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화 볼 빨간 김인식 감독께 번트에 대한 견해를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경기가 끝나고 복기를 해 보면 아, 그때 번트를 대지 말 걸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더라구. 번트라는 게 한 점에 집착하다가 두세 점 날 기회를 잃는 거거든
"경기가 끝나고 복기를 해 보면 '아, 그때 번트를 대지 말 걸'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더라구. 번트라는 게 한 점에 집착하다가 두세 점 날 기회를 잃는 거거든. 사실 요즘 야구에 1대 0, 2대 1 승부가 얼마나 돼? '점수를 내느냐 마느냐'도 중요하지만, '얼마나 많이 내느냐'가 더 중요한 거거든."
일찌감치 '명장' 반열에 오른 데 이어 최근엔 '신'으로까지 격상된 김인식 감독. 김 감독이 맡은 팀들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번트의 숫자가 확연히 적다는 것이죠. 91년 쌍방울을 시작으로 12시즌 동안 쌍방울과 OB-두산을 지휘했었는데, 그 중 여섯 번이나 '팀 최소 번트'를 기록했습니다. 올해의 한화는 더 엽기적입니다. 9월 20일 현재 겨우 31개로 압도적인 꼴찌입니다. 꼴찌에서 두 번째인 기아의 74개의 반도 안 되고, 제일 많이 번트를 댄 SK의 126개와 비교하면 4분의 1밖에 안 되는 숫자입니다. 이대로 가면 경기수가 100경기 이상으로 늘어난 지난 84년 이후 처음으로, 한 시즌에 번트를 40개 미만으로 대는 신기원을 이룩할 것이 유력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런 김 감독의 '무번트 철학'이 세이버메트릭스의 번트에 대한 이론과 매우 유사하다는 점입니다.
'Ultimate Baseball Encyclopedia'를 자처하는 2004년판 'Total Baseball'에는 30여 페이지에 걸쳐 세이버메트릭스계의 주요한 이론들을 소개해 놓고 있습니다. 이 중에서 희생 번트에 대한 설명을 옮겨 보겠습니다.
희생번트는 좋은 작전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첫번째 방법은, 번트를 댔을 때 얻을 수 있는 득점과 번트를 대지 않았을 때 얻을 수 있는 득점을 비교하는 것이다. 무사 1루의 상황부터 시작해 보자. 이 상황에서 그 이닝이 끝나기 전에 기대할 수 있는 점수는 0.783점이다. 번트가 성공한다면 1사 2루가 된다. 1사 2루의 기대 득점은 0.699점이다. 기대 득점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희생 번트는 나쁜 작전인 셈이다. 0.084점을 까먹기 때문이다. 이건 이치에 맞는 이야기이다. 만약 희생 번트가 더 많은 점수를 만들어 낸다면, 감독들은 지금처럼 결정적인 순간에만 번트를 대는 게 아니라 수시로 댈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9회말 동점상황이라면? 이런 상황에서는 많은 득점이 필요하지 않다. 딱 한 점이면 이길 수 있다. 2점, 3점 4점이 날 가능성은 적어도 된다. 딱 한 점만 낼 수 있다면.
99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톰 루안은 각기 다른 '주자-아웃카운트' 상황에 따라 '한 점이라도 날 가능성'을 분석했다. 아래 표를 보자.
주자상황
|
아웃카운트 |
||
무사 |
1 사 |
2 사 |
|
없음 |
0.261 |
0.148 |
0.061 |
1 루 |
0.424 |
0.267 |
0.124 |
2 루 |
0.608 |
0.400 |
0.216 |
1-2루 |
0.617 |
0.413 |
0.219 |
3 루 |
0.819 |
0.651 |
0.269 |
1-3루 |
0.843 |
0.646 |
0.275 |
2-3루 |
0.841 |
0.667 |
0.274 |
만루 |
0.855 |
0.664 |
0.316 |
무사 1루에서는 한 점이라도 날 확률이 42.4%이다. 1사 2루에서는 40%로 떨어진다. '한 점 짜내기'를 위해서도 번트는 그다지 좋은 생각이 아니다. 득점 확률을 2.4% 떨어뜨리니까.
하지만 반드시 그런 건 아니다. 루안의 표에 나온 숫자는, 80년부터 모든 메이저리그 경기들로부터 구한 '평균치'이다. 번트가 실제로 득점의 가능성을 높이는 정말 특수한 상황이 존재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2루 주자가 매우 빠르다고 치자. 이 주자는 단타 때 홈까지 들어올 가능성이 평균보다 훨씬 높다. 평균적인 40% 대신 45%의 득점 확률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이렇다면, 번트는 한 점 내기를 위한 좋은 작전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건 매우 특이한 경우이며, 예전 기록을 보면 번트는 대부분의 상황에서 그다지 좋은 작전이 아니다. 현대 야구의 대부분의 감독들은 이런 견해에 동의할 것이다. 진 모크만 빼고. (얼마 전에 사망한, 유독 우승과 거리가 멀었던 비운의 감독이죠. 번트를 많이 대기로도 유명했습니다.)
-- Jim Thorn 등 'Total Baseball' 2004년판 중에서...
세월의 풍파를 겪은 어르신의 지혜와, 최첨단의 복잡한 이론이 유사하다니-재미있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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