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뉴스

뉴스 > 국제

55. 알렉산더와 아킬레스 8

김문환

입력 : 2005.01.17 13:30

지중해 문명기 4권BR 도자기로 읽는 트로이 전쟁과 로마의 건국BR 글 싣는 순서 3장. 트로이 전쟁의 전개 1(아카이아 연합군) &nsp; 1. 헬레네 송환 협상 2,3,4,5,6,7. 아킬레스 1.성장,


-지중해 문명기 4권--

도자기로 읽는 트로이 전쟁과 로마의 건국

---글 싣는 순서--

3장. 트로이 전쟁의 전개 1(아카이아 연합군)

 

1. 헬레네 송환 협상

2,3,4,5,6,7. 아킬레스 1.성장, 2.참전,3.사랑,4.브리세이스,5.헥토르와 대결,6.죽음

8. 고대 그리스의 애정사

9. 파트로클로스

10,11,12,13. 올림픽 1,2,3,4

14. 大아이아스

15. 그리스, 직접 민주주의

16,17,18 민주주의를 이끈 사람들 1,2,3

19. 중우정치와 민주정치

20. 고대 민주주의와 현대민주주의

21. 미국 민주주의의 현실

22. 오디세우스

23. 디오메데스, 小아이아스

24,25 네오프톨레모스, 필록테테스

26, 27,28,29,30,31,32,33,34 알렉산더와 아킬레스 1,2,3,4,5,6,7,8,9--오늘 이야기

35. 테티스, 헤파이스토스, 아테나

 

33. 알렉산더와 아킬레스 8. 영화와 역사사이 2

 

◆ 1. 파로스 등대

     영화 [알렉산더] 첫 장면에서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알렉산드리아 만을 배경으로 얘기를 시작할 때 아름다운 해안선 뒤편 멀리 직사각형으로 솟은 탑같은 건물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국제 무역항이자 헬레니즘 문명권 최대도시로 자리매김한 알렉산드리아의 상징 파로스 등대를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나일강의 상징이 알렉산드리아라면 알렉산드리아의 상징은 파로스 등대로 평가해도 크게 모자라지 않을 만큼 알렉산드리아를 대표하는 백미(白眉)로 손색없다. 고대 헬레니즘 시대 7대 불가사의(不可思議, Wonders)의 하나로 외경의 대상이던 파로스 등대. 그러나 영화장면 배경으로 설정한 파로스 등대는 역사적 진실과 다르다. 파로스 등대가 알렉산드리아에 존재했던 역사적 실체인 것은 맞는데 무엇이 진실과 다르다는 것인가?

 

     파로스(Pharos)는 천혜의 항구 알렉산드리아의 서쪽편에 자리잡은 작은 섬이었다. 지금은 육지와 연결돼 있지만, 당시에는 1km 가량 육지에서 떨어져 있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파로스섬에 지중해 무역의 주인공 선박들이 안전하게 다닐 수 있도록 거대한 등대를 만들었다. 그 규모는? 참으로 컸다.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는 않지만 학자들은 높이가 130여m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카이로 근교 기자의 피라미드군에서 가장 높은 145m의 쿠프왕 피라미드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대단한 규모다. 고대 모자이크나 근처에 남은 헬레니즘 시대 등대의 다른 실물을 근거로 볼 때 요즘의 마천루(摩天樓)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래는 정사각형이나 정 오각형 또는 정육각형의 형태를 띠고, 위로 올라가면서 층계를 이루듯 점점 크기와 면적이 줄어드는 형식. 맨 꼭대기 가장 좁은 부분에는 불을 피워 불빛을 내는 장소로 활용했다.

 

아름다운 해안. 지중해의 해안지방은 대부분 높은 산이 우뚝 솟아 있는 곳이 많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 부근은 산이 없다. 낮은 저지대다. 밀가루처럼 흰 모래가 펼쳐지고 해안은 흰 모래에 비쳐 투명하고 아름다운 하늘색을 띤다. 그러니 먼 바다에서 배를 타고 지날 때 어디가 육지인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등대의 필요성은 여기서 생긴다. ⓒ김문환

 

     항해술이나 항법장치등의 위치정보가 요즘 같지 않던 당시 국제무역항이 갖춰야 할 필수조건은 무엇이었을까? 무엇보다 큰배가 접안 할 수 있도록 충분히 깊은 바다와 파도에 안전한 천혜의 방파제가 있으면 좋다. 덧붙여 멀리서도 잘 보여야 한다. 항해사들이 위치를 놓치지 않고 쉽게 찾아 올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주변에 높은 산이 있으면 금상첨화(錦上添花)다. 그리스인들이 개척한 도시 나폴리(네아 폴리스)는 베수비오산이 높게 솟아 멀리서도 잘 보인다. 알렉산드리아는 아쉽지만 이런 자연지형의 혜택을 입지 못했다. 알렉산드리아 근처는 지대가 낮다. 특징 될 만한 산이 없고 낮은 저지대가 펼쳐져 흐린 날이면 바다와 육지를 잘 분간하기 어려워 알렉산드리아를 스쳐지나기 십상이다.

 

     나일강의 내륙과 연결되고, 깊은 물과 천연 방파제등 접안하기 좋은 항구 자체의 입지는 뛰어나지만 멀리서 찾기 어려운 단점을 보완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물이 바로 파로스 등대다. 알렉산드리아와 파로스 등대는 서로의 가치를 극대화할 수 있는 환상적인 만남이었다. 알렉산드리아는 파로스 등대가 있으면서 비로소 확고한 항구로서의 명성을 갖게 됐고, 파로스는 그런 만큼 알렉산드리아에서 중요하면서도 가장 상징적인 시설이 될 수 있었다. 파로스 등대에서 불을 피우면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무려 최대 90km 밖에서도 항구의 위치를 알 수 있었다고 한다. 또 낮에는 거대한 거울로 햇빛을 반사시켜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고도 하는데...

 

     파로스 등대는 아주 오랫동안 그 기능을 수행했다. B.C 3c 고대 헬레니즘에서 로마와 비잔틴(동로마) 제국을 거쳐 를 거쳐 641년 아랍세계로 넘어간 뒤에도 쉬지 않고, 지중해를 밝혔다. 물론 세월이 지나면서 그 위상은 줄어들었다. 전성기인 헬레니즘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무너진 뒤, 로마시대로 넘어가면서 알렉산드리아는 정치적, 문화적으로 쇠락했다. 서로마 제국 말기 혼란기와 비잔틴 제국 때는 중심지가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지면서 위상 축소 현상이 더욱 심화됐다. 그나마 로마, 비잔틴제국에 곡물을 공급하는 주요 창구로 경제적인 위상은 유지한 탓에 항구와 등대의 필요성은 살아 남았다. 그러나, 641년 북아프리카와 이집트가 신흥 이슬람 세력에 넘어가면서 유럽과의 연결고리가 끊어져 알렉산드리아는 기억의 저편으로 묻히고 말았다. 지중해 전체 무역항에서 이슬람권의 항구도시로 전락했다. 파로스 등대의 활용도나 위상 역시 크게 줄어들 수 밖에 없었다. 항구의 파로스 등대 역시 훼손되거나 일부 붕괴돼 원래 모습을 잃어 갔다.

 

     중세가 정점에 있던 1166년. 파로스 등대를 찾은 스페인 남부 말라가(당시 스페인 남부는 이슬람 세력이 장악) 출신의 이슬람 교도 바다위 엘 안달루시는 마치 모스크의 미나렛 처럼 개조된 파로스 등대의 모습을 기록에 남긴다. 물론 일본으로 가던 장사꾼 하멜이 조선에 조난당했다가 귀국해 표류기를 쓰면서 삽화에 악어를 그려 넣은 것 같은 불확실한 기록일 수도 있지만, 개축과정에서 등대의 모양이 일부 바뀌었을 가능성이 높다. 중세까지도 개축과정을 거치며 나름대로 역할을 수행하던 파로스 등대의 운명이 다한 것은 14c 경으로 추정된다. 학자들은 1303년이나 1323년 알렉산드리아를 강타한 지진 이후가 그렇게 됐을 것으로 본다.

 

파로스 등대터. 15c 마물루크 왕조 시대 만든 요새가 자리한다. 주변에서 낙시를 즐기거나 관광온 이집트인들로 북적인다. ⓒ김문환

     이슬람 문명권의 위대한 지리 탐험가로 알려진 이븐 바투타의 기록이 이를 뒷받침 한다. 1326년 이곳을 찾은 그는 등대를 많이 무너진 상태로 묘사한다. 그런 가운데서도 직사각형 건물이 일부 남아 있었고, 내부에는 여러개의 방들이 자리 했다고 적는다. 관리인도 있었다고 하니 등대로서의 구실이 지속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23년 뒤 1349년 다시 들렀을 때는 거의 주저 내려앉아 내부로 들어갈 수 없었다고 한다. 등대로서의 수명이 다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1375년 다시 한번 지진이 알렉산드리아 지방을 강타하면서 완전히 무너져 내려 잔해만 쌓인 채 폐허가 됐다.

 

     천년 이상 사용되면서 여러 차례 지진 피해를 입었겠지만, 필요성이 클 때와 달리 필요성이 적어지면 개축하지 않고 방치하는 게 세상물정이다. 100년 넘게 용도폐기, 방치되던 등대는 15c 이집트를 지배하던 터키 용병 출신의 마물루크 왕조 때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다. 술탄 카이트 베이가 등대의 용도를 바꿔 적과 대치할 때 사용할 해양요새 건축을 지시했다. 등대 페허를 걷어낸 석재들을 재활용해 그 자리에 해양요새를 지었다. 오늘날 알렉산드리아를 찾으면 육지와 붙어버린 파로스 섬 끝자락 등대터에 거대한 해양 요새와 마주한다. 지금은 해양 요새로서의 역할도 끝나고 군사 박물관으로 다시 옷을 갈아 있었지만...

 

     최근 해저 고고학이 발달하면서 유적과 유물의 발굴이 바다속으로 까지 확대되고 있다. 파로스 등대터로 추정되는 바다속도 탐사가 이뤄져 거대한 이시스 여신상을 비롯해 많은 건물 잔해와 상형문자가 새겨진 유물이 물 밖으로 나왔다. 신비의 베일에 가려 아직도 속시원히 전모가 밝혀지지 않고 있는 파로스 등대의 비밀이 벗겨질 수 있을지... 이제 글의 시작에서 던진 문제의 답을 내야 겠다. 왜 천년이상 버틴 파로스 등대가 영화 [알렉산더]에서 진실이 아닌지의 대답. 파로스 등대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최고의 번영을 누리던 B.C 250년경 프톨레마이오스 2세때 건축 됐다. 그런데 영화에 나오는 해설자는 프톨레마이오스 1세다. 알렉산더와 함께 정복전쟁을 벌였던 역전의 용장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등대가 나오기 훨씬 전인 B.C 283년 이집트 파라오의 전통대로 지하세계의 왕이 돼 떠났다.

 

◆ 2. 세계 7대 불가사의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 등대를 살펴봤다. 파로스 등대를 [7대 불가사의]의 하나라고 소개했는데, 참고로 고대 7대 불가사의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일상에서 흔히 [세계 7개 불가사의]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고, 심지어 입사시험 상식문제로도 심심찮게 나온다. 그렇다면 도대체 [7대 불가사의]는 무엇을 가리키는 것이며 언제부터 누가 이 말을 사용했는가? 현대의 저명한 고고학자 가운데 한명이 지어낸 용어일까? 일반적인 생각과 달리 참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헬레니즘 시대. B.C 225년 비잔티움 출신의 필론이라는 그리스인이 알렉산드리아에서 썼다는 책자 '7대 불가사의에 대하여(On the Seven Wonders)'라는 글에서 처음 언급된다. 필론이 쓴 책의 원본이 현재 전하는 것은 아니고, 이 책자를 9c 비잔틴 제국 시절 그리스어로 정리해 놓은 책자가 현재 독일 하이델베르가 대학 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말이 책자이지 그냥 7가지 불가사의를 간략히 소개하는 글이다.

 

피라미드. 7대 불가사의의 가장 대표적인 유적이면서 가장 오래된 인류문명의 금자탑이다. ⓒ김문환

     그렇다면 필론이 처음 [7대 불가사의]라는 말을 만들어낸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그가 독창적으로 만들어 낸 말은 아니고 인구에 널리 회자(膾炙)되던 것을 정리했을 뿐이다. 하이델베르그 대학에 소장된 9c 그리스어 기록을 H. 존스톤이 영어로 번역해 냈다. 이내용을 영국 왕립 예술원 출신의 고대학자 죤 로머와 부인 엘리자베스 로머가 공동으로 저술해 영어로 펴낸 책 [세계의 7대 불가사의](THE SEVEN WONDERS OF THE WORLD) 서문과 부록에 인용하고 있다. 영어로 옮겨진 필론의 글을 한글로 정리해 봤다.

 

     "모든 사람들이 들어 알고 있는 세계 7대 불가사의. 그러나, 7가지 모두를 직접 본 사람은 거의 없다. 이들을 보려면 로도스로, 이오니아의 에페스로 또 카리아의 할리카르나소스, 페르시아, 유프라테스강, 이집트등으로 가야한다. 모든 것을 다 보겠다는 욕심이 충족될 시점은 여행에 여행을 거듭해 지쳐버릴 때 다시 말해 생명이 다해 죽음에 다다를 때일 것이다... " 이렇게 시작되는 그의 글을 근거로 추정하면 7대 불가사의는 필론이 정한 게 아니라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필론이 살던 훨씬 전부터 전해 내려오던 것임을 눈치챌 수 있다. 필론이 글을 쓰던 B.C 3c 헬레니즘 세계에 [7대 불가사의]라는 말이 호기심 속에 널리 퍼졌고, 누구나 그것을 보고 싶어 하지만 실제 가기 어려웠던 것이다. 필론은 그런 독자들을 위해 글을 쓴 것으로 보인다.

 

     필론이 꼽은 7가지 불가사의는 무엇인가? 헬레니즘 시기 학문과 출판 활동이 활발하게 펼쳐지던 장소는 알렉산드리아다. 오늘날 미국이 많은 학자들과 학생들, 연구자들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듯이 알렉산드리아에는 헬레니즘 문명권은 물론 그 이외 지역에서도 지식과 정보를 구하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필론 역시 비잔티움(콘스탄티노플) 출신이지지만, 알렉산드리아에서 이 책을 썼다. 재미있는 것은 필론의 저술에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 등대가 빠져 있다는 점이다. 알렉산드리아에 살면서도... 필론의 시절 까지는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 등대가 [7대 불가사의] 명단에는 끼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할리카르나소스 영묘인 마우솔레움이 있던 자리. 오늘날 살기좋고 관광객으로 넘쳐나는 터키 남부의 관광 휴양도시 보드룸에 자리한다. 오늘날은 폐허로 변해 있고, 잔해는 영국 브리티시 뮤지엄에 전시중이다. ⓒ김문환

     B.C 6c 아테네의 개혁가 솔론의 경우 처럼 아르카이크기 그리스 사람들은 오리엔트 여행을 큰 업적으로 여겼다. 장사를 겸해 다니기도 했지만, 오랜 역사의 고도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문명기 각 도시를 둘러보는 것이 오늘날 선진국 유학과 같은 개념이었다. 찬란한 문명이 명멸했던 이 지역을 돌면서 아르카이크기 암흑기에 살던 그리스인들은 문화적으로 자신들이 무척 왜소하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그들은 테라(산토리니)나 크레타 섬의 미노아 문명이나 미케네의 미케네 문명에 대해서도 아직 유적지 발굴전이므로 제대로 알지 못하던 터였다.

 

     메마른 대지 위에서 신전 지붕에 풀잎 엮어 올리던 그리스인들. 그들이 바빌론이나 이집트의 멤피스를 돌며 접한 거대한 석조 건축물은 실로 경이 그 자체였다. 그러니, '불가사의' 라는 말을 만들어 낸 것이다. 오늘날 강원도 깊은 산골에 계시는 할아버지가 강남의 타워 팰리스 근처 고층 아파트 촌을 처음 봤다고 생각해 보자. 글자 그대로 경이, 불가사의. 그리스인들에게 피라미드나 바빌론의 거대한 성벽이 바로 그랬다. 여행이나 장사를 마치고 돌아온 그리스인들은 실제 본 것에 살을 붙여 이야기를 확대했고, TV도 신문도 없던 시절 많은 그리스 사람들은 신비한 건축물들의 이름만 입에서 입을 통해 가슴속 깊이 새겼다.

 

아르테미스 신전. 에페스의 신시가지 셀죽에 자리한다. 모든게 무너진 폐허에 가깝다. 가운데 기둥하나만 덩그렇게 놓여진 모습에서 불가사의를 떠올려 보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김문환

     B.C 3c가 되면 상황이 바뀐다. 그리스 민족이 주변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지중해와 오리엔트에 걸쳐 거대한 제국을 형성 한 뒤다. 자신들도 무엇인가 업적을 남길 만한 경제적, 문화적, 기술적 역량을 쌓아 둔 때였다. 이제 그리스민족 스스로도 큰 건축물을 남길 수 있게 됐다. 그런 관점에서 그리스인들은 나름대로 이런 저런 불가사의를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연법칙처럼 정해진 7가지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 게 분명하다. 요즘도 현대의 7대 발명품이나, 불가사의가 무엇이냐고 논할 때 나라마다 같은 나라라도 집계기관마다 제각각인 점과 마찬가지다. 이런 상황에서 그래도 공식적으로 남은 기록, 필론의 목록에 의존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숙명이다. 당시 그리스인들 사이에 퍼져 있던 7대 불가사의라고 정의하고 넘어갈 수 밖에 없다. 필론이 기록한 순서대로 적으면 다음과 같다.

 

1. 바빌론의 공중 정원(空中庭園, Hanging Garden)--신바빌로니아 왕국의 네브카드네사르 2세가 당시 세계 최고의 도시 바빌론에 왕비를 위해 만든 정원. 네브카드네사르 2세의 치세기인 B.C 604년에서 B.C 562년 사이 만들어졌다.

 

2. 멤피스의 피라미드군(群)(The Pyramids)--이집트에 있는 피라미드들. 기자의 피라미드군(群)과 사카라, 멤피스의 피라미드들은 B.C 2천 7백여년 전부터 만들었다. 피라미드가 만들어진 시점에서 필론이 책을 쓸 때까지 경과한 기간 2천 5백년은 필론이 책을 쓸 때부터 지금까지의 기간 2천 2백년보다 3백년이나 더 길다. 지금 필론의 헬레니즘을 생각해도 아득한데...

 

3. 올림피아의 제우스상(像)(Olympian Zeus)--B.C 435년 아테네 페리클레스의 친구이자 그리스의 유명 조각가 페이디아스가 올림픽이 열리던 올림피아에 만든 제우스의 동상.

 

4. 로도스섬의 헬리오스 거상(巨像, The Colossus at Rhodes)--B.C 280년 로도스의 수호신 헬리오스를 기려 만든 동상이다. 흔히 크로이소스 거상이라고 부르는 데, 이는 오류로 보인다. 영어 '콜로수스(Colossus)'는 거상(커다란 동상)을 가리키는 일반명사인 동시에 로도스섬의 헬리오스 거상 자체를 가리키는 고유명사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콜로수스를 '크로이소스'로 읽으면서 다시 '거상'이란 말을 붙였으니, 우리말 '역전(驛前)앞' 처럼 '거상'이라는 말이 두번 반복된다고 볼 수 있다.

 

5. 바빌론의 성벽(The Walls of Babylon)--둘레 41km의 성벽. B.C 6c 네부카드네사르 2세 치세기에 전체를 완공했다.

 

6. 에페스의 아르테미스 신전(The Temple of Artemis at Ephesus)--B.C 6c 만들었다가 B.C 356년 화재로 소실 된 것을 재건했다. B.C 334년 알렉산더가 페르시아 정벌을 위해 헬레스폰트 해협을 건너 페르시아 땅에서 처음 치른 그라니쿠스강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남진하던 중 들렀을 때 한창 재건중이었다. 이후 완공됐다.

 

로도스 섬의 헬리오스 거상 자리. 사슴상이 자리한다. 양쪽으로 방파제가 자리하고 그 사이 항구로 배가 들어온다. 배가 들어오는 양 옆에 사슴상이 보인다. 원래 헬리오스신이 양 다리를 벌리고 선 자리에 각각 사슴상을 설치한 것이다. 그러니까 고대 로도스 항구로 들어오던 배들은 헬리오스신의 가랑이 사이로 들어온 셈이다. ⓒ김문환

     하이델베르그 대학 도서관에 전하는 필론의 저작 9c 본은 이것이 전부다. 7번째 불가사의(不可思議)를 설명한 부분이 훼손, 누락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7번째 유적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추측해 볼 수 있다. 필론은 머리말에서 카리아의 할리카르나소스를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할리카르나소스의 마우솔레움(Mausoleum)이 틀림없다. 페르시아 영향력 아래 있던 할리카르나소스(오늘날 터키 남부)의 사트라프(Satrap, 총독)였던 마우솔로스의 묘소(墓所)를 가리킨다. 그가 죽은 B.C 351년 이전에 착공했지만, 아내 아르테미시아가 죽은 B.C 350년 이후까지 공사가 진행됐다는 기록이 있어 B.C 340년대 중에 완공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오늘날은 필론의 구분과 달리 흔히 바빌론 성벽 대신 파로스 등대를 넣는데... 바빌론 성벽을 압도하는 중국의 만리장성이 있으니 바빌론 성벽의 위상이 줄어들 수 밖에. 그건 그렇고. 왜 필론은 파로스 등대를 7대 불가사의 목록에 넣지 않았을까? 필론이 적은 목록은 필론이 살던 시기보다 훨씬 전의 고대 작품이다. 가장 최근 즉 B.C 280년에 만들어진 로도스섬의 헬리오스 거상(Colossus)만 해도 60여년 전이다. 필론이 태어나기 전의 작품이다. 그러나, 파로스 등대는 B.C 250년 경 만들어졌으니, 필론이 살던 당대의 작품. 따라서, 규모는 더 컸더라도 당대 자신들의 기술로 만들어진 작품을 고대의 불가사의한 명작들과 하나의 범주에 묶기는 어려웠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쉽게 한국의 고전 건축 명작 7선을 뽑는데, 사라진 황룡사 9층탑에 백제의 미륵사지 석탑, 불국사 다보탑, 석굴암, 법주사 팔상전, 부석사 무량수전... 여기에 비록 한참 건너 뛰지만, 흥선대원군이 19c 말 중건한 경복궁을 넣는다면 그래도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그러나, 경복궁 대신 여의도 63빌딩을 포함시킨다면 아닌 밤중에 홍두깨가 되고 말 것이다. 특이한 점은 알렉산더가 생전 펠라를 버리고 제국의 수도로 삼은 바빌론에서 2군데의 불가사의를 선정했다는 점이다. 그만큼 바빌론의 위용과 역사성을 증명한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