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 문명기 4권BR 도자기로 읽는 트로이 전쟁과 로마의 건국 글 싣는 순서 7장. 아에네이드와 로마의 건국 BR 1. 베르길리우스와 아에네이드 2. 아에네아스, 트로이 탈출 3. 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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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중해 문명기 4권-- 도자기로 읽는 트로이 전쟁과 로마의 건국 --글 싣는 순서-- 7장. 아에네이드와 로마의 건국 1. 베르길리우스와 아에네이드 2. 아에네아스, 트로이 탈출 3. 카르타고와 디도 4. 아스카니우스 5. 로물루스, 로마건국 6. 브루투스와 공화정--오늘 이야기 7. 옥타비아누스와 황제정
6. 브루투스와
로마 공화정
◆1. 로마의 왕정 시대
농경국가 로마는 로물루스를 포함해 4명의 왕이 다스리며 뿌리를 내렸다. 농민왕 시대라고 부른다. 흥미로운 점은 왕을 세습하는 대신 왕이 죽을 때 마다 새로운 왕을 선출했다는 점이다. 마치 칸이 죽을 경우 부족회의 쿠릴타이에서 새로운 왕을 선출하던 몽고족의 전통은 물론 가장 강한 자를 왕으로 옹립하는 15c 이집트 마물루크 왕조(중앙 아시아 돌궐족 출신 용병 왕조)의 왕 선출 방식과 비슷하다. 로물루스의 뒤를 이은 2대왕은 누마. B.C 715년 부터 B.C 673년까지 다스렸다고 하는데... 원로원의 추대 요구를 정중히 거절하다 왕위에 오른 그는 야누스 신전을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 누마가 43년간을 다스린 뒤, 툴루스가 3대왕이 됐다. 그는 B.C 641년까지 통치했다고 한다. 그의 치세에 알바 롱가를 정복했다. 알바 롱가 주민들은 비록 피정복민이지만, 로마인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 아스카니우스(이울루스)의 후손인 율리우스 가문도 이때 로마로 넘어왔다. 4대왕은 안쿠스. B.C 616년까지 권좌에 있었다. 그는 사비니족 출신으로 2대왕 누마의 외손자였다.
이렇게 로마 출신 농민왕 4명에 이어 이민족인 에트루리아 출신이 왕위에 올랐다. 가장 강력한 힘을 갖고 있던 타르퀴니아 출신 타르퀴니우스가 B.C 600년 왕이 된 것이다. 이후를 상인왕 시대라고 부른다. B.C 579년까지 다스린 5대왕 '타르퀴니우스'는 로마 최초로 선거운동을 통해 민회의 선출로 왕위를 차지한 것으로 전해진다. 타르퀴니우스는 그리스 펠레폰네소스 반도 코린트인과 에트루리아인의 피가 섞인 인물이었다. 순수 혈통이 강조되던 에트루리아를 벗어나 이민족에 대한 차별이 적던 로마로 와 성공한 경우다. 당시 에트루리아는 로마보다 훨씬 앞선 기술과 문화를 발전시킨 선진 문명권이었다. 로마가 나중에 에트루리아 문명을 파괴해 많은 유적들이 사라졌지만, 살아 남은 지하고분들은 아름다운 프레스코, 도자기, 무기류, 석관, 장신구등을 지금까지 전해준다. 로마 문자 역시 에트루리아를 거친 그리스 문자에서 생겨났으니, 로마 입장에서 보면 에트루리아는 문명의 스승인 셈이다. 에트루리아 출신 타르퀴니우스는 오늘날까지 '포로 로마노(로마 포룸)'라고 불리며 남아있는 로마의 핵심 지역을 개발하는등 대형 공공사업을 벌인 왕으로 평가받는다.
6번째 왕 세르비우스는 B.C 534년 까지 다스렸다. 타르퀴니우스의 사위였지만, 능력을 인정 받아 그의 아들들을 제치고 왕으로 선출됐다. 그가 건설한 '세르비우스 성벽'은 로마에 오늘날까지 일부가 남아있을 정도로 견고했다. 각종 제도를 개혁하고 인구조사도 실시하는등 로마를 내실있게 다스렸다. 그러나, 가정사에 문제가 즉, 집안에서 바가지가 샜다. 두 딸이 있었는데, 그중 툴리아라는 딸의 성정이 아주 고약했다. 자기 남편과 여동생을 죽인 뒤 여동생의 남편과 결혼한 여자였으니... 사랑이 지나친 것인가? 사랑만은 아닌 것 같다. 왕인 아버지 마저 죽이고 권력을 찬탈했으니 말이다. 피도 눈물도 없는 이 여인의 남편은 B.C 509년까지 왕위를 지켰는데, 하는 짓이 아내 못지 않아 '오만 불손하고 거만한 타르퀴니우스' 왕이라 불렸다. 로마의 7대 왕이다. 군사적 지도력이 뛰어나 전쟁에서는 늘 승리를 거뒀지만, 로마의 왕정은 그를 마지막으로 종말을 고하고 만다.
◆2. 브루투스, 로마를 공화정으로
거만한 왕 타르퀴니우스에게는 섹스투스라는 아들이 있었다. 못되기로 둘째 가라면 서러웠던 그가 4촌인 콜라티누스의 아내 루크레티아를 겁탈했다. 수치심에 괴로워하던 루크레티아는 콜라티누스에게 복수를 부탁하고 자살했다. 화가 치민 콜라티누스는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Lucius Junius Brutus)'라는 로마의 운명을 바꿀 인물과 이 문제를 상의한다. 브루투스는 시신을 공개한 뒤 시민들에게 내막을 설명하고 타르퀴니우스 왕을 비난했다. 분노한 시민들로 반란군을 조직한 브루투스는 마침내 타르퀴니우스 왕을 내쫓았다. B.C 509년의 일이다. 그렇다면 다음번 왕을 선출했는가? 그렇지 않기 때문에 브루투스가 로마 역사에 길이 기억된다. 그는 타르퀴니우스 왕의 조카로 혈통이 좋고, 시민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더우기, 전임 왕을 몰아낼 만큼 실력도 있었기 때문에 민회등을 거쳐 왕으로 직접 선출되거나 아니면 원하는 인물을 왕으로 옹립하는 게 가능했다. 그러나, 그는 달랐다.
브루투스는 이제 로마가 왕정을 폐지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왕의 권력에 짓눌려 신음하며 살아가지 말자면서 시민의 자유를 지키자고 호소했다. 왕을 뽑지 말고 매년 민회에서 로마를 이끌어 갈 관리를 2명씩 선출해 국정을 맡기자고 주장했다. "임기 1년의 관리로 나라를 다스린다." 아! 고대 사회에서 이런 발상이 가능했다. 요즘도 우리는 대통령 한번 뽑으면 5년이고, 미국은 4년 연임으로 8년, 프랑스는 7년 연임 14년이 가능하다. 그런데 1년만 하고 물러나는 제도를 만들어 냈으니... 브루투스는 최초의 집정관으로 선출됐다. 그러나, 불운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왕위를 빼앗긴 타르퀴니우스가 가만히 물러나지 않았다. 타르퀴니우스는 왕위를 부당하게 빼앗겼다고 생각했다. 이의 탈환을 위해 에트루리아 지원군을 이끌고 로마를 공격해 왔다. 여기에 브루투스의 두 아들이 연루된 사실이 밝혀졌다. 브루투스는 공화정을 위해 지체없이 두 아들을 처형했다. 로마인들이 그의 이같은 조치에 크게 감동됐다. 나아가 전쟁에서 브루투스가 전사하자 그를 기억하고 공화정을 이어가자는 열기가 더욱 고조됐다. 왕정과 에트루리아인 지배를 끝내고, 로마인들의 공화정을 이끌어 낸 브루투스는 로마인의 가슴에 오래도록 살아 남았다. 카이사르와 옥타비아누스가 독재정을 만들어 왕정을 부활시키기까지...
로마 공화정을 간략히 더듬어 보자. 임기 1년의 집정관 2명이 1년만 국정을 책임졌다. 1명이면 독재로 다시 빠질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재선은 1번만 허용됐다. 전쟁 등의 국가 위기시에는 임기 6개월의 독재관을 임명할 수 있었다. 6개월의 독재관을 5번이나 연임한 사람은 한 번 있었다. 공화정이 등장한 이후 강력한 추진력을 잃어 한때 로마 사회가 퇴보기를 맞기도 했지만 로마의 공화정은 귀족에서 평민으로 정치 참여범위를 확대하면서 발전해 나갔다. B.C 450년엔 민주적인 원칙을 성문화한 12표법을 만들었고, B.C 337년에는 리키니우스법으로 평민의 공직진출을 보장했다. 로마법은 오늘날 서유럽 사회 법제의 모태이자 민주적 사회 운영원리의 철학적 기초를 이뤘다. 물론 이런 원리는 로마의 스승 그리스에서 넘어온 것이다. 그리스의 각 도시국가들은 로마에 앞서 이미 B.C 6c 민주주의 제도를 운영하고 있었다.
◆3. 공화정 아래 제국으로 성장
로마는 5백여년 간 공화체제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위업을 달성했다. 먼저 로마는 라티움과 주변 이탈리아 반도 북중부에 할거하고 있던 여러 부족국가들을 차례로 제압했다. B.C 390년 갈리아(골)족의 침입등으로 큰 혼란을 겪기도 했지만, B.C 290년 아드리아해를 손에 넣고, 이어 에트루리아 도시국가 연합도 몰아냈다. 이후, 이탈리아 반도 남쪽 그리스인들이 차지하고 있던 곳으로 정복의 깃발을 돌렸다. 나폴리(Napoli, 그리스어로 새로운 도시라는 뜻의 '네아 폴리스' Nea Polis) 근처에는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대그리스 연방(Magna Grecia)를 결성하며 번영을 누렸는데, 하나 둘 로마의 지배로 넘어갔다. B.C 3c 말에는 골족도 알프스산맥 밖으로 밀어낼 수 있었다.
이탈리아 반도를 손에 넣은 로마는 바다 건너 시칠리아로 갔다. 시칠리아에는 도리아, 이오니아 출신 그리스인과 함께 카르타고인들이 빼어나게 앞선 문명을 꽃피우고 있었다. 에게해와 이집트, 메소포타미아에서 발달한 고문명의 성과를 그대로 흡수한 결과다. 부력의 원리를 목욕탕에서 발견했다는 "유레카(Eureca, 알아냈다)"의 아르키메데스가 학문을 발전시킨 나라 시라쿠사는 시칠리아의 대표적인 그리스 도시국가다. B.C 264년 카르타고와 전쟁을 벌여 승리한 로마는 시라쿠사를 제외하고 시칠리아 대부분을 빼앗아 제국의 길로 들어섰다. 이어 사르디니아와 코르시카, 이베리아 반도를 카르타고로부터 차례로 넘겨받았다. B.C 212년에는 아르키메데스를 죽이고 시라쿠사를 점령해 그리스인들을 시칠리아에서 마지막으로 쫓아냈다. 시칠리아는 로마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로마는 북으로도 기수를 돌려 갈리아 남부 해안의 리구리아족과 그리스인들을 모두 복속시켰다.
카르타고가 그냥 물러서지 않고 도전해 왔다. 1차 포에니 전쟁의 패장 하밀카르. 그가 이베리아 반도의 한 귀퉁이로 가 재기에 성공한 뒤, 그의 아들 한니발이 로마에 대한 복수를 선언했다. 한니발은 알프스를 넘어 코끼리를 타고 로마로 공격해 왔다.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설원의 알프스 통과. 본국의 호응을 얻지 못한 한니발은 전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기병을 활용한 뛰어난 전술로 4차례의 대접전에서 로마군을 무찔렀다. 한니발이 대승을 거둔 칸나에 전투는 역사상 이에 앞서 펼쳐졌던 알렉산더와 다리우스 대왕간의 이수스 전투, B.C 202년 한니발과 스키피오간 자마 전투와 함께 고대 3대 전투로 기록된다. 그러나, 로마는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전열을 재정비해 카르타고를 굴복시키고, 지중해 동방의 헬레니즘 세계로 발길을 돌렸다. 그리스 민족은 단결하지 못하고, 각국이 경쟁하며 다투다 모두 로마에 무너지고 만다. 로마는 지중해 전역을 로마의 호수로 만들었고, 지중해 제국의 자리에 올랐다. B.C 51년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복과 브리타니아 게르마니아 원정, B.C 29년 옥타비아누스의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정복은 화룡점정(畵龍點睛)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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