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프랑스의 원로 대신 프랑수아 드 칼리에르는 외교 협상의 달인이었다. 태양왕 루이 14세의 측근으로 프랑스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데 맹활약한 인물이다. 은퇴할 때가 다 돼 갑작스레 왕위를 물려받은 루이 15세를 바라보며 한심한 생각이 들어서였들까? 협상에 대해서는 티끌만큼도 모르는 불과 다섯살짜리 새 왕을 위해 자신의 경험을 충실히 녹인 보고서를 만들어 바친다. <어느 원로 대신의 협상에 관한 충고>가 바로 그것이다.
미국 국방부 관리들은 외교관이 아니다. 하지만 동맹문제와 관련한 한미 협상에 임하는 그들을 보면 어느 유능한 외교관 못지 않은 협상력이 느껴진다. 특히 협상의 중요한 제3자인 언론을 다루는 재주는 그들에게 "다뤄져야"하는 기자 입장에서 얄밉기까지 하다.
지난 8월 7일 펜타곤 회의실에서 열린 국방부 고위 관계자의 한미 동맹관련 대언론 백그라운드 브리핑도 그랬다. 이 브리핑은 당초 전시 작전권 환수 문제나 주한 미군 감축 문제와 관련한 한국내 논란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해명하겠다고 자청한 자리였다. 해명해야 할 미국의 입장이란 미국이 조기에 전시 작전권을 한국에 돌려주려는 것도 아니고 주한 미군의 숫자도 당초 한미 간에 합의한 대로 2008년까지 2만5천명 선 아래로 내려가지 않을 거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이 고위 관계자가 40분에 걸쳐 한 말도 그랬다. 하지만 그 날 SBS를 비롯한 모든 한국 언론의 보도는 이와는 거리가 멀었다. 당장 내 리포트 부터 제목이 "미국/ 전시 작전권/조기 이양 희망"이었다. 일부 언론들은 "주한 미군 추가 감축"을 제목으로 뽑기도 했다. 이런 오보가 있을 수가... 하지만 우리 언론의 보도는 오보가 결코 아니었다.미 국방부 관계자의 말에서 행간의 뜻을 읽은 결과였다.
전시 작전권 환수 문제부터 보자.
"전시 작전권 이양 시기는 아직 결정된게 없습니다. 한미 간에 충분한 협의를 거쳐 오는 10월 워싱턴에서 열리는 한미 연례 안보협의회에서 최종 결정을 내릴 것입니다. 한국 정부는 이미 2012년 환수 희망을 공식적으로 밝힌 바 있습니다. 미국은 한국의 입장을 존중할 겁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한국군은 이미 충분한 능력을 갖췄고 오는 2009년이면 전시 작전권을 이양 받는데 문제가 없을 것 같지만 어쨌든 협의해 봐야할 문제입니다. 따라서 미국이 조기 이양을 원해 전시 작전권이 조기 환수될 거라는 한국내 일부 우려는 사실과 다릅니다."
조기 이양 결정은 합의된게 없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라면 2009년에 이양하기를 기대한다는 말은 뭣하러 끄집어 냈을까? 특파원들은 여기에 착안한 것이었다.
주한 미군 감축 문제도 비슷했다.
2008년까지 감축을 지속해 2만 5천명 선을 유지하기로 한 합의를 지킬 것이라고 거듭 다짐하면서도 지나가는 말 삼아 다른 얘기가 나왔다. 한국군이 점차 주한 미군의 역할을 흡수해 가면서 본부 인력이나 행정인력같은 부문의 숫자가 줄어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숫자는 insignificant 또는 not substantial하다는 말을 거듭 반복한다. 그렇게 하찮은 숫자가 될거면 왜 일부러 흘리고 지나가나. 단 한 명만 감축한다고 해도 한국 언론이 일제히 그 말을 인용해 보도할 것을 뻔히 아는 한국통 관리가 실수한 것일까? 물론 아닐거라는게 특파원들을 공통된 생각이었다. 제한된 숫자의 한미 협상 관계자들만 알고 있는 내용 일부를 언론에 흘려 한국내 여론을 탐색해보자는 계산은 아닐까? 벨 주한 미군 사령관을 비롯한 핵심 관계자들을 통해 전시 작전권이나 주한 미군 감축과 관련한 원론적인 입장은 잇따라 강조적으로 밝히면서 유독 이런 속내를 비치는 브리핑은 '백그라운드'로 하는 태도도 그런 의혹을 사기에 충분했다. (백그라운드 브리핑이란 브리핑 당사자의 이름과 직함을 공개하지 않고 '고위 당국자' 등의 명의로 인용해 기사를 쓰기로 합의한 채 진행하는 회견)
별것 아닌 것 처럼 흘려 말하면서도 자신의 지위와 영향력이 그렇게 흘린 말에 자연히 힘을 싣게 만드는 기술인 것이다. 국방부 관리의 이번 브리핑을 기사화하면서 그동안 워싱턴 생활을 통해 여러차례 느껴왔던 한미간 외교 협상력의 차이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도대체 외교와 무역 아니면 하루 하루 먹고 살기가 버거울 수 밖에 없는 나라의 외교력이 왜 이리도 뒤쳐져 있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그 생각의 핵심이다.
우리나라의 정책 결정자들은 3백년전 프랑스의 어린 왕보다는 협상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것이고 또 한때 많이 회자됐던 칼리에르의 책을 익히 읽어 봤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저 내가 기억하고 있는 몇구절만 인용하고 글을 마무리 해야겠다.
"협상가는 자신에게 제기되는 모든 질문에 대해 교묘하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응답하는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결코 서두르지 않으면서 자신의 정책을 밝히는 한편 감정은 잘 드러내지 않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힘이란 주변 사람들에게 시기심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기 때문에 외교관은 힘 스스로가 말하도록 내버려 둬야 합니다."
"대화의 모든 부분에 관해 깊이 생각해 보지 않고 즉각 대답할 수 있는 능력을 과신해서 명성을 얻으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 인용: 어느 원로대신의 협상에 관한 충고
프랑수아 드 칼리에르 저/ 남경태 역/ 위즈덤 하우스/ 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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