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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카산드라

김문환

입력 : 2005.04.11 09:01

BR BR 지중해 문명기 4권BRBR도자기로 읽는 트로이 전쟁과 로마의 건국 글 싣는 순서 5장. 트로이 함락 BR 1. 트로이 목마 2. 트로이 함락과 대학살 3. 카산




-- 지중해 문명기 4권--

도자기로 읽는
트로이 전쟁과 로마의 건국

--글 싣는 순서--

5장. 트로이 함락


1. 트로이 목마

2. 트로이 함락과 대학살

3. 카산드라--오늘 이야기

4. 라오콘

5. 프리아모스

6. 안드로마케

7. 아스티아낙스, 헬레노스

8. 폴릭세나

9. 헬레네 고향으로

10. 아가멤논의 죽음

11. 고대 그리스의 불륜

3. 카산드라

 

◆1. 아폴론의 사랑을 거부한 당찬 여인

 

트로이는 이제 역사무대에서 사라졌다. 지긋하게 이어지던 전쟁도 끝났다. 트로이 전쟁 이야기도 이제 막을 내려야 할 시점. 지금 부터는 트로이 함락때 죽거나 피해를 당한 트로이 사람들을 살펴본다. 또 승리를 거둔 아카이아 연합군측 사람들의 전쟁 후일담 즉 전쟁 뒤 어떤 고초를 겪게 되는지 숨겨진 얘기도 파헤친다. 먼저 들여다 볼 인물은 트로이 함락을 예견하며 목마를 들이지 말라고 울부짖었던 여인. 트로이의 종말이 자신의 불행으로 이어질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목마반입을 반대했던 비운의 여인 카산드라. 그녀의 기구한 인생역정부터 얘기해 보자.

 

카산드라는 프리아모스의 딸, 트로이 공주다. 미래를 예지하는 능력을 가졌던 카산드라는 목마가 불길한 징조임을 알아채고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 프리아모스왕이 목마를 들여 온다고 했을 때 결사 반대했다. 목마 안에 무장 병사들이 가득 차 있으니 성안에 들이면 트로이가 파멸될 것이라는 경고를 보냈다. 그녀는 이미 스파르타에서 헬레네를 데려왔을 때 파리스가 트로이 멸망의 원인이 될 것이라고 예언한 바 있다. 이외에도 프리아모스가 아킬레스 진영으로 갔을 때 헥토르의 시신을 찾아올 것이라는 점을 예견하는등 앞일을 쪽집게로 맞춰 냈다. 문제는 그녀의 예언이 언제나 맞아 떨어졌지만, 남들의 주목을 끌지 못했다는 점이다. 궁금하다. 어떻게 귀신처럼 앞날을 내다볼 수 있었고, 또 쪽집게 예언이면서도 왜 다른 사람을 설득할 수 없었을까?

 

카산드라. 두손을 들어 절규하듯 목마의 트로이 성내 반입을 반대하는 모습. 특이한 것은 이 부조가 간다라 지방에서 발견됐다는 점이다. 간다라는 오늘날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북부지방. 알렉산더의 원정이후 이곳에 뿌리를 내린 그리스인들이 자신들의 신앙체계와 역사, 문화를 그대로 가져와 이식했음을 보여주는 귀한 작품이다. 브리티시 뮤지엄. ⓒ김문환

 

먼저 카산드라가 예언능력을 갖게 된 과정. 카산드라는 프리아모스와 정비 헤카베 사이에서 태어난 적통 공주다. 특이한 점은 헬레노스와 이성(異性) 쌍둥이로 태어난 것. 쌍둥이는 대개 동성이지만 종종 이성 쌍둥이도 있다. 어릴 적 시골서 보니까 이성 쌍둥이의 경우 어느 한쪽은 조금 부실해 보였는데 유전학적인 이유가 있었는지... 프리아모스는 둘의 탄생을 기뻐해 아폴론 신전으로 갓난 아이들을 데려가 축제를 벌였다. 그러나, 다음날 와 보니 뱀이 아이들을 돌보며 혀로 핥아 주는 게 아닌가! 잡아 먹으려나! 뱀은 프리아모스 부부를 보더니 슬그머니 근처 월계수로 올라갔다. 월계수는 신성한 아폴론의 나무. 뱀은 아이들에게 특별한 능력을 주기 위한 의식을 수행한 것이었다. 이후 카산드라와 헬레노스 쌍둥이 남매는 예지능력을 갖게 됐다.

 

카산드라가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력을 갖게 된 또 다른 설. 이 두번째가 더 실감나고 설득력 있다. 그녀가 절세의 미인이란 점에 먼저 주목해야 한다. 그녀의 시누이 즉 파리스의 아내 헬레나 만큼은 아니지만 카산드라를 보고 바람둥이 아폴론이 반했을 정도로 빼어난 미모였다. 아폴론이 누구인가? 잘생기고 문학과 음악을 관장하는 감수성 많은 남성. 요즘말로 꽃미남인데... 꽃미남 아폴론이 아카이아 연합군에 맞서 트로이를 줄기차게 응원한 이유가 혹시 카산드라를 사랑했기 때문은 아닐까? 아폴론은 카산드라를 너무 좋아해 어떻게든 그녀를 안아보고 싶어했다. 카산드라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아폴론은 그녀에게 예언능력을 줬다. 미모를 탐해 신이 내린 사랑의 선물이 미래를 알 수 있는 예지력이라. 그래서 그런가 요즘도 신문 광고에 나오는 [00보살], [00도사]라는 직함의 사진속 여인네 얼굴은 모두 예사롭지 않다.

 

카산드라는 보통이 넘는 여자였다. 시시한 속물과 차원이 달랐다. 다이아몬드 수십, 경우에 따라 수백개라도 어렵지 않게 마련할 수 있는 선물, 즉 예지능력을 받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아폴론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고, 잠자리 요구를 단호하게 물리쳤다. 불끈 달아올라 카산드라를 취하려 마음먹었던 아폴론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아폴론은 꽃미남으로 감성적이지만 화가 나면 이성을 잃어버리는 고약한 버릇이 있다. 장미속 가시라 할까? 아폴론은 카산드라에게 벌을 내렸다. 벌은 간단했다. 그녀의 입에 침을 뱉었다. 아폴론의 침을 맞은 카산드라의 입은 부정해 졌고, 부정한 입에서 나오는 예언은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을 수 없었다. 기발한 아이디어지만, 왠지 아폴론이 치졸한 남자로 보인다. 스토커가 아닌 다음에야 범부(凡夫)들도 사랑에 실패하면 자기 속만 태울 뿐 그런 식으로 보복하지는 않는데... 아! 카산드라의 절개가 곧았지만, 트로이의 비극은 거기서 싹텄다.

 

◆2. 아가멤논의 여인이 되다

 

B.C 390년 작품. 小아이아스가 카산드라를 잡으러 가는 모습을 그렸다. 오른쪽에 멋진 투구를 쓰고, 방패와 창을 들고 접근하는 남자가 아이아스. 가운데 여인은 카산드라. 카산드라가 붙잡은 상은 팔라디온. 일부에서는 아테나 여신상이라고도 한다. 브리티시 뮤지엄 ⓒ김문환

카산드라의 간절한 외침도 트로이 사람들의 어리석은 결정을 막지는 못했다. 그녀는 모든 것을 체념하고 자신이 받드는 아테나 여신의 신전으로 갔다. 그리스에서 신전은 피안(彼岸)의 소도(蘇塗)다. 이곳에서는 모든 인간들이 추악한 행패를 멈추고 오직 신에게 경건한 마음으로 경배를 올리는 일만 허용된다. 누구도 이런 관행을 버리지 않았다. 카산드라는 곧 불길한 일. 다시말해 아카이아 연합군의 말발굽과 창칼 아래 트로이가 초토화 될 것이란 점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최후의 순간을 자신이 모시는 신 앞에서 맞이하고 싶었던 것이다. 신전 안에는 팔라디온 신상이 보관돼 있었다. 아테나가 자기 때문에 죽어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던 여인 팔라스. 그녀의 동상 팔라디온은 제우스가 신성을 불어넣은 성물(聖物)이었다.

 

그러나 조국 잃은 여인의 뜻이 제대로 지켜지기는 어려운 법. 아카이아 연합군의 소(小)아이아스가 카산드라를 찾아 나섰다. 그는 약빠른 사람이었다. 다른 많은 병사들이 여자를 겁탈하고 금은보화를 약탈하느라 정신없을 때 머리를 한바퀴 더 돌렸다. 제욕심 차리기 보다 높은 사람을 먼저 챙겼다. 아가멤논 대왕에게 무엇을 상납해야 하는가? 이런 문제부터 따지는 사람이 주변에 적지 않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대의는 물론 직분과 사회적 존재의의를 망각하는 사람들. 공동체에서 맡은 역할이 중요할수록 이런 사람이 사회에 끼치는 해악은 크다.

 

끔찍했던 상황을 좀더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팔라디온 붙잡고 있는 카산드라를 아이아스가 머리채를 붙잡아 끌어내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아이아스는 한손에 칼을 들었다. 루브르 ⓒ김문환

아이아스는 생각이 빨랐다. 트로이에 있는 최고미인은 헬레네. 그녀는 아가멤논의 동생 메넬라오스의 아내가 아닌가? 현재 데이포보스와 살고 있다고 해도 아카이아 연합군이 승리한 뒤에는 메넬라오스 차지다. 배신에 대한 징벌로 죽이든지 아니면 화해한 뒤 다시 아내로 데려가든지 메넬라오스의 손에 달렸다. 그렇다면, 헬레네 다음의 미녀는 누구일까? 트로이 왕족 가운데 최고의 미녀는 카산드라였다는게 일반적인 평가였다. 카산드라를 잡아 아가멤논에게 바친다면 훌륭한 진상품이 될 터였다. 전장에서 취한 최고 미녀를 대장이 갖는 것은 고대 전투 현장에서 자연스런 현상이었다.

 

아이아스는 서둘러 아테나 신전에 도착했다. 신전 안에 카산드라가 팔라디온을 붙잡고 있음을 확인한 그는 "빨리 나와 순순히 오라를 받으라"고 소리쳤다. 물론 아이아스의 고함에 응할 카산드라가 아니었다. 나오는 순간 어떤 운명이 펼쳐질 지 뻔히 아는 그녀가 움직일 까닭이 없다. 몇 차례 불렀지만 응답이 없자 아이아스는 급한 성미를 참지 못하고 "돌격" 명령을 내렸다. 몇몇 병사를 데리고 무엄하게 신전 안으로 들이닥쳤다. 신전 안에 숨어 있던 여인네들은 "걸음아 날 살려라". 이리 뛰고 저리 달리며 우왕좌왕할 뿐 좁은 신전 안에서 도망갈 곳이 없어 하나, 둘 아카이아 연합군 병사들의 억센 손아귀에 들었다. 귀를 찢는 애처로운 비명 소리를 뒤로 한채 끌려 나갔다.

 

아테나. 아이아스의 만행을 하늘에서 내려다 보고 있다. 아테나는 늘방패를 들고 전투적인 이미지로 그려지지만 여기서는 아름다운 여신으로 등장한다. 아이아스는 아테나 신전을 더럽힌 죄로 훗날 아테나의 벌을 받아 죽고 만다. B.C 390년 작품. 브리티시 뮤지엄 ⓒ김문환

카산드라는? 아테나 신전 깊숙히 모셔 놓은 팔라디온을 꼭 붙잡고 떨어지지 않으려 애썼다. 결혼한 여자나 남자는 만질 수 없고, 순결한 처녀만이 만질 수 있는 정결한 성물(聖物), 팔라디온. 카산드라로서는 자신이 기댈 최후의 방책을 쓴 것이다.

 

그러나, 목적을 위해서라면 피도 눈물도 없는 아이아스에게 이런 행동이 통할 리 없다. '아카이아 연합군의 수호신인 아테나 여신을 욕되게 할 것인가'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팔라디온을 붙잡고 있던 카산드라 앞으로 갔다. 그녀의 머리채를 잡고 강제로 떼냈다. 목적을 달성했지만, 이 과정에서 신성한 팔라디온에 손을 대는 불경죄를 저질렀다. 아테나 여신은 크게 노했다. "감히 내 성역에 들어와 행패를 부리는 것도 모자라 성물에 함부로 손을 대다니..."

 

 

 

 

 

 

 

 

 

 

 

◆3. 비극적인 최후

 

아이아스에게 잡힌 카산드라. 팔라디온을 잡고 버티는 카산드라를 마침내 아이아스가 잡아 낙아채고 있다. 트로이 함락당시 여인들이 겪었던 상황을 잘 보여준다. 루브르 ⓒ김문환

 

훗날 아테나에게 벌을 받게 될 아이아스는 일단 카산드라를 끌어내 신전 밖으로 나왔다. 약탈을 마친 장군들이 전리품을 한데 모아 배분했다. 아가멤논에게 카산드라가 진상됐음은 물론이다. 아가멤논은 호메로스가 일리아드에 기록으로 남기듯이 전쟁을 치르며 숱한 여자를 거느렸다. 각지를 점령할 때마다 최고의 미녀가 그에게 헌상됐기 때문이다. 시중드는 미녀들이 그의 막사에 즐비했다는 것인데... 아가멤논이 처음 사랑을 느낀 여인은 크리세이스였다. 그는 공개석상에서 크리세이스가 자신의 부인 클리템네스트라 보다 훨씬 낫다며 결혼할 생각임을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본의 아니게 다시말해 아폴론의 노여움을 잠재우기 위해 그녀를 어쩔 수 없이 돌려보낸 뒤 크게 상심했다. 그러다, 전쟁을 끝내면서 카산드라를 만난 것인데...

 

아이아스에게 붙잡힌 카산드라. 아이아스가 카산드라를 끌고 가고 있다. 카산드라는 결국 전리품이 돼 아가멤논의 여인이 된다. 브리티시 뮤지엄 ⓒ김문환

 

아이아스에게 잡혀온 카산드라를 보는 순간 아가멤논은 한눈에 반해 버렸다. 지금껏 어떤 여자에게서도 느낄수 없던 강한 욕정이 솟아 올랐다. 미인이라면 숱하게 봐 왔지만, 이번엔 달랐다. 전리품이 아니었다. 사랑스런 여인이었다. 성적인 차원의 노리개를 넘어 마음이 통하는 동반자로서 카산드라가 다가옴을 느꼈다. 카산드라를 향한 열정을 뿌리칠 수 없었다. 아가멤논은 결정했다. 결혼을. 둘은 곧 살림을 차렸고, 아가멤논의 고향 미케네로 함께 돌아갔다. 사실, 카산드라는 그때까지 처녀의 몸이었다. 트로이 공주로서 미케네 왕과 결혼한 것으로 보면 된다. 아폴론도 군침만 흘렸지 범하지 못했던 카산드라는 이제 아가멤논의 여인이 됐다. 문제는 아가멤논이 이미 처가 있었다는 점. 분란이 일어날 것임은 쉽게 예측 가능하다. 더구나 카산드라가 쌍둥이 아들 텔레다모스와 펠롭스를 낳자 상황은 급격히 나빠졌다. 질투에 사로잡힌 아가멤논의 첫 부인. 클리템네스트라. 헬레네의 언니인 클리템네스트라는 무서운 복수극을 준비한다. 나중에 아가멤논의 죽음 편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카산드라에게 불운의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