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 문명기 5권BR 모자이크로 읽는 그리스 로마 문명BR(At of Mosaic and GecoRoman Civilization) 고대의 삶과 사랑 BR2장. 테세라 모자이크의 세계 4.말타 1)말타(Malta)오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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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말타(Malta)의 역사
말타(Malta)는 키프러스처럼 한국에서 참 멀리 떨어진 나라다. 크기도 작아 피부로 느끼는 감이 더욱 멀다. 이탈리아 반도 남쪽 시칠리아 섬 바로 밑에 바위 한덩어리 툭 튕겨 생긴 형상이다. 정확히 유럽의 최남단 시칠리아 섬에서 남쪽으로 90km 지점. 북아프리카 최북단 튀니지에서 북으로 290km 지점에 자리한다. 유럽과 북아프리카를 남북으로 연결하는 것만이 아니다. 지중해 서쪽 끝 지브롤터 해협에서부터 치면 천 500km, 지중해 동쪽 오리엔트의 알렉산드리아와는 천 8백km 떨어져 동서 중간지점이다. 지중해 문명 교류와 교역의 중심기지로 최상의 조건을 갖췄다. 종착지가 아니라 중간 기지는 원래 인종적으로도 다양한 혼혈인 경우가 많다. 인구 40만의 말타도 예외가 아니다. 페니키아의 셈계열, 그리스, 라틴, 아랍의 피가 두루 섞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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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타 본섬 최정상부에 마련된 전망대. 섬 끝부분 해안이 내려다 보인다. 동서 길이가 27km, 남북 길이가 14km에 불과하니 얼마나 작은지 짐작할 수 있다. 말타 ⓒ김문환 |
말타는 참 작은 나라다. 국토 구성을 보면 본섬과 북부의 고조(Gozo)섬, 둘 사이에 있는 작은 코미노(Comino)섬으로 이뤄졌다. 가장 큰 본 섬이라 해도 섬 중앙의 산 정상부에서 섬 끝의 해안이 내려다 보일 만큼 작다. 동서 길이가 27km, 남북 길이가 14km에 불과하니 얼마나 작은지 짐작할 수 있다. 고쪼섬은 더 작다. 동서 길이 14km, 남북 길이 7km로 초미니섬이다. 작다고 역사적으로 가볍게 보면 안된다. 선사시대부터 각 시대별로 역사를 아로새기는 각종 유적과 유물이 풍부하다. 특히 프랑스 까르낙(Carnac) 만큼은 아니어도 영국의 스톤헨지(Stone Henge)에 버금가는 거석유적(Megaliths)은 지중해 연안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말타의 역사적 기원은 B.C 4천년 전 시칠리아 섬에서 이주해 간 신석기인들로 추정된다. 이들은 농경을 발달시키며 신전도 세웠다. 이어 B.C 2천 100년 새로운 이주자들이 발달된 농경 문화를 갖고 들어와 섬을 지배한 뒤 더욱 큰 신전건물을 올렸다. 이때 세워진 거석 신전들은 말타를 유럽 선사학의 요람으로 자리매김 하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 이어, B.C 천 200년 경 청동기인, B.C 800년 경 오리엔트에서 철기를 사용하는 페니키아인이 나타났다. 지금도 말타인들의 고유 언어는 페니키아어(셈어) 계열이다. 문자는 라틴 알파벳을 쓰고, 아랍의 오랜 지배를 받아 많은 아랍의 단어가 많다. 마치 라틴 알파벳을 문자로 쓰지만 돌궐 언어계통에 아랍의 단어가 많은 터키와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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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타 본섬 발레타 항. 뒤에 보이는 거대한 성벽이 세인트 존 기사단이 로도스섬에서 오스만 투르크군에 패한 뒤 말타로 옮겨 와 축성했다. 말타 ⓒ김문환 |
B.C 480년 모국 페니키아가 쇠약해지면서 카르타고인이 말타의 페니키아 도시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했다. 이 무렵 그리스인도 들어왔다. 이시기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명판에 그리스 문자와 페니키아 문자가 동시에 적혀 있어 페니키아 문자를 푸는 열쇠가 되기도 했다. B.C 264년 터진 카르타고와 로마의 전투에서 말타는 카르타고 전함들의 굳건한 기지였다. B.C 241년 1차 포에니 전쟁의 패배로 시칠리아가 카르타고에서 로마의 손으로 넘어갔을 때도 말타는 카르타고 수중에 그대로 남았다. 그러나, B.C 218년 2차 포에니 전쟁이 일어나면서 말타 역시 시칠리아처럼 로마지배로 들어갔다. 로마문명 아래 번영을 누리던 말타는 동서로마제국이 분열 할 때 동로마(비잔틴) 제국에 속했다. 하지만 비잔틴 제국의 영향력이 얼마나 강력하게 미쳤는지는 불투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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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빌라. 안에는 로마시대 모자이크가 몇점 보존돼 있다. 하지만 촬영금지다. 말타 ⓒ김문환 |
혼란 속에 840년 시칠리아를 장악한 북아프리카 튀니지 출신 파티마 왕조의 이슬람교도가 870년 말타도 손에 넣었다. 그러나 이슬람 치하에서도 기독교는 보호를 받았다. 991년 조사 때 이슬람 가구수가 만 4천 9백여가구인데 반해 기독교 가구수도 6천 3백가구나 돼 40%를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세금만 내면 관대했던 이슬람교 특유의 관용정신 덕분이다. 1090년 시칠리아의 이슬람 세력이 둘로 갈린 틈을 타고 바이킹이 시칠리아를 차지할 때 말타도 굴복시켰다. 이후 14,15c를 거치면서 기독교도들이 차츰 늘었다. 마침내 로도스섬의 세인트 존 기사단 (Knights of the Order of St. John)이 1522년 오스만 투르크 슐레이만 대제에게 패한 뒤 1530년 말타로 밀려들었다. 지금도 본섬 발레타 항구에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는 군사 요새는 이때 기사단이 만들었다. 기사단과 기독교도들은 1565년 오스만 투르크 군대의 파상적인 공격을 잘 막아내, 오스만 투르크의 해상을 통한 유럽침략 의도를 분쇄시킬 수 있었다. 유럽 기독교 세력 보호의 보루였던 셈이다.
현대사로 접어들면서 말타는 새로움 운명을 맞이한다. 프랑스 대혁명기간 중이던 1798년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을 떠나다 이곳에 들렀다. 프랑스의 영향력에 든 것이다. 그러나, 1802년 협약으로 말타는 다시 세인트 존 기사단 손에 돌아갔다가, 1814년 엘바섬에서 탈출한 나폴레옹의 백일천하 이후 영국 식민지가 됐다. 말타가 영국지배에서 벗어나 영연방의 일원으로 독립한 것은 1914년이다. 말타는 영국 지배의 영향이 남아 키프러스처럼 차량이 좌측으로 다닌다. 물론 영어가 말타어와 함께 공영어로 사용된다. 이탈리아어도 일부 사용하고.
◆ 2. 말타(Malta)의 유적과 모자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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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섬 서부 로마 목욕탕 유적. 자물쇠로 잠궈 놓고, 외부인 출입을 통제한다. 안에 모자이크가 한점 남아있다. 말타 ⓒ김문환 |
오늘날 로마시대를 떠올려 주는 유적이 많지는 않다. 본섬 중심부인 라바트(Rabat)에 로마시대 빌라를 박물관으로 개조한 유적지가 있다. 여기에 당시 빌라 바닥을 장식하던 모자이크 몇 점이 보존돼 있다. 물론 원형이 많이 훼손된 채... 또, 본섬 서부 지역에 로마 목욕탕(Roman Baths) 유적이 존재한다. 공중 화장실을 비롯한 목욕탕 시설 일부가 남아 있다. 여기에도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모자이크가 세월의 흐름 속에 더욱 원형을 잃어 가고 있다. 목욕탕 모자이크는 탐방객들에게 공개도 하지 않는다. 커다란 자물쇠로 채워 놨다. 필자는 어릴 적 사과서리 할 때 과수원 철조망 넘던 기억을 떠올리며 훌쩍 담을 넘었다. 그렇게 들어가 본 모자이크. 들판의 잡초더미 속에 묻혀 있다시피 방치돼 있었다. 우리로 치면 고구려 초기 고분 속 벽화유적과 비슷한데... 인류의 문화유산이 이렇게 사라져 가는 현실에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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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이크--로마당시 목욕탕 바닥 모자이크다. 바닥이 뒤틀려 많이 훼손된 모습이다. 바닥 모자이크 위에 가건물을 세워 보호하고 있지만 거의 방치된 상황이다. 말타. ⓒ김문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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