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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리나의 눈물, 기자의 눈물

김수현

입력 : 2005.04.14 08:06

브로드캐스트 뉴스라는, 좀 오래된 미국 영화가 있습니다. 아마 보신 분들도 꽤 계실 겁니다. 저는 이 영화를 학창 시절에 봤습니다. 이 영화에서 배우 윌리엄 허트는 출세지향형의 방송 기자로 나오는데, 성폭행


'브로드캐스트 뉴스'라는, 좀 오래된 미국 영화가 있습니다. 아마 보신 분들도 꽤 계실 겁니다. 저는 이 영화를 학창 시절에 봤습니다. 이 영화에서 배우 윌리엄 허트는 출세지향형의 방송 기자로 나오는데, 성폭행 피해자와 인터뷰하다가 자신이 눈물 흘리는 장면으로 유명해지면서, 결국은 앵커로 성공하게 됩니다. 그런데 피해자의 아픔에 진심으로 공감하는 것처럼 보였던 이 기자의 눈물은 조작이었습니다. 나중에 편집된 장면이었던 것입니다.

김지영-김용걸 씨의 인터뷰

저는 발레리나 김지영 씨를 인터뷰하다가 문득 이 영화의 장면을 떠올렸습니다. 김지영 씨가 인터뷰 도중 감정이 복받쳐 눈물을 보였고, 저까지 눈시울이 붉어졌기 때문입니다. 바로 어제였습니다. 저는 5년만에 한국 무대에서 호흡을 맞추는 김지영-김용걸 커플을 취재하기 위해 국립발레단 연습실에 가 있었습니다. (바로 지난번 글에서 각각 파리 오페라 발레와 네덜란드 국립 발레단에서 활동 중인 두 사람의 고국 무대에 대한 저의 '기대'를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그 전날 밤에도 저는 두 사람이 다른 출연진들과 함께 무대 리허설을 하는 장면을 촬영하고 분장실에서 인터뷰를 했었습니다. 그리고 그 날은 다시 연습실에서 두 사람만 연습하는 장면을 촬영한 뒤였습니다. 두 사람의 인터뷰는 하루 전에 이미 해 놓았지만, 분장실에서 한 사람씩 따로따로 한 인터뷰가 '맛이 없다'고 느껴졌기 때문에 다시 인터뷰를 하기로 했습니다. 함께 땀흘리며 연습한 직후 하는 인터뷰라 느낌이 달랐습니다.

넓은 연습실 바닥에 앉아, 두 사람을 마주 보며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5년만에 처음 함께 춤추는 소감을 차례로 들었습니다. 두 사람은 모두 너무 오랜만이라 걱정했었는데, 연습을 시작하고 며칠만에 금세 예전의 감각을 되찾았다며, 다시 춤추게 돼 반갑고 기쁘다고 대답했습니다. 김지영 씨는 '매일 나와 다르게, 반대로 생긴 외국 사람들과 춤추다가, 나와 비슷하고 친근한 얼굴이 눈 앞에 있으니까 참 좋았다'며 깔깔 웃었습니다.

"춤을 정말 잘 추고 싶다"

인터뷰는 두 사람의 해외 생활에 관한 이야기로 이어졌습니다. 김지영 씨는 현재 활동하고 있는 네덜란드 국립 발레단이 마음에 들고, 자신에게 기회도 많이 주어질 것 같다며 기대를 표시했습니다. 새로운 안무가와 작업을 하면서 몰랐던 부분을 배워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춤을 정말 잘 추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춤을 잘 추고 싶다......사실 한국에 계실 때도 춤 잘 춘다는 얘기는 많이 들었잖아요? 정말 춤을 잘 춘다는 게 뭐라고 생각하세요?"

"사람 욕심은 끝이 없어요. 하지만 저는 완벽한 것을 바라는 것은 아니에요. 저는 완벽하면 예술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뭔가 모자라고 인간미가 있어야 그게 예술 아닐까요. 저는 춤을 추면서 '스스로 알아갈 때'가 기분이 좋아요.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기분이에요. 그런데 이렇게 '알아간다'는 게 쉬운 게 아니에요. 사실 2년 동안 발레 포기할 생각을 할 정도로 많이 힘들었는데......."

김지영 씨는 여기서 말을 잠깐 끊더니 목이 메이기 시작했습니다. 금세 눈에 눈물이 고였습니다. 뜻밖의 일이라 제가 약간 놀라고 있는데, 다시 말을 이어갔습니다.

"상황도 힘들기도 했고...... 사실 처음에 저한테 좋은 기회가 많았었어요. 그런데 부상으로 인해 모든 게 떨어진 거예요. 추락해 버린 거예요. 그래서 정말 많이 울었어요. 다시 못할 줄 알았어요. 도망가 버리고 싶기도 했고......."

지영 씨는 눈물을 닦으면서도 말을 그치지는 않았습니다. 아주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는 지영 씨의 눈물짓는 얼굴을 보면서 '정말 생생한 인터뷰가 되겠다'는 생각에 '방송쟁이' 특유의 '심봤다'는 생각을 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생각도 잠깐, 저도 덩달아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네덜란드에 가서 얼마 안 돼 부상을 당하고 수술까지 해서 활동을 많이 하지 못했다는 얘기는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정말 힘들었구나...... 춤이 인생의 전부였던 사람이 2년 동안이나 춤을 추지 못했다니, 그 좌절감과 고통이 얼마나 심했을까. 게다가 남의 나라 땅에서 얼마나 외로웠을까. 저는 질문할 때 갈라지는 목소리를 추스리느라 괜히 헛기침을 해야 했습니다.

정말 특별하고 고마운 공연

'해적'은 그래서 지영 씨에게 더욱 특별하고, 고마운 공연입니다. 얼마 전부터 다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지영 씨는 이번 공연이 자신의 무용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이 공연을 앞두고, 떨리고, 긴장되고, 심지어는 정말 두려워서 한국에 오고 싶지 않다는 생각까지도 했고, 팬들의 기대가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기대가 자신에게 힘이 되기도 했다고 말했습니다. 또 이 공연으로 인해 자신이 하루하루 달라지고 있다고, 이 공연을 김용걸 씨와 함께 해서 정말 다행이라고 말했습니다.

"아직 제가 제 컨디션을 완전히 되찾은 것은 아니지만, 또 모르는 것을 많이 알아가는 것 같아요...... 더구나 김용걸 씨와 함께 하니까 더욱 뜻깊고 도움이 돼요. 딴 사람과 같이 했다면 이렇게 못했을 것 같아요."

김지영 씨는 눈물을 닦고 환한 얼굴로 인터뷰를 마쳤습니다. 맑은 표정이 참 아름다웠습니다. 김용걸 씨도 웃는 표정으로 지영 씨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지영 씨와 함께 국내 정상의 발레 커플로 활약하다가, 말도 잘 통하지 않는 프랑스, 파리 오페라 발레에서 군무부터 시작하며 마음 고생을 겪었으니, 아마 김지영 씨의 아픔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사람일 터이지요.

지영 씨는 부상으로 정말 괴로웠을 때 파리에 가서 김용걸 씨를 만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때 용걸 씨는 '앞으로 좋은 일이 더 많이 있으려고 지금 이런 일을 겪는 것'이라고 위로해 줬지만, 당시에는 너무 힘들어 이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었다고 지영 씨는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용걸 씨의 마음을 알 것 같다고도 했습니다.

'내가 그 사람이 되어 보는 것'

저는 예전에 '브로드캐스트 뉴스'를 볼 때, 기자가 인터뷰하다가 눈물을 보이는 게 뭐라고 그것 때문에 명성을 얻게 되는지, 왜 눈물 흘리는 장면을 조작을 하려고 하는지조차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영화에 '몰입'하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인터뷰하는 기자는 냉철하고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지금도 제가 인터뷰하다가 눈물지은 것이 약간 당혹스럽고 부끄럽습니다. 뭔가 '기자답지 못한' 것 같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때로는 '내가 그 사람이 돼 보는 것'이 인터뷰의 요체가 아닌가 하는. 그리하여 김지영 씨는 저에게 마음을 열었고, 저는 지영 씨의 아픔을 아주 조금이나마 함께 느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아, 이렇게 쓰고 보니 또 부끄러워집니다.)

김지영-김용걸 씨는 내일(아, 이 메일이 발송될 시점이면 '오늘'이 돼 있겠군요. 저는 지금 야근하면서 이 글을 쓰고 있으니까요.) 발레 '해적'의무대에 처음 오릅니다. 저는 이 공연을 볼 생각입니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말이 있지만, 이 두 사람은 그 동안 더욱 깊이를 더해 성숙한 춤을 보여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지영 씨가 '춤을 정말 잘 추고 싶다'고 한 말의 뜻을, 이제는 좀 알 것 같습니다. 지영 씨의 춤을 그전보다 더욱 좋아하게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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