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뉴스

뉴스 > 국제

131. 독일9-철학자 모자이크2

김문환

입력 : 2006.07.27 10:03|수정 : 2006.07.27 16:46


-- 지중해 문명기 5권--

모자이크로 읽는 그리스 로마 문명
(Art of Mosaic and Greco-Romain Civilization)

--고대의 삶과 사랑--

2장. 테세라 모자이크의 세계

7. 독일

1)독일

2,3,4,5,6,7,8,9,10,11,12) 쾰른(Cologne) --오늘 이야기

13,14,15,16)베를린(Berlin)

9) 철학자 모자이크 2-- 모자이크로 본 로마 사회상

고대 그리스인들은 7이라는 숫자를 참 좋아했다. 이미 알렉산더가 연 헬레니즘 시대에 지구상에 믿기지않을 만큼 훌륭한 건축물 7가지를 꼽아 7대 불가사의(不可思議)라고 정한 것은 대표적이다. 플라톤도 B.C 4c 고대 그리스의 7대 현인(賢人)을 들었다. 럭키 세븐(Lucky Seven)이라고 해서 행운의 숫자로 7을 좋아하는 서양의 전통은 참 유구하다. 참고로 고대 그리스인들이 생각한 7대 불가사의는 이집트 기자의 피라미드.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 등대, 바빌론의 공중정원, 로도스섬의 아폴론 거상,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전, 할리카르나소스의 마우솔로스 영묘 마우솔레움, 7대 현인은 아테네의 정치가 솔론, 스파르타의 정치가 킬론, 밀레투스의 정치가 피타쿠스, 프리에네의 철학자 비아스, 크레타의 학자 에피메니데스, 로도스의 철학자 클레오불루스, 밀레투스의 철학자 탈레스다.

<철학자 모자이크와 로마시대 저택의 벽면을 장식하던 프레스코화. ⓒ김문환>

이 모자이크에서도 7명의 현인(철학자)을 꼽아 그렸는데, 플라톤이 논한 7명과 다르다. 대신 프라톤이 들어가 있는데... 이 모자이크를 만든 연대는 3c 경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이미 플라톤이 그리스의 7대 현인을 선정한지 6백여 년이 흐른 뒤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리스인과 그리스를 계승한 로마 사람들은 7명에 새로운 사람을 추가하는 식으로 나름대로 변형을 가했을 것이다. 마치 헬레니즘 시대 7대 불가사의를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다양하게 바꿔 선정하듯이, 로마인들도 나름대로 자기들 구미에 맞게 7명을 선정했을 테고, 이 집을 지은 집주인은 플라톤이 정한 7명의 현인 가운데, 스파르타의 킬론과 로도스섬 린도스의 클레오불루스만 넣고 나머지 5명은 플라톤과 그 후대의 아리스토텔레스 디오게네스를 집어 넣고 그보다 앞선 인물 가운데, 소포클레스와 소크라테스를 집어 넣었다.

<헬레니즘 시대 그리스인들이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라고 평가한 기자의 피라미드. ⓒ김문환>

특기할 것 2가지. 플라톤이 정한 7대 현인에 스승 소크라테스가 빠져 있는 점이다. 또, 로마 빌라에서 걷은 7대 현인을 보면 집주인의 취향을 알 수 있는데... 오늘날도 집주인은 항상 자신이 존경하는 인물을 사진으로 벽에 걸어두거나 책상에 세워 놓는다. 유명 학자든 정치인이든, 예술가이든... 철학자들 모자이크를 만들어 놓고 살던 천 7백년전 로마의 집주인은 허례허식을 싫어하고, 문학을 무척 숭상했으며 로마에 엄격한 정치적 법률적 질서를 원했던 사람으로 평가된다. 그 이유는 그가 선정한 7대 현인에서 알 수 있다. 흔히 견유학파(犬儒學派)라고 부르는 키니코스 학파의 태두 디오게네스를 가장 중심되는 인물로 묘사한 것이나 극작가 소포클레스를 넣고 고대 그리스 민주정치의 질서를 확립했던 정치가들을 2명이나 넣었으니 말이다. 지적이면서도 문학적이고, 검소하게 인생을 즐긴 것으로 보인다. 참 언론인 이영희 선생이 추구한다는 "이상은 높되 현실생활은 단순히..." 하지만, 날로 질서를 잃어가는 로마의 정치에 실망하고 또, 타락해가는 사회 기풍을 안타까워 한 사람이라고 할까. 왜 그런지 로마의 변천사에서 이유를 살펴보자.

먼저 견유학파(키니코스 학파, Cynics)에 대해 잠시 들여다 본다. 소크라테스의 제자 안티스테네스가 창설했는데... 키니코스라고 부르는 이유는 안티스테네스가 제자들을 가르치던 학교가 아테네 교외의 키노사르게스에 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고, 디오게네스(BC 412?∼BC 323)로 대표되는 '개와 같은 생활(kynicos bios)'이란 말에서 유래됐다는 주장도 있다. 통상 후자를 인정한다. 건강한 육체를 만들고 여기에 건강한 정신을 소중히 여겼다. 말초적인 쾌락보다는 절제하는 간소한 삶에서 즐거움을 추구한 것이다. 현실에 속박되기 보다는 구속됨이 없는 자유로운 삶을 높이 샀다. 가진 것이나 필요로 하는 것이 적을수록 신에 가까운 자유로운 인간이라고 여겼다. 그러다 보니 이런 저런 변설이 많은 세상문물이나 제도에 대해 냉소적일 수 밖에 없다. 냉소적이라는 뜻 시니컬(cynical)은 여기서 나왔다.

스토아(stoa, 주랑, 柱廊). 그리스 아테네의 고대아고라에 있던 아탈로스 주랑. 소크라테스는 물론 플라톤도 여기서 제자들과 많은 대화를 나눴을 것이다. 스토아 학파라는 이름은 여기서 나왔다.

육체적인 쾌락이나 물질적인 향락을 거부하고 도덕과 검소한 생활을 강조한 로마의 금욕주의 적인 견인주의(堅忍主義), 즉 스토아 철학(Stoicism)은 B.C 3c 그리스 문명권에서 크게 유행했던 키니코스학파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공화국 시절 다시 말해 B.C 1세기 로마가 세계 제국을 완성하기 이전, 그리고 카이사르 이후 황제정으로 나가기 이전 로마의 문화는 실용적이고 무척 검소했다. 그러나, 세계 제국을 완성해 식민지에서 많은 재화가 들어오고, 퇴페적인 황제정이 지속되면서 로마의 문화는 많이 타락했다. 도덕이 사라지고 사회가 문란해 졌다. 젊은 여인들은 즐기기 위해 아기 낳기를 극도로 꺼렸으며 그래서 로마의 명문가들은 하나 둘 대가 끊겨 나가기도 했다. 이런 풍조에 대한 반기로 로마에서 스토아 학파가 나타난 것이고, 2c 말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힘꽤나 쓰는 검투사를 만나고 다닌 것으로 알려진 황후와 달리 금욕주의자로 스토아 철학의 대표자가 된다.

참고로 스토아(Stoa)는 그리스 로마 시대 아고라(로마는 포럼)의 한쪽 편에 마련된 반 야외 반 실내 건물의 기둥으로 받쳐진 복도, 주랑(柱廊)를 가리킨다. 여름에는 이곳 그늘에서 햇볕을 피하고, 겨울에는 비와 추위를 피해 학문을 논하던 데서 스토아 학파라는 말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