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닉슨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고,
워싱턴 포스트지의 워터게이트 사건 보도도 탄력을 잃고
지지부진하고 있을 무렵,
닉슨 행정부는 손봐야 될 언론사와 언론인들에 대한
구체적인 행동에 나섭니다.
첫번째는 고위직 공무원들이,
백악관에서 문제가 있다고 판단한 언론사의,
(구체적으로는 The New York Times, The Washington Post, Time, Newsweek)
기자들을 사적으로 만나주지 않기 시작합니다.
공식적인 기자회견 이외에는 취재 자체를 원천 봉쇄 한 것입니다.
두 번째는 뉴욕 타임즈와 워싱턴 포스트지의 경쟁사,
(구체적으로는 The Washington Star, The Washington Daily,
The New York Daily News, The Chicago Tribune,
그리고 잠시나마 The Los Angeles Times)에게
크고 작은 기사를 단독으로 주면서
이들 언론사들을 키워 주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닉슨 행정부에 적대적인 기자들의 모든 통화를 도청하고
사생활을 파헤쳐 협박자료로 삼으려는 작업을 벌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에 닉슨 행정부가 도청한 기자들은,
워싱턴 포스트지의 모든 주요 간부와 주요 부처 출입기자들,
Joseph kraft 라는 신디케이트 컬럼니스트,
뉴욕 타임즈의 Hedrick Smith, William Beecher 백악관과 국회 출입기자,
CBS 방송국의 Marvin Kalb 기자,
Henry Brandon 이라는 London Sunday Times 기자 등이었습니다.
네 번째는 각종 포커스 그룹을 활용해 조사한 결과를 토대로
당시까지 통상 언론을 자칭하던 "the press" 라는 말보다
어감이 나쁜 "the media"라는 말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면서,
현재의 대부분의 미국 언론은 국민의 알권리를 충족시키고,
국민의 목소리, 즉 여론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몇몇 갑부 사주의 지시를 받은 간부진들의 목소리와
특정 정당의 의사전달 기구로 전락했다는식의 비판을
기회 있을 때마다 계속 합니다.
동시에 자신들은 이 같은 언론의 희생자라는 점을 부각시켰습니다.
다섯 번째는 워싱턴 포스트지에 구체적으로 취해진 조치였는데,
아예 그레이엄 여사를 몰아내고,
워싱턴 포스트지의 소유주를 바꾸는 방안과
워싱턴 포스트지가 소유한 지역 방송국 두 곳의
면허 갱신을 해주지 않는 방법으로
소유권을 빼앗는 방안을 동시에 추진합니다.
골치 아픈 워싱턴 포스트지의 소유주를 아예 바꿔 버리기 위해
닉슨 대통령은 자신과 아주 친한 보수 우익의 피츠버그의 거부
Richard Mellon Scaife 라는 사람과 접촉합니다.
또, 많은 수익을 내서 사실상 워싱턴 포스트지를
먹여 살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워싱턴 포스트지 소유의 플로리다주에 있는 지역 방송국
두 곳의 면허 갱신을 앞두고,
1972년 12월 29일과 1973년 1월 2일에
잇따라 워싱턴 포스트지에 대한 재인가를 반대하고,
자기들이 경영권을 인수하겠다는 사람들의 이의신청이 접수됩니다.
플로리다주에서 허가 갱신이 예정된 방송국이 30개가 넘었지만,
이의신청이 된 곳은 워싱턴 포스트지가 소유한 두 곳 뿐이었습니다.
또한 신청한 사람이나 단체에는
닉슨 대통령과 개인적으로 절친한 사람들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워싱턴 포스트지가 운영 중이던 지역 방송국에 대한 평판도 좋았고,
단지 외지인보다는 플로리다 주 사람이
지역 방송국을 경영하는 것이 좋다는 이유로
방송국 면허갱신을 해주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도 무리가 있어,
워싱턴 포스트지는 재판을 통해
최종적으로 두 곳의 지역 방송국 소유권을 지킵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재판과 변호사 비용 수십 억원을 써야 했고,
워싱턴 포스트지의 주가는 38달러에서
16-17달러로 절반이상 폭락하면서
회사가치가 절반이상 줄어드는 위기를 겪습니다.
같은 무렵인 1973년 1월 8일,
워터게이트 사건 관련자 7명에 대한 재판이 시작됩니다.
예상했던대로 관련자들은 고위층의 개입 여부를 부인한 채
자신들의 범행 자체에 대한 유죄를 인정합니다.
민주당이 중심이 된 미국 상원이 워터게이트 사건을 조사하기 위한
위원회 구성을 결의 한 것도 이땝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렇게 서서히 진척되던 사건의 흐름에
결정적인 돌파구가 나타납니다.
재판에서 자신들의 단독범행이라며 유죄를 인정했던
James McCord 라는 사람이
담당 판사였던 Judge Sirica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의 형을 감해준다는 조건을 들어준다면,
워터게이트 사건 재판에서 위증이 저질러졌으며,
자신이 입을 다물라는 압력을 받은 사실,
그리고 고위층이 개입했다는 사실들을 모두 털어놓겠다면서
이를 경우 자신의 생명이 위험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고 밝힌것입니다.
워싱턴 포스트지가 그 동안 외롭게 주장해왔던
워터게이트 사건 스토리의 큰 그림이 대부분 진실이라는
결정적인 증거가 나온 것입니다.
브래들리 편집국장의 당시 표현대로
워싱턴 포스트지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Bingo!"였습니다.
4월 30일, 신임 법무장관인 Elliot Richardson에게
미국 헌정사상 처음으로 특별 검사 임명권이 부여되고,
그날 밤, 뭔가 기분 나쁜 듯한 묘한 표정으로
TV 카메라 앞에 선 닉슨 대통령은
워터게이트 사건의 책임은 인정하면서도, 잘못은 인정하지 않는
애매 모호한 대국민 연설을 합니다.
1973년 Pulitzer 상은 워터게이트 사건을 끈질기게 보도한
워싱턴 포스트지의 Woodward, Bernstein 기자에게 돌아갑니다.
상원의 진상조사 위원회가 진척되면서 워터게이트 사건은
이제 워싱턴포스트지의 문제가 아닌 국가적 문제와 관심사가 됐고,
만질수록 커 져지는 물건으로 변해있었습니다.
(여담입니다만, 당시 TV로 생중계 된 진상조사위에서
민주당의 법률 고문으로 나와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칼날 같은 논리로
하루가 멀다 하고 닉슨 행정부의 실세들을 박살 내서(?)
상당히 주목받았던 사람이 있었으니,
훗날 백악관 안주인이 되는 힐러리 여사였습니다.
당시의 TV 화면을 보면, 예일대 법과 대학원을
뛰어난 성적으로 졸업한 사람답게(?) 크고, 두꺼운 안경에,
아주 촌스러워 보이면서도, 열정이 넘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아마 힐러리 여사는 그 당시, 자신이 훗날 first lady가 되고,
바로 자신의 남편이 성추문으로 탄핵절차를 받게 되며,
이 같은 진상조사 위원회로부터 호되게 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겠죠...)
이런 상황에서 멀게만 느껴졌던 종착역이
또 한번의 결정적인 증언으로 눈 깜짝할 사이에 코앞에 다가옵니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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