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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민주주의 창-레바논을 천착하는 이유

김문환

입력 : 2006.08.02 16:54|수정 : 2006.08.02 17:02


평화로 가득했고 평화를 원했던 레바논

"그들의 눈은 눈물로 가득 차 있었다(Their eyes were filled with tears)." 인디펜던트 28일자 레바논 현지 르뽀기사에 나오는 제목이다. 퀭한 눈으로 왜 전쟁이 일어났는지, 이런 비극이 왜 발생했는지 영문도 모른 채 수용소 창문에 고개를 내민 어린아이의 눈물 그렁그렁 맺힌 눈을 보고 있노라면 전쟁의 비극을, 잔인무도한 강대국의 횡포를 다시 한 번 절실하게 깨닫게 된다.

필자가 2000년 역사유적을 탐방하며 다닐 때 보았던 레바논은 평화롭고 삶의 열기가 가득한 나라였다. 지긋지긋한 내전의 상처가 남아있기는 했지만, 거리 곳곳이 활기에 넘쳤고, 다른 중동국가와 달리 세련된 도시 이미지에 풍요로워 보였다. 그런 평화의 땅에 살던 어느 누구도 전쟁을 원하지 않았지만, 지금 전쟁의 비극을 겪고 있다. 고요와 평온 속에 휴식을 취해야 할 30일 일요일 아침에도 BBC 화면은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레바논 남부 티레(타이어, Tyre, 고대 페니키아의 근거지 가운데 하나) 근교 카나(Qana)에서 어린이 34명을 포함한 수십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음을 보도한다. 학교도 폭격당해 어린 학생들이 공포에 질리 표정으로 갈곳 잃고 방황하는 표정을 전한다.

필자가 세계 민주주의 창 이라는 이름 아래 레바논 전쟁을 자주 다루는 이유는 바로 여기 있다. 우리가 보는 이런 장면이 남의 나라 강 건너 불로 벽장 한구석의 얘기가 아니란 점을 밝히기 위해서다. 불과 반세기전 우리가 겪었던 전쟁이다. 6.25를 원했던 대한민국 국민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도 전쟁은 터졌다. 지금 언제라도 우리 의지와 관계없이 전쟁의 화마(火魔)에 다시 휩싸여 금수강산이 전장으로 변할지 모른다. 그 속에 살던 사랑스런 우리 아이들의 초롱한 눈에 슬픈 눈물 고이게 할 수 있다. 레바논처럼 평화를 갈구하는 데도 원하지 않는 전쟁에 휘말리고, 또 인명살상을 지속하는 전쟁의 종식을 바라지만 우리 마음대로 휴전도 못하는 그런 절망적인 상황에 빠질 수 있음을 외면하면 안보 불감증(安保 不感症)이다.

레바논 사태로 우리의 안보를 들여다 본다

지난 일요일 레바논 총리는 무조건 휴전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스라엘도 미국도 귀를 귀울이지 않는다. 레바논정부는 이스라엘에 적대행위를 한 적도 없고, 전쟁을 바라지도 않는다. 그러나, 미국과 이스라엘은 레바논 내에 있는 헤즈볼라를 명분 삼아 레바논 정부와 국민은 아랑곳 하지 않고, 전쟁을 지속하고 있다. 비극이다. 한반도에서 전쟁 발발의 두 축은 미국정부와 북한이다. 6.25는 북한이 일으켰고, 미국이 주체가 돼 북한과 싸우다 휴전했다. 지금도 한반도 군사정세는 북한과 미국이 주도하면서 고무줄 늘였다 줄였다 하듯이 긴장과 이완을 반복하고 있다. 이들이 잘못 고무줄을 당길 경우 툭 끊어져 불행한 사태가 일어날수 있는 절박한 상황 아래 살고 있다.

따라서, 북한을 어떻게 다루고 미국과 어떤 관계를 설정해야 하는지는 우리의 생존과 관계된다. 생존이 걸린 문제를 정확히 인식하고, 다루기 위해서는 알아야 한다. 미국이 한반도 이외의 지역에서 행하는 전쟁 결정과정과 수행, 아니면 지원, 그리고 이에 대한 국제사회의 반응과 처리과정을 정확히 꿰야 한다. 이런 과정을 천착하지 않으면 5천년 유구한 역사를 간직해온 민족의 운명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는 정의와 진실을 살리는 일은 물론 국익에 보탬도 안된다. 헤즈볼라를 명분으로 레바논이 전쟁판으로 뒤집어 졌다. 북한 미사일 명분으로 한반도가 전쟁판으로 뒤바뀔 수 있다.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숨진 레바논의 어린이.

쥐도 구석에 몰리면 도저히 자신이 이길 수 없는 고양이를 문다. 헤즈볼라가 이스라엘에 그랬고, 북한이 미국에 그럴 수 있다.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 정확한 현실인식은 생존의 필요충분조건이다. 북한을 무조건 도외시 하거나, 미국에만 의존하는 등의 행위. 정반대 상황도 마찬가지지만, 어느 한쪽에 기울어진 태도는 어리석다. 애써 진실에 눈감으려는 편견을 벗어나 두 눈 부릅뜨고 진실을 직시하자는 취지아래 강대국 편의의 전쟁을 고발하는 영국 언론. 이 영국언론을 들여다 보며 우리가 애써 일궈 놓은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와 번영을 지키고 그 앞길을 더욱 다지는 방법을 모색해 보자는 취지다.

국제관계로 우리의 시야 넓히는 지혜 필요

국민들의 뇌리에는 적(敵) 아니면 동지(同志)라는 이분법적 공식만이 입력된 측면이 강하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다양한 국가가 이런 저런 동지와 적의 관계를 되풀이하는 유기적 국제관계(有機的 國際關係)의 역사를 너무 오랫동안 잊고 살았다. 유라시아 대륙은 지난 수 천년 동안 거의 대부분의 역사를 어제의 적이 내일의 동지로 뒤바뀌는 방식으로 살아왔다.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고대 동양역사도 마찬가지. 전국(全國) 시대 중국은 여럿으로 갈린 나라들이 합종연횡(合從連衡)의 국제관계를 형성했다. B.C 4c 최강국인 진(秦)과 연(燕)·제(齊)·초(楚)·한(韓)·위(魏)·조(趙)의 6국 사이에 물고 물리는 동맹과 배반으로 각자 자국의 안위를 보장했다.

우리 한국의 5천년 유구한 역사도 비슷하다. 국제 교류나 국가간 전쟁과 협상을 통해 국가를 운영했다.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 신라가 일본, 중국의 숱한 왕조와 전쟁과 협상을 주고 받으며 국제적으로 국가의 운명을 다져 왔다. 삼국시대가 끝난 뒤에는 발해와 신라가 그랬다. 고려 시대에도 초기에는 그랬지만, 몽골의 침략이후 한국의 역사는 특히, 조선시대 이후 우리 역사는 전쟁과 협상이란 외교가 아니라 대국에 종속되는 길에 운명을 걸었다. 그 부작용이 오늘 국민들 뇌리 속에 정서적으로 강대국 숭상(崇尙)라고 하는 종속적 관계설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제 삼국시대의 상황을 참고해야 한다. 국토와 민족이 남북으로 갈렸다. 주변에 강대한 국가들이 포진해 있다. 냉전 체제 종식이후 어느 블럭에서 특정국가의 우산 아래 존속하는 나라는 사라졌다. 전통의 다자간 유기적인 관계 속에 살고 있다. 우리도 이제 새로운 국제 관계에 눈을 뜨고, 미국을 포함한 주변 나라들과 화친하며 평화롭게 우리의 번영을 일궈나가야 하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한반도라고 하는 작은 조건에서만 미국이나 북한을 바라보면 실상을 제대로 알기 어렵다. 그러려면 눈을 돌려 다양한 측면을 보고 배워야 한다. 그 앎과 널리 알림의 작업이 언론과 기자들이 숙명적으로 짊어지고 나가야 할 사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