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BR 정동영 통일부장관이 북한에 가서 한 건을 하고 왔습니다. 네티즌반응을 다룬 어느 기사에 따르면 "대박"이랍니다. 이 기사에 인용된 어느 네티즌의 뉴스 댓글은 이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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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한국이 그토록 바라던 북한 6자회담 복귀는 진짜 큰 것이고 '대박'이다" "미국이 그토록 애타게 시도해도 안되던 것을 정장관이 건져 왔다" "게다가 덤으로 서해NLL(북방한계선)문제논의, 이산가족 상봉, 광복 60주년 기념행사때 북한 고위층 서울방문 등등까지 가져왔는데...(후략)"
정동영 장관은 10년 감수했을 겁니다. 애시당초 입각하면서 외교안보 수장역을 지망하여 맡게 된 정 장관에게는 '남북관계-북핵문제에서 전과를 올려 그것을 바탕으로 당에 복귀, 대선에 나간다'는 장기 플랜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꼬였습니다. 김일성 전 주석 조문 불허, 그리고 동남아 국가를 통한 탈북자 대규모 수용 등을 빌미로, 북한 당국은 정 장관을 철저히 '왕따'시켜왔습니다. "평양땅을 한번도 못밟은 통일부 장관으로 만들어주겠다"면서. 사실 조문 불허나 탈북자 대규모 수용이 무슨 나쁜 짓 한 것도 아니고, 정 장관이 북한당국의 왕따 취급으로 인해 속을 태워야 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분위기가 어디 그렇습니까. 당 복귀의 시계는 째깍째깍 돌아가는데 이번 방북에서 빈손으로 돌아왔다면, 아니,그보다 더해서 혹시 의전 푸대접 등의 골탕이라도 먹고 왔다면 정 장관의 속은 시커멓게 탔을 겁니다. 이번 정 장관의 방북은 그런 의미에서, 정동영 본인에게나 나라를 위해서나 일단은 성공적이었습니다.
정동영 장관이 가져온 김정일 위원장 관련 뉴스 중 가장 주목을 받은 것은 역시 북핵문제에 대한 입장표명입니다. 오늘 아침 신문1면 톱들이 일제히 이 소식을 다뤘습니다. 대략 제목은 "6자회담 7월중 나갈 수 있다" "핵 갖고 있을 이유 없어..NPT복귀 의사도 있다" 등입니다. 제목만 봐서는 아주 희망적인 소식입니다.
그런데, 외교안보 분야를 취재하고 기사를 써 본 경험에 비추어 보면, 이는 "김정일 위원장이 직접 복귀의사를 언급했다" " '7월'이라는 시점을 거론했다"는 점 정도가 긍정적 의미부여가 가능할 뿐, 어떤 획기적 진전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당장 "핵 무기고를 늘려가고 있다"고 했던 얼마전 북한당국자의 발언은 뭐라고 봐야 하겠습니까. 보도를 좀 더 자세히 읽어보면 김정일 위원장의 발언에는 단서가 달려 있습니다. "미국이 우리를 인정, 존중하려는 뜻이 확고하다면..." "미국이 우리를 업수이 여기지 않는다면.." 이러저러한 조치를 취할 용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얘기는 북한이 수도 없이 되풀이해왔던 것입니다. 외교적발언이라는 게 원래 그렇습니다. 같은 표현도 어떤 시점에, 어떤 맥락에서, 어느 부분에 방점을 두어 말하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게 됩니다. 한때 대화 외적인 방법이 거론될 정도로 핵문제가 악화되었던 상황을 감안할 때, 김정일이 무력충돌을 원하지 않는다는 속내를 솔직히 밝힌 부분은 성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까지입니다. 실제로, 6자회담 복귀 여부는 "미국과 좀 더 협의를 해봐야겠다"고 했다지 않습니까.
김정일 위원장은 핵을 들고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지만, 많은 핵외교 전문가들의 분석은 다릅니다. 북한은 미국과의 관계개선과 과거 핵의 보유라는 두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게 가능할까..라고 생각될지 모르지만, 실제로 파키스탄은 이 두가지를 얻어낸 바 있습니다. 911 이후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축출과 알카에다 소탕전에 협조함으로써, 앞으로 핵무장을 추가로 강화하지 않는 한 이미 갖고 있는 핵에 대해서는 묵인을 받아낸 것이지요. 파키스탄은 북한의 핵개발 과정에서 주요설비를 공급한 나라입니다. 북한이 기계부품만 들여왔을까요? 핵개발 지휘자들을 접촉하면서, 핵개발 문제를 다루어가는 전략전술까지 함께 들여왔을 가능성이 높다고, 저는 봅니다. 북한의 대외입장 표명은 여러가지 경로를 통해 나옵니다. 멀게는 조선신보와 같은 동포언론을 통하기도 하고, 중국이나 러시아, 미국에 나가있는 외교관을 통하기도 합니다. 로동신문이나 조선중앙통신같은 미디어를 활용하기도 하고요. (평양방송같은 대내용 매체는 약간 격이 떨어집니다.) 조선중앙통신에 나오는 외무성 대변인 성명은 일반적으로, 북한의 공식입장을 가장 잘 알려주는, 정교한 문건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북한 당국은 이런 경로들을 통해서 미국과의 대립각을 세워왔습니다. 미국도 만만치않은 독설들을 쏟아내 왔으니 피장파장이지만 아무튼 그랬습니다. 그런데 어제 김정일 위원장은 한껏 '통 큰' 모습으로 등장해 '다 알고 있다. 나는 부드러운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극대화시켰습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창출됐었지만 한동안 잊혀졌던 이 이미지는 앞으로 북한이 6자회담 개최시까지의 협상을 끌어가는데 상당히 유용한 도구로 활용될 것입니다.
특기할 만한 것은, 북한이 지금 6자회담에 나갈까 말까, 언제나갈까를 갖고 미국으로부터 이끌어내려는 대답들은, 실은 6자회담 테이블에서 논의돼야 할 것들이라는 점입니다. 위기상황 또는 경색국면을 만들어놓고, 그것을 조금 완화하는 것만으로 (원점으로 되돌리는 것 또는 상황을 '진전'시키는 것도 아니고) 과실을 챙기는 북한특유의 '벼랑끝 전술'의 또다른 면입니다. 정동영 장관이 얻어낸 '국방장관회담,이산가족 상봉'등도 그렇습니다. 인터넷 댓글이나 일부 보도를 보면 그게 마치 전에 없던 새로운 성과처럼 묘사된 경우가 있는데, 그렇지 않죠. 북한이 생떼를 부리지 않았으면 당연히 계속되고 있었어야 할 일들입니다. 이런 걸 막아놓았다가 마치 선심쓰듯 풀어주는 것에 입 헤 벌리고 당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북한에서 핵문제를 다루고 있는 외교관들은 '공화국의 엘리트'로 육성돼, 2-30년씩 같은 업무만 전문으로 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순환원칙에 걸리고 정권교체의 바람에 휩쓸려야 하는 우리쪽 사정과는 다릅니다. 게다가, 북한은 "여론의 풍향"으로부터 자유롭게 외교적 전술을 운용할 수 있습니다. 종횡무진 강온양면 전술을 구사할 수 있는 또다른 이유입니다. 근본적으로는, 북한은 '더 잃을 게 별로 없다'는 강점을 갖고 있습니다. 동네 싸움을 생각해 보십시오. 병 깨서 배 긋고 시작할 수 있는 X하고, 셔츠 단추 떨어질까봐 걱정하는 X하고 붙으면 누가 이길지.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가 주도권을 쥐고 풀어나간다"는 착각 속에, 북한 외교일꾼들의 입 노릇-그것도 그들이 필요해서 역할을 줄 때나 활용당하는 파트타임 역할에 만족하게 될지 모릅니다.
최근 몇달간의 북핵위기를 통해서 하나 분명해 진 것이 있습니다. 북핵문제는 '북한이라는 나라의 안전보장이 아니라 , 김정일 정권의 안전보장'에 달렸다는 겁니다. 김정일 위원장 스스로 말했습니다. 어제 오찬에서 한 참석자가 "미국이 김 위원장의 무엇을 업수이 여겼고, 미국이 어떻게 해야 6자회담 복귀가 가능한가" 라고 묻자 김 위원장은 "우리 체제를 보존 또는 유지시켜 준다는 언급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답변했다지요. 문제가 조금 더 분명해 졌으니 해결의 전망도 조금은 밝아졌다고 할까요. 우리에게는 북한의 핵포기를 유도하면서 '북한이라는 국가의
안전보장 의사는 있지만, 사실 김정일 정권은 뒤집고 싶어서 미치겠는'
미국과 일본을 설득해야 하는 난제가 맡겨져 있습니다. 북한과의 신뢰도
중요하지만, 미.일과의 뿌리깊은 신뢰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아무쪼록 노무현 정부가 이 난제를 잘 풀어내 주기를 기대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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