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은 무더위로 이상고온 현상을 빚더니 8월은 서늘한 가을날씨로 이상저온 현상을 연출해 내는 영국. 무늬만 여름에 때 이르게 두터운 옷 꺼내 들지만, 흘러 넘치는 열기를 온몸으로 느끼게 해주는 여름축제가 있다.
영화 노팅힐과 런던의 노팅힐
1960년 생이니 지금 우리나이로 40대 중반이건만 언제 봐도 동안(童顔)에 관객을 편안하게 해주는 미남배우가 있다. 영국의 명문이라는 옥스포드 대학 출신의 인기 배우 휴 그랜트. 그가 미국의 인기 여배우 쥴리아 로버츠와 함께 청춘남녀를 떠나 사랑을 그리워하거나 꿈꾸는 사람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편으로는 뭉클하게 만든 지도 벌써 7년 전인 1999년이다. 영화 노팅힐(Notting Hill). 잉글랜드의 중심도시이자 유나이티드 킹덤(UK)의 수도인 런던의 행정구역 가운데 하나이면서 영화 제목이자 실제 무대가 된 노팅힐은 통속적인 개념으로 볼 때 영화만큼 그리 낭만적인 동네는 아니다. 런던에서 가난한 동네에 속하기 때문이다. 범죄도 많은 슬럼가라고 할까.
| 일요일과 월요일 펼쳐진 노팅힐 축제 한장면. |
가난한 동네라는 것은 쉽게 말해 집값이 싸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래서 돈없는 사람들이 저렴한 주거지를 찾아 모여든다. 주로 시골서 올라온 사람들이지만, 여기에만 멈추면 한국의 서울이 되고 만다. 런던같은 국제도시에서는 한 부류가 더 있다. 바로 외국에서 온 이민자들. 그것도 가난한 이민자들. 아프리카, 카리브해 출신 흑인들이 많이 산다. 그러나, 가난과 배고픔은 종종 창작이나 예술적 영감과 깊이 관련돼 있음을 역사적 경험으로 배운다. 19c 말에서 20c 초 현대 미술의 산실 구실을 한 빠리 몽마르트르 언덕도 그 때나 지금이나 가난하지만, 자유로운 창작혼에 불타는 예술가들의 고향이 아닌가. 노팅힐도 역사에 서로 상반되는 두가지 특징으로 길이 남게 될 것 같다. 가난한 이민자들이 동네와 불타는 음악혼이 살아 숨쉬는 축제의 동네.
노팅힐 축제(Notting Hill Carnival)--거리 무도 행렬과 음악공연
노팅힐의 축제는 1966년 시작됐다. 카리브해 연안에서 온 이민자들이 일 년에 한 번이라도 서로 만나 즐겨 보자는 의미에서 출발했다. 실제 취재해보니 축제 행령 참가자들의 대부분이 흑인이다. 카리브출신 흑인들이 모여서 자신들 고유의 음악과 춤을 즐기며 흥청댄 것인데... 그것이 덩치를 키우고 키워 지금은 브라질 리우 축제에 이어 거리축제로서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크고, 유럽에서 가장 큰 축제로 발돋움했다. 영국에서 8월 마지막 월요일은 공휴일(Bank Holiday, 뱅크 홀리데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은행이 쉬는 날이어서 그렇다고 한다)인데, 마지막 일요일과 공휴일인 월요일을 합쳐 이틀에 걸쳐 노팅힐 축제가 펼쳐진다.
| 무도행렬은 화려한 의상과 분장으로 시선을 끈다. |
축제 내용은 얼핏 단순하다. 행진하며 춤을 추는 거리행렬과 무대를 마련해 놓고 전문적인 음악인들이 펼치는 각종 음악공연 두 가지로 나뉜다. 번쩍이는 의상(Mas), 카리브의 레게 음악인 스테틱 사운드 시스템(Static Sound System), 칼립소(Calypso), 소카(Soca), 금속 타악밴드(Steel Band). 이 5가지가 노팅힐 카니발의 중심테마다. 5가지 범주를 충족시키는 거리 무도(舞蹈, Dance Perade)행렬은 일반 시민들의 관심을 한눈에 끄는 행사다. 다양한 의상과 분장에 화려한 장식을 한 무희들이 음악 차량을 앞세우고 천천히 춤을 추면서 거리를 행진한다. 카니발의 시원이 된 카리브 댄스는 물론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각지의 다양한 문화권을 대변하는 댄스팀들이 현란한 율동을 선보인다. 첫날은 주로 어린이들이 참가하는 가장행렬이 주를 이루고, 둘째 날은 성인쇼를 방불케하는 춤동작을 표현하는 댄스팀이 많다. 각지에서 온 댄스팀의 율동과 음악 행렬이 어찌나 긴지 몇 시간이고 꼬리를 물며 이어진다. 무도행렬 말고 군데 군데 무대를 마련해 놓고 본격적인 음악행사도 치른다. 국제적인 명성을 지닌 아티스트들도 다수 참가해 축제의 격을 높인다.
| 수많은 인파가 지켜보는 가운데 음악차량이 선두에 서고 뒤에 무도행렬이 끝없이 이어진다. 오후내내 노팅힐의 주요 거리를 돌며 퍼레이드를 벌인다. |
질펀한 놀이판... 그리스 로마시대 디오니소스 제전이나 고려의 연등회
길옆에서 선 관람객들은 무도행렬을 구경하고 직접 춤도 따라 추며 흥겨워 한다. 축제에 음식이 빠지면 흥미가 반감된다. 좌판을 벌이고 음식을 파는 간이식당(물론 허가를 얻고)이 여기저기서 맛난 음식 내음을 풍기며 관광객을 유혹한다. 거리 행렬이 끝나고 밤이 무르익으면 이제 축제의 2라운드, 아니 본격적인 축제가 시작된다. 밤의 축제. 장소가 될 만한 곳이면 어디든지 모여 춤추고, 먹고, 마시고, 부둥켜 어울리고... 뭐 그렇게 밤드리 노니는 질펀한 놀이판. 농익을 대로 농익은 분위기에 객수(客愁)를 달래려는 관광객들의 들뜬 마음까지 한데 어울어져 분위기는 절정으로 치닫는다. 윤형주와 송창식이 불러제낀 축제의 밤은 그렇게 깊어 간다. 그리스 로마시대 디오니소스 축전(바카스 축전)이 이랬을 것이고, 고려시대 2월 보름께 3일 밤을 새워 불을 밝힌 연등회(燃燈會)도 밤의 흥겹기는 이에 못지 않았을 것이다.
| 참가자들은 행진도중 선정적인 각자 고유의 리듬속에 흥겨운 율동을 선보인다. |
유럽서 2백만 인파...런던 경찰 총출동
축제가 열리는 동안 노팅힐에서 두 가지에 놀랐다. 1. 런던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가 2. 런던에 경찰이 이렇게 많은가. 런던사람, 런던 경찰은 다 모인 듯한 인상을 준다. 그도 그럴 것이. 축제 기간 중에 약 2백만명 정도가 노팅힐을 찾는다고 한다. 영국각지는 물론 유럽 전역에서 모여든다. 말 그대로 사람으로 산을 이루고 바다를 이루는 인산인해(人山人海). 근처를 지나는 지하철 해머스미스와 시티라인(Hammersmith & Cityline)의 역들은 사람만 내려 주고 태우지는 않는다. 지하철이 너무 혼잡해 지은 지 오래된 시설에서 자칫 사고가 날수도 있어 그렇다. 노팅힐에 온 관광객이 거리 구석구석을 걸으며 충분히 축제를 즐길 수 있도록 하는 결과적인 효과는 덤으로 얻는다.
| 흑인들만 펼치는게 아니라 유럽 각지에서도 댄스팀이 참가한다. |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몰리다 보니 교통질서도 유지해야 하고, 술에 취해 흥청망청 광란에 가까워지는 행패도 막아야 하고, 강절도나 강간같은 각종 사건도 예방감시 해야 하니 런던 시내 각 경찰서에서 인력을 지원받아 총력 방범 활동을 펼친다. 그러니, 한 사람 건너 경찰일 만큼 경찰이 눈에 많이 띄는 것. 영국 토박이들은 그래서 낮에는 경험 삼아 가보지만, 밤에는 절대 머물지 말라고 충고할 정도다.
우리만의 정체성 담은 문화 보존
노팅힐 축제가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내용은 무엇일까. 노팅힐 축제는 영국사회 비주류의 문화다. 영국의 주류는 4c 대륙에서 넘어온 게르만족의 일파 앵글로 족과 색슨족이다. 이들은 당시 지배층인 로마 민족과 피지배층인 켈트족을 물리치고 영국을 세웠다. 프랑스에 정착한 북유럽 바이킹 출신 노르만족이 11c 더해졌지만, 국민적 주류는 앵글로 색슨이다. 미국의 주류도 영국에서 건너간 이들이지만... 앵글로 색슨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흑인들은 과거 불행한 시기 노예의 후손이거나 식민지에서 들어온 이민자들이다. 이들이 만약 소외받는 사회적 풍토속에서도 앵글로 색슨의 문화에 동화된 채, 자신의 애환과 전통, 정서를 담은 노래와 음악, 춤을 간직하고 예술적으로 가다듬지 않았다면 오늘의 노팅힐 축제는 태어날 수 없었다.
| 흑인들은 영국사회 비주류로서 애환에 머물지 않고, 자신만의 전통과 정서가 담긴 문화적 정체성을 지켜냄으로써 오늘날 국제적인 축제를 만들어낸 바탕을 이뤘다. |
자기 민족만의 정체성(正體性, Identity). 우린 한민족의 정체성은 어디에 있을까. 한때 현대화, 산업화라는 구호에 밀려 우리 전통과 문화의 대부분이 낡고 열등한 것으로 비쳐지던 때가 있었다. 지금도 공영 KBS 1FM은 서양 클래식 음악이 점령한다. 국악방송이 따로 있다고 하지만, 국민적 인지도가 높은 KBS 1FM에서 국악이 주를 이루고 서양클래식 음악을 전문 방송에서 다뤄야 제대로 된 문화국가의 면모다. 음악만이 아니다. 다른 분야 전반에서 비슷한 현상이다. 지난해 영화 '왕의 남자'가 한국에서 최고 관중동원을 기록하며 우리 문화를 다시 들여다 볼 수 있도록 해준 것은 우리 문화의 정체성 찾기라는 측면에서 의미가 깊다. 과학기술과 문화는 다르다. 과학기술이나 학문은 앞선 남의 것을 배워 올 수 있다. 하지만, 문화는 우열이 없다. 다름만 있을 뿐이다. 이럴진대 우리 것이 홀대받는 현실은 설명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노팅힐 축제에서 보듯이 진정 국제적인 것은 자신만의 정체성을 지닌 것에서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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