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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독일4-프라토리움

김문환

입력 : 2006.07.22 09:15|수정 : 2006.07.24 16:00


-- 지중해 문명기 5권--

         모자이크로 읽는 그리스 로마 문명
                 (Art of Mosaic and Greco-Romain Civilization)
 

--고대의 삶과 사랑-

 2장. 테세라 모자이크의 세계

   7. 독일

    1)독일

            2,3,4,5,6,7,8) 쾰른(Cologne) --오늘 이야기

                9,10,11,12,13)베를린(Berlin)

                4) 프라토리움(Praetorium)

쾰른에 있는 가장 인상적인 로마 유적은 프라토리움(Praetorium)이다. 로마시대 황제를 대신해 게르마니아를 다스리던 군사 책임자이자 최고 행정 책임자(Governor)의 관저다. 청와대라고 생각하면 쉽다. 집무도 보고, 직접 생활도 하는 관청이자 살림집. 5백명의 기사단을 거느리고 또 5백명의 보병 군사를 거느리던 게르마니아 책임자의 공관(公館)겸 관저(官邸). 이곳에 살았던 사람을 살펴보자. 오피둠 우비오룸에 1c 초 로마의 20군단이 주둔했다. 게르마니아를 책임지며 이곳에 온 주둔군 사령관이자 행정 책임자는 게르마니쿠스다. 그는 13년부터 17년까지 이곳에 살았다.

 < 프라토리움 모형도. ⓒ김문환>

 <프라토리움 유적. ⓒ김문환>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오피둠 우비오룸에서 발생한 두가지 역사적인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14년 황제 옥타비아누스가 죽고 난 뒤 병영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이를 게르마니쿠스가 진압했다는 것. 두번째 사건은 게르마니쿠스가 게르마니아에 온지 2년만인 15년 11월 6일 小아그리피나가 태어났다는 것. 프라토리움는 게르마니쿠스와 大아그리피나 사이에 딸 小아그리피나가 태어난 집인 것이다. 2천년을 넘는 역사를 바꾼 광적인 독재자 칼리굴라가 어린시절을 보내고 삼촌의 뒤를 이어 두번째 광적인 독재자가 된 네로의 어머니 小아그리피나가 태어난 집이라는 점에 심호흡을 다시 가다듬게 된다.

<프라토리움 발굴장면. 옆에 거대한 쾰른 성당의 모스빙 보인다. ⓒ김문환>

네로를 끝으로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 가문이 막을 내린다. 이후 로마의 최고권력은 힘센 군인들의 이전투구(泥田鬪狗)장으로 넘어갔다. 임기제 권력자를 원로원 의원들의 손으로 뽑던 공화주의 전통은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카이사르나 옥타비아누스의 바람대로 공화정은 끝장났지만, 또 하나, 그들이 그렇게 갈망하던 그 후손들의 로마 제국 통치도 상처만 남긴 채 비극적인 종말을 고했다.

<프라토리움 벅원도 ⓒ김문환>

참고로, 게르마니쿠스의 인생에 대해 더 살펴보자. 그는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의 실권자가 된 뒤 유부녀 리비아에게 빠져 전남편과 강제 이혼시키고 결혼한 여인 리비아의 아들이다. 황후 리비아는 옥타비아누스와 결혼하면서 전남편과 사이에 낳은 2명의 아들을 데려왔다. 아들이 황제에게 구박받으면 어쩌려고... 리비아는 만만한 여인이 아니었다. 옥타비아누스와 50년 이상 살면서 자식을 더 이상 낳지 않았다다. 티베리우스와 드루수스를 살리기 위한...

드루수스는 누구랑 결혼했는가? 옥타비아누스는 3두정치 시절 안토니우스와 화친을 위해 자신의 누이 옥타비아를 그에게 시집보냈다. 훗날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에게 반해 옥타비아와 이혼을 선언하고 이집트로 떠났지만, 그 사이에 딸 안토니아가 태어났다. 옥타비아누스 입장에서는 조카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아를 드루수스와 결혼시켰고, 여기서 게르마니쿠스가 태어났다. 게르마니쿠스는 그러니까 어머니쪽을 통해 성(聖)스런(?) 옥타비아누스의 피를 이어받은 셈이다. 카이사르-아우구스투스 가문에서 제대로 된 능력과 지성을 갖춘 사람은 이 게르마니쿠스 한명으로 평가된다.

<프라토리움 잔해. ⓒ김문환>

게르마니쿠스의 부인은 옥타비아누스의 딸 율리아가 아그리파 장군과 결혼해 낳은 아그리피나. 그러니까, 아들이 없던 옥타비아누스에게 특히 율리아가 낳은 외손자들이 어린 나이에 차례로 죽으면서 게르마니쿠스는 유력한 황제후보의 한명으로 떠올랐다. 옥타비아누스는 A.D 4년에 20살이던 그를 티베리우스(게르마니쿠스의 큰아버지)의 양자로 들였다. 14년 옥타비아누스가 죽었을 때 게르마니아 사령관이던 게르마니쿠스는 30살 이었다. 황제자리는 큰아버지이자 양아버지 티베리우스가 이었다. 그런데, 티베리우스는 라인강을 넘어 엘베강 까지 진격하는 등 게르마니아를 효율적으로 통치하던 그를 정 반대편 오리엔트로 보냈다. 동방의 진주 안타키아(안티오크)에서 그만 19년 40도 안된 나이에 죽고 말았으니... 티베리우스 황제가 그의 능력을 질투해 독살시켰다는 말이 널리 퍼진 것은 진위(眞僞) 여부를 떠나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아쉬움이 그만큼 컸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르마니쿠스가 살아 있었다면 아들 칼리굴라가 어린 나이에 황제가 돼 철모르게 독재를 일삼다 비극적으로 암살당하거나 네로가 등장하는 일도 없지 않았을까?

 <건물 잔해 ⓒ김문환>

프라토리움은 게르마니쿠스 가문의 영욕어린 기억만 간직하고 있는 게 아니다. 69년 네로가 비극적인 자살로 삶을 마감했을 때 4명의 군인이 나서 다툴 때 게르마니아 사령관 비텔리우스가 한달을 머무른 것으로 로마의 역사가 수에토니우스의 기록을 근거로 추정할 수 있다. 비록 그가 비극적인 최후를 맞지만... 쾰른의 추억이 비극으로만 점철되는 것은 아니다. 30년 뒤 98년 게르마니아 책임자로 와 프라토리움에 머물던 트라야누스는 황제 네르바가 죽은 뒤 황제자리를 이어받으라는 영광스런 통보를 받는다. 트라야누스를 이어 황제가 될 사람이 이소식을 갖고 왔는데, 하드리아누스다. 그가 황제가 되는 것은 트라야누스가 19년을 통치한 뒤다.

 < 돔(궁륭)형 건물 복원도. 돔은 로마인들이 높은 지붕을 가진 건축물을 지을수 있었다. 훗날 중세 기독교인들은 로마의 이런 건추기법을 받아들여 성당건축에 활용하면서 로마네스크 양식이란 말이 생겼다. ⓒ김문환>

이렇게 역사초라해 역사가 덧없음을 느끼게 해주는 경우가 많다. 지중해를 중심으로 유럽 전역과 북아프리카 중동을 호령하던 로마의 힘은 날로 쇠퇴했다. 동유럽에서 게르만족이 대거 서유럽으로 밀려들어 왔고, 게르만족의 라인강 국경도 더 이상 안전지대가 아니었다. 마침내 355년 게르마족의 일파 프랑크족이 쾰른을 침공해 파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천년왕국이 없음을 말해준다. 지금 프라토리움은 광대했던 집터와 기초석들만 남아있다. 현장을 발굴한 뒤 그 위에 지붕을 씌우고 그대로 박물관으로 꾸몄다. 발굴과정에 나온 유물도 전시실에 따로 만들어 전시중이다.   

 <프라토리움 박물관 내부. ⓒ김문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