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 문명기 4권BR 도자기로 읽는 트로이 전쟁과 로마의 건국BR 글 싣는 순서 3장. 트로이 전쟁의 전개 1(아카이아 연합군) &nsp; 1. 헬레네 송환 협상 2,3,4,5,6,7. 아킬레스 1.성장,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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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 문명기 4권-- 도자기로
읽는
트로이 전쟁과 로마의 건국 ---글 싣는 순서-- 3장. 트로이 전쟁의 전개 1(아카이아 연합군)
1. 헬레네 송환 협상 2,3,4,5,6,7. 아킬레스 1.성장, 2.참전,3.사랑,4.브리세이스,5.헥토르와 대결,6.죽음 8. 고대 그리스의 애정사 9. 파트로클로스 10,11,12,13. 올림픽 1,2,3,4 14. 大아이아스 15. 그리스, 직접 민주주의
16,17,18 민주주의를 이끈 사람들 1,2,3 19. 중우정치와 민주정치 20. 고대 민주주의와 현대민주주의 21. 미국 민주주의의 현실 22. 오디세우스 23. 디오메데스, 小아이아스 24,25 네오프톨레모스, 필록테테스 26, 27,28,29,30,31,32,33. 알렉산더와 아킬레스 1,2,3,4,5,6,7,8--오늘 이야기 34. 테티스, 헤파이스토스, 아테나
32. 알렉산더와 아킬레스 7.
영화와 역사 사이
◆ 1. 프톨레마이오스 1세와 왕조 영화 알렉산더는 시작부터 이색적이다. 영화의 주인공이기에는 너무 나이가 들어 보이는 노인 한명 의 해설로 영사기가 돌아간다. 누구일까? 프톨레마이오스 장군. 아니 프톨레마이오스 1세다. 앞서 알렉산더 사후 제국을 분할한 장군 가운데 이집트를 차지한 인물이다. 후계자들의 제국 분할시 프톨레마이오스 장군은 이집트 충독이 돼, 이집트를 다스렸다. 총독이 되자마자 그는 알렉산더 생전 이집트 세금 징수 책임자로 알렉산더에 의해 임명됐던 클레오메네스를 먼저 제거했다. 이어, 차츰 세력을 키워 B.C 306년 이집트 왕을 칭하고 독립왕국을 선포했다. B.C 311년 수도를 멤피스에서 살기 좋고 교역과 물자 운반이 수월한 알렉산드리아로 옮기고, 그 곳에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프톨레마이오스가 마케도니아 귀족 라고스 집안 출신이어서 라고스 왕조라고도 부름)를 열었다. 클레오파트라. 로마 공화정 말기 카이사르와 사랑을 나눠 아들 카이사리온을 낳고, 이어 안토니우스와 결혼했던 그녀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왕이자 프톨레마이오스 장군의 직계 후손이다.
헬레니즘 문명을 만개시켰던 장본인으로 역사에 남는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알렉산더와 생사고락을 함께 한 죽마고우(竹馬故友)다. 알렉산더가 아버지 필리포스 2세 치하에서 왕위를 계승할 수 있을지 불투명할 때부터 알렉산더를 따르던 핵심 부하이자 친구다. 알렉산더가 시와 오아시스로 가서 신이라는 말을 들을 때도 동행한 절친한 측근이었다. 영화에서 톨레미라는 영어식 이름으로 등장하는 그가 박트리아와 간다라의 눈덮인 고봉준령을 넘어 인도로 가면서 알렉산더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그는 알렉산더에게 "아내도 원하니 기후좋은 이집트에 정착하고 싶다"고 말한다. 소설로 치면 복선(伏線)이다. 그가 궁극적으로 이집트에 정착하게 될 것임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지구상에서 가장 큰 도서관(무세이온)을 세워 학문을 진작시켰으니, 고대 사회 문화의 등대지기 같았다. 영화에서 인생의 황혼을 맞은 늙고 땅딸막한 왕으로 나온 프톨레마이오스 1세(장군)는 고대 이집트 복장을 한 서기들에게 알렉산더와 그 원정에 대한 얘기를 들려주며 기록을 남기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배역이 조금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 이유는 루브르 박물관에 남아있는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대리석 두상(頭像) 때문이다. 말그대로 조각처럼 잘 빚어진 생김새와 의연한 자태를 보여준다. 체격이 건장했을 호남 스타일인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이집트에 성공적으로 정착하는 지름길은 이집트화하는 것이었다. 마케도니아 출신의 그리스인이지만, 수천명의 지배계층만으로 국가를 움직일 수는 없는 법. 하부를 떠받치는 이집트인들의 지지와 경배를 끌어내야 한다. 그래서 프톨레마이오스 왕들은 마케도니아의 전통을 벗어나 이집트의 신이 됐다. 이집트에서는 고래로 왕인 파라오가 이집트 태양신 아몬과 여신 레아 사이의 아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신이 만물의 주인이시니(기독교나 다른 종교들도 마찬가지지만), 신의 아들이 지상에서 그 권한을 대리행사 하는 것은 당연한 일. 마케도니아에서 온 그리스인들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왕들을 신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대목이다. 프톨레마이오스 장군의 후손들은 그렇게 이집트에서 신으로 3백여년 가까이 군림할 수 있었다.
◆ 2. 알렉산드리아 [이집트는 나일강의 선물]. 그리스 시대 역사학자 헤로도토스가 이집트를 방문하고 남긴 말이다. 아프리카 내륙 깊숙한 이디오피아에서 시작해 밀림과 사막을 가로지르며 메마른 대지를 옥토로 바꾸느라 거친 숨을 몰아 쉬던 풍요의 나일강이 지중해라는 아름다운 바다와 평화롭게 만나는 지점이 바로 알렉산드리아다. 영화가 시작되는 첫 장면에 프톨레마이오스 1세를 배경으로 아름다운 해안이 펼쳐진다. 푸른 바다와 웅대한 석조 건물들. 헬레니즘 시대 지중해안 꿈의 도시 알렉산드리아를 그린 장면이다. B.C 331년 알렉산더가 이집트에 도착한 뒤 병사들에게 건설을 명령하는 것으로 알렉산드리아의 역사는 시작된다. 황무지에 새로 만든 것은 아니고 원래부터 있던 작은 마을들에 추가해 건축한 신도시다. 그리고 알렉산더가 각지로 원정을 다니면서 조성했다는 70개 알렉산드리아 가운데, 지금까지 그 이름을 간직하고 있는 유일한 도시다. 알렉산드리아는 이미 조성된 직후부터 그리스나 로마를 거치면서 여러 학자들에게 그 탁월한 입지로 많은 칭찬을 받았다.
알렉산드리아는 초기 알렉산더의 건설과 이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수도로서 그리고 로마시대를 거치면서 지속적으로 건축물이 추가됐다. 당시 만든 시설물 가운데 거대한 건축물은 모두 파괴되고 사라졌지만, 무덤이나 지하 저수시설, 수도시설의 일부와 극장 유적등이 남아있다. 도시 외부의 수원지에서 시가지 내로 물을 끌어오는 인공 수로(水路)도 마찬가지다. 19c 발굴을 통해 알렉산드리아는 길이 수백m에 폭 7-14m의 도로가 바둑판 처럼 정교하게 설치된 도시였음이 밝혀졌다. 가장 큰 도로는 수km에 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거대한 궁전과 도서관등의 대형 건축물, 그리고 세게 각지에서 교역을 위해 찾아온 상인들(중국인도 포함)로 북적인 국제 도시 알렉산드리아는 로마가 등장하기 전까지 번영을 구가하는 최고의 도시였다.
알렉산드리아의 영(靈)적인 최고 명물은 역시 알렉산더의 무덤. B.C 321년 바빌론에서 기병대장 페르디카스의 명령으로 고향 마케도니아로 향하던 알렉산더의 미이라가 담긴 거대한 석관. 64마리의 노새가 끌던 영구마차(靈柩馬車)는 이집트 총독 프톨레마이오스 장군에 의해 강탈 당한다. 그는 알렉산더의 미이라를 멤피스로 옮겼다가 수도로 삼은 알렉산드리아에 제마(Sema, 알렉산더의 묘소)를 만들고 여기에 안치했다. 이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왕들은 자신의 무덤을 알렉산더 무덤 근처에 마련했다. 헬레니즘 세계의 영원한 신화 알렉산더를 기리고, 그 옆에 자신도 거처를 정하니 죽어서도 그 이름은 영원하리라. 그러나 인간사에 영원이 쉬운 일인가? 로마 시대 들어서도 유지되던 알렉산드리아의 무덤은 3c말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재위시절 혼란기에 파괴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지진으로 피해를 입고...
견고한 성 알렉산드리아는 여러번 외세의 침략에 시달렸다. 초기 마케도니아에서 안티고노스 장군이 쳐들어왔고, 이후 B.C 219년 스파르타왕 클레오메네스, B.C 2c 들어서는 시리아 셀레우코스의 침략을 받지만,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B.C 3c 전성기를 구가하며 동지중해의 패자로 군림했다. 그러나, B.C 222년 즉위한 프톨레마이오스 4세 이후 차츰 세를 잃었다. B.C 2c 들어 지중해의 패권은 카르타고를 물리친 로마로 넘어갔다. B.C 2c 내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복잡한 왕실내 결혼과 여기서 빚어진 부모형제간의 지긋지긋한 왕위다툼과 골육상쟁(骨肉相爭)의 근친 살인극에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다. 그렇게 스스로 국력을 소모시키면서 국가는 분열됐다. 왕실이 갈려 로마나 시리아의 간섭을 받으며 반 식민 상태에서 궁궐이 불타기도 했다. 마침내 카이사르의 침공 때 시가지와 무세이온이 불타는등 큰 피해를 입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클레오파트라가 B.C 30년 옥타비아누스에게 패하면서 무너지고, 알렉산드리아도 영광스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수도로서 역할에 종지부를 찍었다.
◆ 3. 카노푸스 알렉산드리아 교외에는 카노푸스와 헤라클리온 이라는 교외도시가 있었다. 카노푸스는 알렉산드리아에서 20여km, 그러니까 한 50리 떨어져 있던 도시였다. 오늘날 알렉산드리아시 교외에 있는 아부키르만(灣) 해안 언저리다. 헬레니즘 시대 알렉산드리아에서 이곳까지는 운하로 연결돼 있었다. 잠깐 다녀오기 좋은 거리요 배로 움직이기 좋았다. 이곳은 알렉산드리아에서 찾기 어려운 환락과 향락이 만개했다. 운하에는 향락의 배들로, 운하 주변은 향락의 업소로 가득했다고 한다. 로마제국으로 치면 폼페이였다고 할까? 유흥업소가 넘쳐나고 성의 해방구 비슷한 곳.
카노푸스는 트로이 전쟁과 관련된다. 스파르타 왕 메넬라오스가 트로이전쟁을 마치고 헬레네를 찾아 스파르타로 돌아가던 도중에 난파당해 이집트 땅에 표류하는데, 그 장소가 바로 카노푸스였다는 것이다. 카노푸스라는 도시 이름은 당시 메넬라오스가 탄 배를 조종하던 항해사의 이름이었다. 메넬라오스와 카노푸스 신화는 훗날 역사학자들의 기록에도 인용돼 마치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포장됐다. 진실여부는 물론 확인하기 어렵다. 헤라클리온 역시 헤라클레스가 나일강 홍수를 잠재운 그리스 신화의 고장이다. 이집트 사람들이 헤라클레스에게 감사의 표시로 헤라클리온이라고 불렀다는데... 그리스신화와 이집트를 연계시킨 이유는? 그리스인들의 이집트 지배를 합리화 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것이다. 일제시대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처럼.
카노푸스가 있던 아부키르 만은 현대사를 여는 18c 말 역사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한다. 알렉산더를 모방하려 했던 프랑스의 정복자, 나폴레옹의 발자취와 함께.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한 뒤 유럽 각국의 왕정은 프랑스 혁명이 자국으로 번져 왕정이 종식되고 공화정이 들어서는 것을 막기 위해 반 혁명군을 프랑스에 보냈다. 그러나, 프랑스에는 지중해 코르시카 출신의 나폴레옹이라는 작달막하지만, 탁월한 군인이 있었다. 신출귀몰한 전략으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프랑스로 쳐들어온 외국의 반혁명군을 물리치고, 외국으로 까지 국경을 넘어 프랑스 혁명의 이념을 유럽 각국에 전파했다. 자신의 위세를 서서히 높여 가던 나폴레옹은 5만명의 병력을 이끌고 1798년 당시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장악하고 있던 이집트로 향했다. 카이로를 순조롭게 접수하는가 했지만, 프랑스의 세력팽창을 두고 볼 수 없던 영국과 일전이 불가피했다. 영국에는 넬슨이라는 해전의 명수가 있었다. 1798년 7월 아부키르 만에서 프랑스 군은 영국군에게 패한다. 나폴레옹은 패배뒤 부대를 남기고 홀로 귀국하는데, 전투에서 패배와 달리 나폴레옹 원정대는 뜻밖에 인류역사에 큰 선물을 하나 던져준다.
나폴레옹이
떠난 뒤에도 남아있던 프랑스 부대가 이듬해 1799년. 아부키르 동쪽
40여km 지점의 로제타 해안에서 높이 1.2m, 너비 75cm의 비석 하나를
주워 올렸다. 그냥 스쳐지나도 괜찮은데, 부대 지휘관이 영민했다. 표면에
희미하게 새겨진 예사롭지 않은 글자의 신비한 힘에 이끌려 이돌을 귀히
거둬 들였다. 이집트 고대사의 비밀을 밝혀 줄 단서 '로제타 스톤'이었다.
이 비석은 B.C 196년 만들어진 프톨레마이오스 5세의 송덕비(頌德碑)였다.
프랑스군은 그러나, 이돌의 가치를 알아보기도 전인 1801년 영국군에게
빼앗기고 만다. 현재 런던 브리티시 뮤지엄에 보관중인 로제타 스톤.
비문을 해석한 사람은 결자해지(結者解之)라. 역시 프랑스인이었다.
1822년 프랑스인 샹뽈리옹이 비문을 풀면서 그동안 그림이던 이집트
상형문자가 뜻을 가진 글자로 다시 태어났다. 이집트 역사를 현대에
복원한 계기가 된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 그 원정에서 나폴레옹에게
패배를 안겨 준 전투가 바로 고대 헬레니즘 시대 환락의 도시 카노푸스가
자리하던 아부키르만 앞바다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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