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 요즘 저는, 약간 과장을 보태자면, 주말과 휴일을 드라마 토지 보는 재미로 보내고 있습니다. 평일에는 텔레비전을 볼 시간이 거의 없지만, 토요일과 일요일 저녁만은 별일 없는 한 텔레비전을 틉니다. 그런 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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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저는, 약간 과장을 보태자면, 주말과 휴일을 드라마 '토지' 보는 재미로 보내고 있습니다. 평일에는 텔레비전을 볼 시간이 거의 없지만, 토요일과 일요일 저녁만은 별일 없는 한 텔레비전을 틉니다. 그런 저를 보고 제 딸이 '엄마 또 토지 보려고?' 할 정도입니다. 박경리 선생이 1969년부터 1994년까지 쓴 대하소설 '토지'는 여러 차례 드라마로 만들어졌지만, 완간본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드라마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합니다. 어릴 때 즐겨 보던, 탤런트 최수지가 서희로 출연했던 드라마와 비교하는 재미도 재미려니와, 원작 소설을 어떻게 영상으로 옮겼는지를 짚어보는 맛도 여간 아닙니다. 저는 이 16권을 대부분 한 권 한 권 차례로 사들이며 읽었습니다. 여러 권을 한꺼번에 살 수도 있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습니다. 세트를 다 사서 쌓아놓으면, 무슨 경주하듯이 책을 읽게 될 것 같아서였습니다. 아주 맛있는 코스 요리를 먹는 것처럼, 차례차례, 조금씩 뜸을 들여가면서 읽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갖고 있는 '토지' 책은 각 권이 서로 다른 서점에서 사들인 것입니다. 이 중 14권을 사들였던 서점이 지금도 기억에 남습니다.
강남 압구정동의 아파트 단지 뒤편을 지나치다가 길가에 차를 세웠습니다. 상가 건물에 '책'이라는 간판이 걸려있는 걸 봤기 때문입니다. 자세히 보니 참고서류나 베스트셀러 몇 종을 갖다놓고 파는, 작은 문구점이 아직 문을 닫지 않고 있었습니다. "혹시 저기 토지 14권 있나 얼른 들어가서 봐 줄래? 있으면 좀 사다 줘." 운전석에 앉아있던 저는 찻길에 내리기가 번거로워 조수석에 앉아있던 친구에게 부탁했습니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기대는 하지 않았습니다. 친구도 글쎄, 하는 표정으로 차에서 내려 가게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조금 있다가 친구가 참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친구의 손에는 토지 14권이 들려 있었습니다. "야, 정말 이상하다. 밖에서도 그랬지만, 안에 들어가서 보니 그런 책이 있을 것 같은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거든? 그런데 주인 아저씨한테 토지 14권 있느냐고 물었더니, 금방 내주던데? 뒤편 진열장에 토지가 몇 권 꽂혔는데, 어떻게 14권이 딱 있더라고." 이것도 '인연'인가요. '토지'의 정서와는 가장 거리가 멀게 느껴지는 화려한 동네 압구정동에서, 며칠 동안 품에 안지 못해 애태웠던 이 책을, 토지 1권도 2권도 아니고 14권을, 만날 수 있었다니 말입니다. 저는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밤을 새워 이 책을 다 읽어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져 다음날 완결편인 16권까지, 두 권을 샀지요. 몇 년 뒤 압구정동을 다시 지나치다가, 문득 그 가게 생각이 나서 살펴봤던 기억이 있습니다. 근방에 더 이상 '책'이라는 간판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동네 책방들은 대부분 문을 닫았다고 하니, 그 가게가 아직까지 남아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조금 씁쓸했습니다. 저도 오래 전부터 인터넷 서점에서 책을 사 보기 시작했지만, 그 때 그 가게가 없어진 것을 보니, 무엇인가 '아날로그적'인 추억을 하나 잃은 것 같다는, 묘하게 허전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워낙 인물과 사건이 방대한 소설이라, 8년 전 기억이 어느새 가물가물해져 있었습니다. 처음 읽을 때는 주로 서희의 '복수극'에 관심을 가졌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다른 사람들의 삶에도 눈길이 많이 갔습니다. 윤씨 부인, 별당아씨, 귀녀, 함안댁, 강청댁, 월선이, 임이네, 금녀, 봉순이(기화), 봉순이의 딸 양현, 임명희, 유인실...... 셀 수 없이 많은 여인네들의 삶이 가슴에 와 닿더군요. 8년 전 미혼이었던 제가, 지금은 두 아이의 엄마가 돼 있으니, 읽는 느낌이 다른 것도 당연한지 모르겠습니다. 책을 다시 읽고 나니, 드라마와 소설이 다른 부분을 자꾸 눈여겨보게 됩니다. 드라마에서는 책에서 생략된 부분을 상세하게 묘사하기도 하고, 책에서 자세하게 나온 내용을 훌쩍 뛰어넘기도 합니다. 여러 차이가 있겠지만, 요즘 크게 눈에 띄는 것으로는 김평산의 아들 김두수와 최서희의 대결 양상을 들 수 있습니다. 소설에서는 서희와 김두수의 대결을 직접적으로 제시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드라마에서는 김두수가 간도에 간 서희를 해치려다 번번이 실패하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김두수는 간도로 가던 서희 일행을 사로잡지만 놓아주고, 이후 계속해서 서희를 노리지만, 서희에게 형편없이 당하기가 일쑵니다. 아마도 드라마는 여러 토막으로 나뉘어져 이어지다 보니, 매회 인물의 대립 관계를 선명히 부각시켜 재미를 더하려 한 것 같은데, 때로는 그 상황이 싱겁고 억지스럽다는 느낌도 있어 조금은 아쉽습니다. 하지만 저는 배우들의 실감 나는 연기에다 소설을 읽은 감흥까지 더해져, 슬픈 장면에서는 주책없이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드라마의 초반부, 식구들이 '나쁜 년'이 죽는데 왜 우느냐며 놀려대는데도, 귀녀의 죽음에 제 눈이 뻘개지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단순한 '악녀' 이상의 입체적인 인물을 창조해낸 배우의 연기가 뛰어나기도 했거니와, 훗날 귀녀의 아들 두메를 애지중지 키우고, 그의 장래를 위해 스스로 목숨까지 끊는 강포수의 처절한 사랑이 금세 연상됐기 때문이기도 했을 겁니다. 저는 아마 돌아오는 주말 저녁에도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을 겁니다. 토지의 등장인물이 너무 많아 헛갈리기 시작한다는 남편에게, 얘는 누구고, 쟤는 누구야, 얘가 쟤를 사모하는데, 그것 때문에 걔가 질투해, 어쩌고 하면서 책 읽은 티를 팍팍 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드라마가 끝나면 '역시 원작이 더 나아' 하면서 또다시 소설을 책장에서 꺼내들지도 모릅니다. '토지'는 읽으면 읽을수록 맛이 더욱 깊어지는 소설이니까요. 오랜만에 회사에서 야근하면서 글을 씁니다. 밤이 깊었네요. 곧 다시 뵙겠습니다. (쓰고 보니, 공교롭게도 '토지'가 SBS 드라마라는 데 생각이 미쳤습니다.
제가 다니는 회사 드라마를 홍보하려고 이 글을 쓴 것은 아니라는 점,
알아주시겠지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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