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이맘때에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밀리언달러 베이비를 보고 한동안 후유증을 겪었는데 올해는 브로크백 마운틴이 비슷한 역할을 하는군요. 비참할 정도로 가난한 여자 복서가 성냥불이 타오르듯 짧지만 강한 전성기를 맞보고 결국 비극적인
이렇게 첫 문장을 써놓고 미적대다보니 아카데미 시상식이 있었고 작품상, 감독상 등 8개 부문에 후보로 올랐던 ‘브로크백 마운틴’은 감독상 등 3관왕에 올랐습니다. 리안 감독은 동양계로는 최초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하는 기록을 낳았습니다. 이런 저런 취재를 위해 영화 수입사에 전화를 했는데 ‘축하드린다.’ 고 했더니 ‘이런 게 어디 있어요. 작품상도 받았어야죠. 아카데미가 완전히 안배 차원에서 수상자를 선정한 것 같아요.’ 하면서 아쉬워하더군요. 100년 가까운 역사를 지니고 있는 아카데미의 연륜(?)에 걸맞은 노회한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만출신의 리안 감독은 1993년 ‘결혼피로연’으로 베를린 영화제 금곰상을 수상하며 세계 영화계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음식남녀’, ‘센스 & 센서빌리티’, ‘와호장룡’ 으로 동서양을 넘나들며 꼼꼼한 관찰력으로 가족과 남녀관계 등을 해부해왔습니다. 그러다가 블록버스터 ‘헐크’의 메가폰을 잡았는데 블록버스터답지 않게 너무 심각하게 고민하는 영웅을 그리는 바람에 흥행에는 그리 재미를 보지 못했습니다. 인터뷰를 보니 헐크 이후 심신이 너무 황폐해졌다고 말할 정도로 본인도 많은 후유증을 겪었나 봅니다.
1960년대 황량한 서부 와이오밍 주에 잭(제이크 질랜홀)과 애니스(히스 래저)는 여름 한철 돈을 벌기 위해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산림감시원의 눈을 피해 양떼를 돌보는 일에 고용됩니다. 잭은 로데오 선수로 활약하지만 업계와 집안에서 별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고 애니스는 어릴 적 부모를 잃고 형과 함께 살다가 형이 결혼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독립해 나온, 가진 것은 몸뚱이밖에 없는 천애고아나 다름없습니다. 둘의 차이는 애니스가 약혼녀와 가을에 결혼을 앞두고 있어 돈을 모아야 된다는 목적의식이 더 있다는 정돕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식량을 조달받으며 잭과 애니스는 적막한 대자연의 품에서 하루하루를 보내지만 스무 살 청년들에게는 고독과 세상과의 단절이 더 큰 고통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들이 이성애자라고 굳게 믿고 있던 이 두 청년은 술에 취했다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서로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되고 짧지만 찬란한(?) 순간을 함께 보냅니다. 다음날 아침 잠에서 깬 잭과 애니스는 한 번의 실수였다고 말로는 부정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 싹튼 사랑의 감정은 어느새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습니다. 산에서 내려온 잭과 애니스는 서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리지만 가끔씩 재회하며 아쉬운 사랑을 나눕니다.
리안 감독은 1960년대 서부의 웅장한 산림을 배경으로 하며 일단 시각적인 풍요로움을 안겨줍니다. 원시에 가까운 자연 속에 동성애라는 부담스런 주제를 던져 넣음으로써 관객들이 보다 객관적으로 거리를 두면서 주제를 역지사지로 받아들이게 합니다. 자연 속에서 잭과 애니스는 자연스러운 커플이지만 산에서 내려와서 현실의 생활은 주변의 시선과 기대와 규범에 얽매여 살아가야 합니다.
잭은 돈 많은 처갓집 덕에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지만 사위를 업신여기는 장인 덕에 항상 콤플렉스를 안고 살고 애니스는 가난한 생활의 굴레 때문에 노동과 육아에 지쳐 살아갑니다. 잭은 저녁 식사자리에서 장인과 실랑이를 하다가 결국 그동안의 분노를 터뜨리듯 적극적이지만 애니스는 남의 눈을 더욱 의식하며 상처를 절대 꺼내 보이지 않고 속으로 삭이는 성격입니다. 그러기에 둘의 관계에서도 재회의 기쁨 이후에 미래에 대한 전망에서는 견해 차이를 보이고 갈등하게 됩니다.
이런 영화는 제게 어렵거나 난해한 것은 아니지만 설명하고 분석하기가 버겁습니다. 감독의 내공이 설명과 분석을 녹록치 않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리안 감독은 꼼꼼한 관찰과 분석력으로 미국 사회와 미국인에 대해 고찰합니다. 그 방식은 친절한 설명보다는 과감한 생략과 침묵으로 관객이 생각할 여지를 많이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나서도 다시 한 번 곱씹어 보게 되고 의문을 품게 됩니다.
끝말을 집어삼키듯 하는 아니스의 투박한 사투리와 클럽에서 만나 사귀게 된 여자가 ‘여자는 사랑을 장난으로 하지 않는다’고 쏘아 붙여도 그저 침묵으로 응대하는 모습... 산에서 내려와 서로 헤어지면서 애니스가 골목에 엎드려 짐승처럼 흐느끼는 소리와 잭을 먼저 저 세상으로 떠나보낸 애니스가 그의 유품에서 발견한 소중한 물건을 옷장에 간직하며 마지막으로 하는 ‘I Swear...'라는 혼잣말의 여운이 커다란 종소리처럼 계속 귓전을 맴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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