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 문명기 5권BR모자이크로 읽는 그리스 로마 문명BR(At of Mosaic and GecoRoman Civilization) 고대의 삶과 사랑 BR2장. 테세라 모자이크의 세계
-- 지중해 문명기 5권--
모자이크로 읽는 그리스 로마 문명
(Art of Mosaic and Greco-Roman
Civilization)
--고대의 삶과 사랑--
2장. 테세라 모자이크의 세계
2.이탈리아
1,2,3)로마(Rome) 1,2,3
4,5,6,7)바티칸(Vatican)
8,9,10,11)오스티아(Ostia)1,2,3,4
12)폼페이(Pompeii)
13,14)에르콜라노(Ercolano)1,2
15,16,17,18, 19, 20,21,22, 23,24,25)나폴리(Napoli)1,2,3,4,5,6,7,8,9,10,11
26,27, 28)팔레르모(Palermo) 1, 2, 3--오늘 이야기
29,30,31,32,33,34,35,36)피아짜 아르메리나(Piazza Armerina)
27)팔레르모 (Palermo) 2
◆2. 팔레르모(Palermo) 2
시칠리아는 지리적으로 이탈리아 반도와 떨어져 있는 만큼 역사적으로도 다른 길을 걸었다. 시칠리아의 특성을 이해하는데 꼭 필요하기 때문에 조금은 꼼꼼히 시칠리아의 역사전개 과정을 더듬어 볼 필요가 있다. 석기시대 유물도 꾸준히 발굴되는 시칠리아에 문명이라고 말할 수 있을 수준의 유적과 유물을 처음 남긴 세력은 현재까지 알려진 것으로 페니키아와 그리스인이다. 멀리 동방의 오리엔트에서 온 페니키아인들은 B.C 9c 시칠리아 서부에 둥지를 틀었다. 특히, 오리엔트의 페니키아 본국이 앗시리아등의 공격으로 어려움을 겪자 튀니지에 건설된 페니키아 식민도시 카르타고가 지중해 페니키아 문명의 맹주로 나섰고, 시칠리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팔레르모 국립박물관에는 페니키아 문명의 특징을 담은 유물이 남아 있어 페니키아의 자취를 더듬기 안성맞춤이다. 다양한 색상의 그림이 인상적인 장묘 유물은 그중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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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칠리아 풍경. 셀리눈테 유적. ⓒ김문환 |
그리스인들은 페니키아보다 조금 늦은 B.C 8c 나타났다. 주로 그리스 본토의 도리아인들이 시칠리아 동부에 거점을 마련했다. 이들은 나폴리를 중심으로 이탈리아 반도 남부에 성공적으로 자리잡은 그리스권 도시들과 마그나 그레키아(Magna Grecia, 대(大)그리스 연방)를 결성하며 번영을 누렸다. 마그나 그레키아 가운데 낭중지추(囊中之錐)의 도시국가는 코린토스 출신 그리스인들이 건설한 시라쿠사다. 시라쿠사는 B.C 5c 지중해 주변 최고의 문명도시로 이름 높았다. 페르시아를 물리친 아테네의 막강 해군을 패배시켜 아테네를 쇠망의 길로 접어들게 했을 만큼 군사력도 최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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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쿠사. 석굴 감옥. 아테네 포로들을 가뒀던 곳이다. ⓒ김문환 |
그리스 문명권에서 괄목(刮目)할 업적을 남긴 과학자 가운데 한명으로 꼽히는 아르키메데스. 그가 활약했던 시라쿠사는 오늘날 미국의 시라큐즈 대학으로 이름을 남기는데... 학문과 번영의 도시 시라쿠사 유적지를 찾으면 아직도 그리스 시대 극장을 비롯해 각종 유적이 오롯이 남아 탐방객에게 그리스의 화려한 전설을 되새겨 준다. 시칠리아에는 시라쿠사 뿐 아니라 아그리젠토, 셀리눈테, 세제스타, 타오르미나 같은 그리스 도시들도 남아있다. 이 도시들에는 그리스 본토에서도 찾기 어려운 신전이나 기타 도시유적이 위용과 아름다움을 한껏 자랑한다. 도리아 양식의 거대한 신전들은 그림같은 절경의 바다와 빼어난 산세를 배경으로 자연과 인간 예술이 빚어 내는 이중주의 절정을 뽐낸다. 그리스 로마 유적의 보고로 손색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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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칠리아 풍경. 아그리젠토 신전. ⓒ김문환 |
그러나, 그리스나 카르타고의 역사적 시련은 참으로 쓰다. 이들 모두 B.C 3c 떠오르는 태양 로마에 무릎을 꿇고 말았기 때문이다. 시라쿠사는 2차 포에니 전쟁기간인 B.C 212년, 카르타고는 B.C 202년 막을 내렸다. 이제 시칠리아는 로마 손아귀에 들었다. 로마 식민지 신세이던 시칠리아는 254년 게르만족의 침략을 받았다. 이어 440년 서고트족(西고트族, Visigoth)의 침략으로 이베리아 반도에서 밀려난 반달족(Vandals)에게 유린당했다. 반달족은 북아프리카를 휩쓸고 카르타고를 수도 삼아 반달 왕국을 세운 뒤, 여세를 몰아 시칠리아를 철저히 약탈한 것이다. 이후 시칠리아는 로마의 지배권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러나, 535년 동로마, 즉 비잔틴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 그의 명을 받은 벨리사리우스 장군이 시칠리아를 점령하면서 시칠리아는 다시 비잔틴(동로마)의 영향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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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파의 납치 전경--3층 전시관 바닥을 꽉 메워주는 거대한 작품이다. 유로파의 납치를 가운데 배치하고 주변에 포세이돈, 계절의 여신, 메두사등 그리스신화 소재와 연극장면등을 다양하게 넣었다. 팔레르모 박물관 ⓒ김문환 |
이것도 잠시. 831년 바다 건너 옛 카르타고 지역에 설립된 이슬람 파티마 왕조에게 팔레르모를 빼앗겼다. 965년에는 시칠리아 전체가 이슬람 세력권에 포함됐다. 오늘날까지 시칠리아에 이슬람의 영향을 받은 많은 건축물이 남아있고, 시칠리아 사람들의 상당수가 아랍인과 혼혈돼 독특한 외모를 갖게 된 이유다. 그러나, 이슬람 세력은 1071년 북유럽에서 배를 타고 대서양과 지중해를 가로질러 시칠리아에 닻을 내린 바이킹에게 자리를 내줬다.
지독한 추위와 안개의 악조건에 살던 바이킹에게 시칠리아는 낙원이었다. 바이킹은 이슬람 통치를 종식시키고 1130년 나폴리까지 정복해 [시칠리아-나폴리 왕국(이는 마치 제주도와 충청도가 하나의 나라를 이룬 것과 같다)]을 건설했다. '시칠리아-나폴리 왕조'는 얼마 뒤 신성로마 황제 하인리히 6세와 혼인관계를 맺는다. 이를 계기로 '시칠리아-나폴리 왕조'의 왕위는 독일계 '호헨슈타우펜 왕가'로 넘어갔다. '호헨슈타우펜 왕가'의 프리드리히왕 때 시칠리아는 문화적으로 비잔틴과 아랍, 카톨릭을 접목한 독특한 형태로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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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파의 납치 중간 전경. 가운데가 유로파의 납치장면. 유로파의 납치 장면 네귀퉁이에는 계절을 여신으로 의인화해 나타냈다.유로파는 누구인가? 페니키아 공주로 빼어난 용모의 소유자였다. 그녀를 탐내던 제우스가 소로 변해 유로파를 유혹하는데... 유로파가 잠시 소의 등을 쓰다듬는 순간 소는 유로파를 등에 태우고 줄행랑을 놨다. 어디로? 크레타 섬으로. 여기서 태어난 아들 가운데 한명이 미노스 왕이다. 의붓아들(?) 미노타우로스를 가두기 위해 미궁(迷宮)을 만들었던 비운의 왕. 팔레르모 박물관 ⓒ김문환 |
1266년 새로운 변화가 찾아왔다. 교황 클레멘스 4세가 '시칠리아-나폴리 왕조'의 왕위를 프랑스의 '앙주 백작 가문'에 넘겨준 것. 교황 클레멘스 5세가 1305년 정정이 불안하던 이탈리아 반도를 떠나 앙주 백작겸 나폴리왕이 장악하고 있던 프랑스 아비뇽으로 교황청을 옮겨 '아비뇽의 유수'가 생긴 것은 이런 배경이다. 지금도 나폴리에 프랑스 앙주 가문의 성이 남아있고, 팔레르모에는 프랑스 국왕 루이 9세가 잠들어 있다. 앙주 가문의 통치는 오래가지 못했다. 반란으로 시칠리아에서 물러난 앙주 가문은 나폴리만 다스렸고, 시칠리아는 이베리아 반도의 아라곤 왕국 차지로 돌아갔다. 시칠리아와 나폴리가 분리된 사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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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파의 납치--모자이크의 한가운데를 장식하는 중심소재다. 페니키아 공주 유로파를 제우스가 소로 변해 크레타로 납치하는 장면으로 소에 날개가 달렸다. 소가 아닌 사자의 모습 같기도 하다. 팔레르모 박물관 ⓒ김문환 |
그러나 1443년 아라곤 왕국 알폰소 5세는 앙주 가문으로부터 나폴리를 빼앗아 시칠리아와 나폴리를 다시 하나로 합쳤다. 당시 아라곤은 이베리아 반도 북부를 장악하며 남부의 이슬람 세력과 대치중이었다. 1479년 아라곤 왕국의 페르디난드 왕과 카스틸라의 이사벨라 여왕이 결혼하면서 이베리아 반도는 에스파니아(스페인)로 통일됐고, '시칠리아-나폴리 왕조'도 에스파니아 왕의 관할이 됐다. 이후 1713년 이탈리아 북부의 '사보이 왕조'가 시칠리아를,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그 왕조'가 나폴리를 차지하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 1734년 다시 에스파니아 지배로 되돌아갔다. 이때 에스파니아는 프랑스에서 건너간 '부르봉 왕조'가 통치하고 있었다. 나폴레옹의 침략 이후 프랑스 지배아래 놓였던 '시칠리아-나폴리 왕국'은 나폴레옹 몰락 뒤 1816년 에스파니아의 페르디난드 7세 지배로 넘어갔다. 이후 1860년 가리발디의 통일운동에 힘입어 신설된 이탈리아 왕국이 시칠리아를 차지하니... 시칠리아가 얼마나 복잡한 여정을 걸어왔는지 알 수 있다. 얽힌 실타래 같은 험로를 거쳐 시칠리아는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천 4백년 만에 다시 이탈리아 본토와 하나의 나라로 통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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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장면--연극용 탈과 배우, 연극 대본등이 보인다. 유로파의 납치 전체 장면 가운데 한부분을 장식한다. 팔레르모 박물관 ⓒ김문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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