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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안티-스포츠' 사회

이성훈

입력 : 2006.08.29 15:17


저는 용산 미군기지에서 카투사로 군복무를 했습니다. 그리 자랑스러운 추억은 아니지만, 나름 인생 공부를 했던 시간이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아시겠지만, 용산기지는 무기와 군인들만 바글거리는 단순한 '군사기지'가 아닙니다. 수천 명의 용산 주둔 미군 사병들과 장교들, 한-미 연합사를 움직이는 고위 장성들이 그들의 가족과 함께 살아가는 '마을'에 가깝습니다. 쇼핑센터와 극장, 레스토랑들과 호텔, 버스 터미널까지 갖춘, 버젓한 소도시라 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해외, 특히 한반도처럼 분쟁 가능성이 있는 지역에 배치된 군인들에게 '미국에서의 삶의 질'을 어느 정도 누리게 해주려는 미국 정부의 노력이 엿보입니다. (남의 나라 수도 한가운데 이런 살림을 차리는 게 과연 옳은 일인가라는 문제는 이 글의 논의 대상이 아닙니다.)

대략 서울의 동 2개에 해당하는 면적의 미군기지. 이 안에 있는 야구장이 무려 여섯 개입니다. 어른들을 위한 구장이 3개, 어린이 야구장이 3개입니다.

대충 땅만 골라 놓은 어설픈 야구장이 아닙니다. 외야에 파란 잔디가 깔린, 그리고 철망 펜스가 깔끔하게 설치된, 영화에서 나오는 미국 동네 야구장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왠만한 국내 프로구단들의 연습구장보다 오히려 나은 시설입니다.

이 야구장들에서는 봄부터 늦가을까지 연령별로 수많은 소프트볼 혹은 야구 리그가 열립니다. 예닐곱 짜리 꼬마(남녀 불문)들이 헐렁한 헬멧을 쓰고 키만한 배트를 휘두르고, 부모들은 스탠드에서 바베큐를 구우며 자녀들을 응원합니다. 적시타 때 홈에 들어온 아이를, 어른 아이 어우러져 얼싸안고 격려합니다. 솔직히 그 모습, 눈물나게 부러웠습니다. 저런게 사람 사는 행복이려니 하면서 말이죠.  

미군 기지 담장 밖으로 눈을 돌려 보겠습니다. 서울 시내에 이 정도의 시설을 갖춘 '야구장'은 잠실과 동대문, 목동 단 세 군데 뿐입니다. 리틀 야구장이라고 장충 공원에 하나 있긴 한데, 어디가서 야구장이라 우기기 힘든 시설입니다. 그거라도 하나 있는게 어디냐고 생각하기엔, 올 봄에 목터져라 '세계 4강 한국 야구'를 외쳤던 제 입이 민망할 정도입니다.  

물론 '수요'가 있어야 '공급'이 있는 거겠죠. 미국인들은 워낙 야구를 좋아하니 미국에는 야구장이 많은 거겠죠(미국 출장갈 때 착륙하기 직전 비행기 창밖을 보노라면, 뭐 눈에는 뭐 밖에 안 보이다고 서울 시내 교회 숫자만큼이나 많은 야구장들 밖에 안 보이더군요) 한국 사람들이 야구를 좋아한다지만 미국 사람들에 비할 바가 아니니 번듯한 야구장을 요구할 자격이 없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한국 사람이 '야구에 대한 수요'를 키울 만한 기회라도 있는지를 의심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태어나서부터 경쟁에 내몰려 조기교육의 광풍에 휩쓸리는 아이들. 학교 수업 끝나면 곧장 학원 순례를 떠나 자정 직전에야 귀가하는 학생들. 입학 직후엔 음주가무를 비롯해 지금까지 누리지 못했던 모든 것들을 '초단기 속성 과정'으로 누리느라, 그리고 곧 취업 전선에서 또다른 전투를 치르느라 여념이 없는 대학생들. 취업을 하면 한 대로 도태되지 않으려고, 직장을 잡지 못했으면 무슨 일자리라도 잡느라 잠못자는 20대말. 한국 사회에서 유일한 안전망은 '인간 관계'라는 걸 뼈저리게 알기에, 밤이면 밤마다 빠지지 못하는 술자리.

신자유주의 시대 한국사회에서, 야구 혹은 스포츠를 누릴 정신적-시간적-금전적 여유를 갖춘 인간이 탄생하기란 '한강에서 괴물 나오기'보다 어려울 지도 모릅니다. 

종목 불문하고 관중 감소로 어려움을 겪는 한국의 기존 스포츠를 보며, 도무지 답을 찾을 수 없는 답답한 마음에 적은 넋두리였습니다. 

P.S) 오늘 보건복지부에서 알코올 중독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대책이란 걸 발표했습니다. 그 대책이라는 것에서, 음주 금지 장소로 지정한 곳이 '국립공원'과 '경기장'이더군요. 

IMF 이후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퇴폐음주 업소들은 사실상 방치하면서, 전세계 스포츠팬들이 누리는 '경기장에서 맥주 한잔'의 권리를 빼앗아가는 발상은 어떻게 가능한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이 또한 스포츠 문화를 누리지 못한 사람과 사회의 비극이라는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