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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양장의 아가씨: 하인즈 워드를 만들어 낸 힘

김성준

입력 : 2006.02.21 14:03

김영희씨가 혼자 사는 애틀랜타 근교의 작은 집 거실에는 이제 가물가물한 과거가 돼버린 추억들이 벽마다 잔뜩 걸려 있었다. "타향 살이의 쓸쓸함을 달래려고 이따금 바라보는 액자들인가 보다"라는 나의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김씨는 아들이



김영희씨가 혼자 사는 애틀랜타 근교의 작은 집 거실에는 이제 가물가물한 과거가 돼버린 추억들이 벽마다 잔뜩 걸려 있었다.

"타향 살이의 쓸쓸함을 달래려고 이따금 바라보는 액자들인가 보다"라는 나의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김씨는 아들이 집안 구석을 다 뒤져 찾아내서는 직접 걸어 놓은 것들이라고 설명해줬다.

부와 명성과 효도까지 다 드렸지만 역시 스타 아들도 사진과 그림으로 대신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잊혀진 어머니의 젊은 시절이었을 것이다.

 

액자들 가운데 단연 눈에 띄는 것은 역시 빨간 양장을 입은 깜찍한 처녀의 초상화였다.

"저 아가씨의 꿈 속에도 흑인 피를 가진 수퍼볼 MVP의 어머니가 되는 미래가 담겨 있었을까?"

마음 속 짓궂은 질문은 이미 답을 준비해 놓은 터였다.

저 시절 김영희씨의 꿈은 그 이의 오늘과는 영 딴판이었을 거라는 확신이었다.

아들이 사준 궁궐같은 저택이 부담스러워 일부러 작은 집으로 이사하고, 더이상 돈 벌 필요가 없어 일손을 놓았다 우울증에 걸리는 바람에 할 수 없이직장에 다시 나가는 고충.


하루 아침에 미국의 영웅이자 한국인의 우상이 된 아들 탓에 밤낮으로 집앞에 진을 친 기자들을 상대해야 하는 번거로움.

남들이 들으면 "너무 잘난 체 하는 것 아냐"라고 오해할 만한 얘기지만 김씨는 그런 일들이 실제로 고충이자 번거로움이라고 말했다.

그럴 법도 하다. 저 초상화 속의 아가씨가 가졌던 꿈은 이런 것이 아니었을 테니까. 자기만을 사랑해 주는 건강하고 마음 깊은 남자를 만나 알뜰살뜰하게 살림을 꾸려나가는 꿈. 이왕이면 그 남자가 번듯하게 생기고 괜찮은 직장을 가졌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김씨의 인생을 그렇게 풀려가지 못했다. 축복 대신 비난과 눈총을 받으며 강행한 흑인 미군 병사와의 결혼. 그나마 미국 땅을 밟은지 두 달 만에 파경에 이르고 언어장벽와 가난 속에 평생을 힙겹게 혼혈 아들을 키우며 30년을 살아오는 동안 초상화의 꿈은 너무나도 변해버린 그이의 얼굴만큼이나 동떨어진 모습으로 한꺼풀 한꺼풀 현실이 돼 가야 했다.

김영희씨에게 어렵게 키운 아들의 대성공은 꿈의 실현이 아니다. 잃어버린 꿈에 대한 보상도 아니다. 김씨는 그래서 아들이 가져다 준 부와 명예를 마음껏 누릴 자신이 없나 보다. 넓은 저택을 선물받았어도 가정부를 두고 때때로 정원사도 불러 쓰면서 친구들을 초대해 즐거운 시간을 보낼 생각을 좀처럼 해내지 못하는 것이다. 돈 벌 필요가 없어서 직장을 그만 뒀다고 해서 우울증에 걸릴 참이라면 사회봉사나 갖가지 취미활동에 몰두해 볼 법도 한데 고작 힘들었던 과거로 돌아가 버리는 게 유일한 해법인 것이다. 월급 600 달러짜리 학교 식당 종업원 일 말이다. 애초에 누릴 생각이 없었던 행운을 지금 와서 챙길 능력이 김씨에게는 없어 보였다.

그래서 말이지만 어떤 면에서 김씨의 아들 하인즈 워드는 혼자 알아서 큰 사람이다. 한국 언론이 그렇게 요란하게 떠들었던 것처럼 어머니가 의도적으로 정성을 기울여 만들어 낸 <한국식 교육>의 산물이 아니다.

살아남는 일에 바빴던 어머니는 아들을 크게 키우려는 꿈조차 갖지 못했다. 아들 등교시각보다 먼저 직장에 나가 한밤중에 퇴근하느라 맛있는 음식을 정성스레 만들어 주지도 못했고 책상머리에 차고 앉아 잣대로 아들 손바닥을 때리며 공부를 시키지도 못했다. 한국인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오는 아들에게 새 친구를 만들어 주려고 애쓰기 보다는 "다시는 한국애들 만나지 말라"고 고함만 질렀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씨는 이 시대의 위대한 어머니다. 자기의 회한을 한치도 아들에게 떠넘기지 않는 현명한 일을 해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아들에게 한 충고라고는 "겸손해라"는 말 뿐이었다는 사실이 그렇다. 어머니에게는 "내가 이렇게 고생하면 살아왔으니 너는 반드시 훌륭한 인물이 돼야 한다"하는 욕심보다 아들이 남들 욕 먹지 않고 건실하게 자라났으면 하는 소망 뿐이었다.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가기를 재촉하기 보다는 언젠가 높은 곳에서 내려와야 할 때를 미리 대비하게 했다. 그런 어머니의 교육이 오늘의 하인즈 워드를 만들어 냈다. 워드의 성공은 여느 풋볼 스타들처럼 그저 운동을 잘하는 데서 비롯되지 않았다. 거친 태클을 당해도 웃음을 잃지 않는 매력, 항상 동료에게 공을 돌리는 겸손함, 남들이 아무리 귀찮게 추근거려도 짜증을 내지 않는 참을성. 이런 것들이 바로 어머니 김영희씨가 아들에게 물려준 자산이었다. 내가 이루지 못한 한을 아들을 통해 풀려는 어머니에게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덕목이다.

어머니에게는MVP 트로피를 받은 수퍼스타보다는 남들에게 손가락질 당하지 않을 만큼 반듯하게 자란 아들이 더욱 자랑스럽다.

내가 이루지 못한 꿈은 이미 낡은 액자 속으로 사라져 버렸고 아들이 이뤄낸 꿈은 온전히 아들의 몫일 뿐이다. 이제 김영희씨에게 소망이 있다면 동네를 시끄럽게 만들던 기자들의 성화가 잠잠해져서 강아지 해피와 함께 한가롭게 새벽 산책이나 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