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라이트 "부시 암살(Bush's murder)"
"부시 암살(Bush's murder)". 대문짝만한 제목에 부시 대통령이 총을 맞고 쓰러지는 장면이 신문에 실렸다. 런던시내 지하철이나 도로변에서 무료로 나눠 주는 신문 '런던 라이트(London Lite)'의 기사다. 런던에는 유료 석간신문이 하나에 불과하다. 사무실에서 인터넷에 접속하기 어려운 상황, 즉 밖으로 돌아다니면서 새로운 소식을 접해야할 때는 이 무가지(無價紙)가 제법 큰 몫을 해낸다. 서울에서도 아침 바쁜 출근길 인터넷을 뒤지거나 TV 뉴스를 챙겨 보지 못하고 졸린 눈 비비며 일터로 나서는 경우 지하철이나 거리에서 나눠 주는 무료신문을 통해 새로운 소식을 접하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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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시 대통령이 저격되는 장면. 런던 라이트 사진. |
무가지 런던 라이트의 1면 머릿기사 "미국이 격노하다…부시암살(US fury…Bush's murder)"이란 제목은 정말 가슴 철렁 내려앉는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영국에서 미국행 비행기 납치 폭파 테러음모가 적발돼 10여 명이 구속되고, 이 바람에 영국은 물론 미국도 테러 경보조치가 취해져 한바탕 소동을 겪은 지 이제 며칠 지나지 않았는데...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드디어 일이 터진 것인가. 더구나 고통스런 표정의 부시가 손으로 가슴을 쓸어안고 경호원의 부축을 받으며 앞으로 고꾸라지는 듯한 자세에서 깜짝 놀라지 않는 다면 다른 무슨 일에서 놀란단 말인가.
채널 4, "테러와의 전쟁" 담은 특집 드라마
자세히 들여다 보니, "채널 4가 부시 대통령의 암살을 다뤄 미국이 격노하다(US fury as C4 stages Bush's murder)". 영국에는 시민들이 무료로 볼 수 있는 지상파 방송채널이 5개다. 공영방송의 대명사로 전 세계 공영방송의 모범, 방송의 모범을 보이고 있는 BBC 1,2와 민영 방송 ITV, 그리고 채널 4와 채널 5다. BBC와 ITV가 영국 방송의 대세를 장악하고 있었지만, 최근 ITV가 부진한 틈을 타 급속도로 시청률을 높여 나가고 있는 채널 4. 그런 방송 채널 4가 2시간짜리 특집 드라마를 만드는데 여기에 부시 대통령이 암상당하는 장면을 집어 넣은 것이다. 이 촬영 현장을 런던 라이트가 취재한 내용이 오늘 런던시민들을 순간 깜짝 놀라게 만들었던 사건의 전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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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이건 대통령 저격사건을 패러디해 배우들이 연기를 펼치고 배우의 얼굴 대신 부시 대통령의 얼굴을 컴퓨터 그래픽을 합성해 만든 장면. 흑백의 특집 드라마는 채널 4가 10월 9일 방영을 목표로 제작중이다. |
제작진은 무슨 의도로 이렇게 남의 나라 멀쩡한 대통령 잡는 프로그램을 만든 것일까. "테러와의 전쟁(war on terror)이 미국사회에 드리운 명암을 탐구하는 특집 드라마의 도입부분에 부시대통령의 암살 장면을 넣은 것"이라고 설명한다. 드라마라고 하지만, 흑백의 다큐멘터리 성격을 띠는 특수 프로그램이어서 파장은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극본에 감독을 맡은 가브리엘 레인지(Gabriel Range)는 그 동안 여러 차례 영국과 국제사회 정치현실을 심도 있게 짚어 내는 프로를 더욱 주목된다. 한국 정부가 공휴일 목록에서조차 빼버린 한글날을 기념하려는 뜻은 아니겠지만, 10월 9일 전파를 타는데... 세인들의 관심이 벌써부터 증폭되고 있다.
레이건 대통령 저격 사건 패러디
부시의 암살 장면은 어떻게 촬영했을까. 대역도 아니고 영락없는 부시 대통령 모습인데... 암살되는 상황은 1981년 세상을 놀라게 만들었던 레이건 대통령 암살 기도 사건. 힝클리라고 하는 청년 레이건 대통령을 향해 총을 발사했고, 총에 맞고 쓰러진 레이건 대통령을 경호원들이 순식간에 에워싸 경호하는 사이 다른 경호원들이 힝클리를 단숨에 제압하는 장면은 정말이지 서부영화에서 갱스터 무비를 거쳐 무차별 잔인 살상극으로 폭력의 도를 더해가고 있는 할리우드 영화 못지 않은 대활극이었다. 영화대국다운 장면이었는데...
제작진은 이 상황을 그대로 패러디해서 부시 암살 장면을 촬영했다. 레이건 대통령이 총에 맞고, 그 뒤 벌어진 상황을 배우들이 똑같이 연기한 뒤, 부시 대통령 역을 맡은 배우의 얼굴을 지워내고 그 자리에 부시 대통령 얼굴을 컴퓨터 합성으로 삽입하는 기법을 동원했다. 그러니, 얼핏 진짜 부시 대통령이 총에 맞은 것으로 착각할 수 밖에... 80년대를 기억하시는 분들은 아직도 그 총성과 활극이 눈가 귀에 생생할 텐데... 1981년 1월 말 대통령에 취임한 레이건. 2월 초 전두환 대통령을 취임 뒤 첫 국빈으로 초청해 훈수 두고. 고작 한 달 넘긴 3월 30일. 고희를 넘긴 새내기 대통령이 워싱턴 힐튼 호텔에서 나오다 당한 일. 우리 국민의 가슴에는 더 남의 일 같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총성이 울리고, 언론보좌관 브래디가 쓰러지고, 당황한 레이건의 표정, 이어 레이건이 쓰러지고, 경찰도 1명 쓰러지고, 비밀요원 또 한 명 쓰러지고... 이어 기관총을 든 경호원들이 범인을 제압하고, 상황 장악... 하지만, 냉전시대 지구상 자유민주진영 최심장부를 이렇게 추풍낙엽으로 허망하게 쓰러뜨린 주인공은 누구일까. 범인은 힝클리. 당시 우리 나이 20살(62년생, 로버트 드니로와 1976년 택시드라이버를 찍고 폭발적인 인기를 얻던 중)의 신예 조디 포스터에게 푹 빠져 일종의 스토커가 된 사람인데... 45구경은 커녕 38구경도 아니어서 본격 살상용으로 보기 어려운 22구경 권총으로 세계를 놀래킨 이 청년은 "조디 포스터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본인의 편지 표현) 일을 저지른 것으로 밝혀졌다. 결국 감옥 대신 정신병원행 버스를 탔다. 참 허망한 사건이었는데... 죄없는 조디 포스터만이 충격 속에 잠시 영화인생을 접어야 했다.
런던 라이트의 논조와 루퍼트 머독
재미있는 것은 채널 4의 부시암살을 다룬 특집드라마를 취재한 런던 라이트. 런던 라이트의 논조는 시종일관 "아니 이럴 "이거 대통령이 암살되는 것을 반기기라기라도 하는 그런 의도인지 의심스럽군요. 이것은 웃기는 일이에요. 정상적인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코미디의 상식을 벗어나는 겁니다. 우리는 이미 부시 대통령 초기에 그를 악당으로 모는 좌파들의 음모를 봤어요. 이 드라마는 이런 시도가 새로운 방식으로 바뀐 것에 불과해요. 한 나라의 대통령을 이렇게 다뤄도 되는 겁니까."
예의 바른 런던시민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하지만 발언한 사람의 직함을 보면 좀 얘기가 달라진다. 이름은 에릭 스탈(Eric Stal). 직함은 미국 공화당 런던 지부(Republicans Abroad in London). 미국 신문도 아니고 영국 신문이 미 공화당 기관지 비슷한 논조로 보도한 이유가 더 궁금해진다. 의아해 할 것 없다. 역시 금방 의혹이 풀린다. 이 무료신문은 루퍼트 머독이 만드는 신문이다. 영국계라기 보다 미국에 더 가깝고 무엇보다 친 부시 성향의 언론계 거부 머독이 만드는 신문이었던 것이다. 돈으로 각국의 언론을 하나씩 잠식해가는 그런 사람이다. 만약 한국에서 이런 프로그램을 방송에서 만든다고 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21c에도 좌정관천(坐井觀天)에 머물고 있는 특정 정당과 특정 단체의 잇단 방송사 항의 방문과 화형식...
민주주의의 진정한 창, '표현의 자유'
한 나라의 표현의 자유 정도는 그 나라 국민들이 누리는 문화적 성숙도와 정치적 자유, 민주주의의 크기를 말해준다. '부시의 암살'을 다루고 '화씨 9.11'을 만드는 유럽과 미국 민주주의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언론과 표현의 자유에서 나온다. 부시의 암살을 다루는 방송도 이를 비난하는 대재벌의 신문도... 모두 표현의 자유를 가진 민주사회의 주체다. 민주주의는 표현의 자유를 먹고 자란다. 나중에 자세히 들여다 보겠지만, 영국은 언론 자유의 천국인 동시에 세계를 공정한 시각에서 바라보고자 노력하는 신문과 방송이 든든한 뿌리를 내리고 있다. 특히 방송의 공영성과 공정성에서 세계의 본보기로 손색없다. 다른 나라들에 앞서 민주주의를 발전시켜 올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언론의 자유, 즉 표현의 자유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국 언론자유의 출발점에 선 이는 17c를 풍미한 지성인 밀턴이다. 프랑스의 그로티우스, 피렌체의 갈릴레이와 교류하던 밀턴은 시민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청교도혁명과 공화제를 옹호했는데, 검열 없는 출판의 자유를 담은 그의 저서 "아레오파지티카(대법관, Areopagitica)"는 언론자유의 고전 가운데 고전으로 꼽힌다. 영국은 이렇게 17c 부터 사전검열을 부정하고 자유롭게 자신의 사상과 신념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상이 무르익었다. 이런 신념의 기초 위에 점진적인 민주주의 혁명을 성취해 나갈 수 있었다.
만약 밀턴이 그 어떤 정치적인 권위, 그와 교류한 갈릴레이가 종교적인 권위에 굴복했다면 진실과 정의를 향한 용기있는 탐구가 가능할 수 있었을까. 갈릴레이도 아마 기독교의 가르침 아래 천동설 전파하는 평범한 과학선생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19c 프랑스 혁명 뒤에 빅토르 위고가 교회나 기타 사회적 권력에 굴복했다면 명작 가운데 명작으로 꼽히는 '노트르담의 곱추(Notre Dame de Paris)'는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어느 정치적, 종교적, 사회적 귄위와 권력도 사상, 출판의 자유를 막을 수 없으며 민주사회에서 이에 대한 심판자는 오직 이를 취사선택하는 다수 시민들의 손에 달렸을 뿐이다. 걸핏하면 명예훼손 들먹이며 우상을 만들어 나가려는 시도는 이 시대 민주주의의 가장 위험스런 적이다. 부시 대통령의 암살을 자유롭게 다룰 수 있는 풍토, 또 이를 제멋대로 해석하는 재벌 무료신문의 공세에서 민주주의의 진정한 창, 표현의 자유를 들여다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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