 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거든요. 우리 비보이 수준이 세계 최고지만, 공연만 놓고 봤을 때는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래서 지금까지의 언더그라운드 행사나 배틀 대회보다도 훨씬 더 노력을 많이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5분, 10분 하는 짧은 퍼포먼스가 아니라, 1시간 넘어가는 긴 공연을 해야 하잖아요. 정말 초심으로 돌아가서 노력 많이 하고, 배우는 마음으로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비보이들이 세계 대회를 휩쓸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비보이 공연들 중에 세계적인 문화상품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요즘 나오는 비보이 공연들은 모두 해외 진출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앞서 비보이 공연들에 이런저런 아쉬움을 표시하긴 했지만, 공연에서 만나는 비보이들 춤 실력, 정말 볼만하고 대단합니다. 공연으로서 적절히 다듬어지면 가능성은 크다고 생각합니다.
또 뵙겠습니다. 항상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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