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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듀서스/'망해야 흥하는' 제작자들

김수현

입력 : 2005.12.22 17:57

안녕하세요? 폭설과 한파, 기세가 대단한데, 건강하게 잘 지내고 계신지요? 이제 정말 연말입니다. 해 놓은 것은 없이 또 나이만 한 살 더 먹는구나 하는 생각에 괜히 마음만 급해지는 요즘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밀린 숙제를 하나 하려고 합니다. 휴가


안녕하세요? 폭설과 한파, 기세가 대단한데, 건강하게 잘 지내고 계신지요? 이제 정말 연말입니다. 해 놓은 것은 없이 또 나이만 한 살 더 먹는구나 하는 생각에 괜히 마음만 급해지는 요즘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밀린 숙제를 하나 하려고 합니다. 휴가 때 뉴욕에서 보고 온 뮤지컬 ‘프로듀서스’ 얘깁니다. 다녀와서 바로 쓰려 했었는데, 이제야 쓰게 됐습니다. 마침 한국 공연도 얼마 안 남았군요.

뮤지컬 '프로듀서스'

2년 만에 방문한 브로드웨이는 여전히 화려했습니다. 그리고 요즘 이 화려한 동네를 주름잡고 있는 뮤지컬들은 대부분 코미디였습니다. 뮤지컬 ‘프로듀서스’는, 이 거센 브로드웨이 코미디 바람의 원조 격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2001년 토니상 12개 부문을 휩쓸고, 한 때 천 달러에 육박하는 암표가 기승을 부렸다는 뮤지컬입니다. 2001년, 2003년 뉴욕 방문 때마다 표를 못 구해(혹은 비싼 암표 살 돈이 없어) 보지 못하다 이제야 보게 됐으니, ‘3차 시기’만에 성공한 셈입니다.

‘프로듀서스’는 많이 알려진 대로, 일부러 망하려고 애쓰는 뮤지컬 제작자 맥스와 리오의 이야기입니다. 이들이 망하려고 하는 이유는, 그러면 돈을 더 많이 벌기 때문이죠. 공연 하루 만에 막을 내리게 되면 투자자들에게 돈을 돌려줄 의무가 없어지니까요. 공연에 투자받은 돈을 들고 브라질 해변으로 튀면 그만이랍니다.

맥스는 침을 튀기며 공연 제작의 제 1 원칙을 리오에게 설파하는데, 바로 ‘절대로 자기 돈은 투자하지 말라’입니다. 맥스와 리오의 ‘반드시 망하는 공연 만들기’는 눈물겹고 처절합니다. 밤을 새가며 대본을 읽으며 가장 형편없는 대본을 찾아내고, 정신병자 같은 나치 추종자인 작가를 살살 구슬려 계약서에 사인하게 하고, 어울리지 않는 게이 연출가를 섭외하고, 돈 많은 할머니들을 유혹해 투자를 유치하고.......

하지만 이렇게 해서 만든 뮤지컬 ‘봄날의 히틀러’는 심오한 주제의식을 블랙 코미디에 담아냈다는, ‘꿈보다 해몽’ 식의 극찬을 받으며 대성공을 거둡니다. 맥스와 리오는 망연자실, 반문합니다. “도대체 우리가 잘한 게 뭐지?”

남의 얘기 아니다

이런 설정은 지극히 ‘코미디’적인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반영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현실’은, 브로드웨이의 얘기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뮤지컬만의 얘기도 아니었습니다. 저는 공연을 보며 문득 한국의 공연계를 떠올렸습니다.

뮤지컬, 오페라, 콘서트..... 대형 공연이 봇물을 이루는 한국의 공연계. 물론 다 성공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 와중에 ‘공연은 망했는데, 제작자는 돈을 벌었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떠다닙니다. 공연은 망했는데 투자자만 손해 봤지 제작자는 끄떡도 없었다더라, 로비해서 따낸 후원금으로 공연은 대충 만들고 돈을 남겨 먹었다더라, 제작 하청 주면서 리베이트 받았다더라, 같은 소문들도 무성하지요.

공연 담당 기자 몇 년을 하면서, ‘정말로 미리 망하려고 작정한 것처럼 보이는’, 한심한 수준의 기획과 제작도 심심치 않게 봤습니다. 제대로 된 계획 없이 무조건 해외 유명 공연을 따놓고 보자는 식으로 유치했다가 갑자기 취소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습니다.

"망하려고 작정해도...."

여기에 비하면 뮤지컬의 주인공 맥스와 리오의 ‘행각’은, 비록 공연 당일 망하려는 목적에 따른 것이긴 하지만, 아주 주도면밀하고 성실합니다. 게다가 아무리 맥스와 리오가 ‘최악’으로 뽑은 연출 스태프와 배우들이라도, 최소한 ‘기본’은 됐던 겁니다. 이들은 공연이 개막 당일 망해야만 한다는 제작자들의 의도는 전혀 모른 채, 최선을 다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극중극인 ‘봄날의 히틀러’는, ‘제멋대로, 망하려고 만든 뮤지컬’로 설정됐는데도, 제 눈에도 배우들의 노래와 연기가 제법이었고, 재미있었습니다. 저는 금세 ‘히틀러에 봄날을, 독일에도 봄날을’ 어쩌고 하는, 웃기는 주제곡의 멜로디를 따라 흥얼거리게 됐고, ‘그래, 아무리 망하려고 작정해도 저 정도는 되는 게 브로드웨이란 말이지’ 하는 생각에, 엉뚱하게도, 질투심을 느꼈습니다.

애정가는 배역, 소심한 리오

주연 조연을 막론하고, 어느 하나 매력적이지 않은 배역이 없었지만, 소심한 회계사에서 뮤지컬 제작자로 변신하는 리오에게 가장 애정이 갔습니다. 특히 리오가 회색빛 사무실에서 다른 직원들과 나란히 책상 앞에 앉아, 마치 기계처럼 숫자와 씨름하다, 뮤지컬 제작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사표를 던지는 장면이 가장 유쾌했습니다. 직장인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꿈꾸는 장면 아닐까요. 뮤지컬이 주는 꿈과 환상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었습니다.

게다가 긴장하거나 흥분하면 어린 시절 쓰던 담요 자락을 꺼내 부비는 리오의 행동은, 저에게도 낯설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제 주변에도, 어른이 될 때까지도 아기 때 쓰던 이불이 없으면 잠을 못 잔다는 사람이 있었으니까요. 저는 리오가 담요 자락을 꺼내들고 부들부들 떨 때마다, 때 묻고 닳아서 너덜너덜해진 이불 끝자락을 만지작거리면서 잠들던 그 사람을 떠올리며 더 크게 웃었습니다.

한국 공연 번역과 연출, 어떻게?

저는 한국의 공연계 생각에 잠깐 쓴웃음도 지었지만, 내내 폭소를 터뜨리다 공연장을 나섰습니다. 그리고 ‘프로듀서스’의 한국 공연이 궁금해졌습니다. 속사포 같은 영어 대사들을 100퍼센트 이해했다고 하긴 어렵지만, 많은 대사와 상황들이 지극히 ‘미국적’이라는 것은 분명해 보였기에, 이를 어떻게 번역할지, 호기심이 솟았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대목들입니다. 스웨덴 계 금발 미녀 ‘울라’는 공연 내내 독특한 영어 억양과 발음으로 입을 열기만 하면 관객들을 웃겼는데, 이를 한국 공연에서는 어떻게 번역하고 연출할까? 그냥 사투리를 쓸까? 이를 테면 연변 처녀 말투로? 아니면 그냥 혀 짧은 소리를 낼까?

맥스는 공연을 망하게 하려고 온갖 재수 나쁘다는 일은 다 합니다. 출입문 앞에 사다리를 갖다놓고 배우들이 그 밑을 지나가게 한다든지, 죽은 고양이를 던져 넣는다든지 하는, 서양인들에게 통하는 이런 장면을, 한국 공연에서도 그대로 연출할 수 있을까요? 영어의 ‘행운을 빌어’라는 말과 ‘다리나 부러져라’라는 말의 반어적 의미는 어떻게 전달하게 될까요?

한국의 맥스와 리오에 거는 기대

한국 공연의 성공은 지극히 ‘미국적인’ 이 뮤지컬을 어떻게 한국 관객들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다듬어내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또 배우들의 연기가 중요한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공연을 여러 차례 보는 가장 큰 재미는 아마 배우들의 연기를 비교하는 데 있을 터. 제가 어렵게 휴가 내서 미리 공연을 보고 온 보람이기도 할 것이지요. 브로드웨이 공연의 맥스와 리오는 존 트레이시 이건과 헌터 포스터가 맡았었습니다. 한국의 맥스와 리오, 송용태와 김다현의 연기는 어떨지, 기대해 봅니다.

그 유명한 브로드웨이 오리지널 캐스트, 나단 레인과 매튜 브로데릭이 영화에도 나온다니, 비록 스크린에서라도 이들의 연기와 비교 감상할 수 있는 또 한 번의 기회가 생기는 셈입니다. 1968년작 영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뮤지컬이 그 성공 덕분에 다시 영화로 만들어진다니, 재미있는 일입니다. 흥행성만 있다면 영화에서 뮤지컬로, 다시 영화로, 재창조를 거듭하는 미국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속성을 보는 듯합니다.

같은 대본을 바탕으로 했더라도, 한국에서 제작되는 뮤지컬 ‘프로듀서스’가 미국의 ‘프로듀서스’와 같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하지만 확실하게 같은 점 한 가지. 한국에서나, 미국에서나, ‘프로듀서스’의 제작자들은 당연히, 극중의 맥스와 리오처럼 공연이 망하길 바라는 제작자들이, 절대 아니라는 점입니다. 얼마 남지 않은 한국 공연, 뮤지컬 팬의 한 사람으로서, 행운을 빕니다. (아니, ‘다리나 부러져라!‘ 라고 해야 할까요?^^)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이번 주말이 성탄절이네요. 즐거운 성탄절 보내시고, 희망찬 새해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올해도 제 글에 보내주신 따뜻한 관심에 다시 감사드립니다. 저의 ‘문화가 산책’은 새해에도 계속될 예정입니다. 앞으로도 동행해 주실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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