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게, 낮게, 느리게. 이런 문패를 내걸고, 더 크고, 더 높고, 더 빠른 것을 추구하는 요즘 세태와는 거꾸로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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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게, 낮게, 느리게.
이런 '문패'를 내걸고, '더 크고, 더 높고, 더 빠른 것'을 추구하는 요즘 세태와는 거꾸로 가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시와 노래의 만남을 통해 삶과 예술의 아름다움을 전하는 시노래 모임 '나팔꽃' 동인들입니다. 시 같은 노래, 노래 같은 시를 쓰고 부르자는 사람들이죠.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죠. "옛날에는 시와 노래가 '한 몸'이었습니다. 시는 노래의 마음이요, 노래는 시의 몸이었죠. 그런데 요즘은 따로따로 놀거든요. 그래서 시도 사람들의 외면을 받고, 노래도 깊이가 없어졌어요. '나팔꽃'은 시와 노래의 만남을 통해서, 시가 시집 밖으로 걸어나오게 하고, 노래에 깊이와 넓이를 더하려는 일종의 문화운동이죠." 꾸준히 모임을 갖고 교류하던 시인과 음악인들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낼 수 있는 공연을 열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나팔꽃'의 첫 공연은 모임이 만들어진 해의 9월에 열렸습니다. 당시 공연의 주제가 바로 '작게 낮게 느리게'였고, 이것이 지금까지 이 모임의 모토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이후 '나팔꽃'은 시와 노래가 만나는 서정적인 공연을 200여 차례나 열었습니다. 정기 공연 외에도 '찾아가는 나팔꽃 콘서트'와 시노래 교실, 캠프 등으로 전국을 돌면서 시노래 운동 확산에 힘썼습니다. 화려하고 요란한 볼거리도, 이렇다할 홍보도 없는 소박한 무대였지만, 이들의 뜻에 공감하는 사람들은 적지 않았습니다. 양희은, 장사익 같은 동료 가수들이 이들의 뜻에 공감해 기꺼이 함께 무대에 서곤 했습니다. '나팔꽃'의 열렬한 팬이었고 우정출연도 마다하지 않던 연극배우 윤석화가 나섰습니다. 그는 '나팔꽃'의 공연은 '내 안에 맑은 샘물 같은 것이 있고, 따뜻한 기운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올해부터 자신이 운영하는 대학로 소극장 '정미소'를 '나팔꽃'의 정기 공연장으로 선뜻 내줬습니다. 덕분에 '나팔꽃'은 지난 3월과 6월, 두 차례의 정기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
이번 무대의 주인 격인 백창우는 '노래하는 음유시인'이었습니다. 그는 시집 네 권을 발간한 시인이며, 인기 대중가요를 여러 곡 썼을 뿐 아니라, 민중가요와 동요 작곡가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이등병의 편지'를 작곡한 가수 김현성은 이 콘서트에서 백창우가 1984년 작사 작곡하고 임희숙이 불러 유명해진 '내 하나의 사람은 가고'를 열창했습니다. 저는 그저 옛날 노래로만 생각했는데, 다시 들으며 가사를 곱씹어보니 여운이 남는, '시 같은 노래'였습니다.. "너를 보내는 들판엔 마른 바람이 슬프고 내가 돌아선 하늘엔 살빛 낮달이 슬퍼라 오래도록 잊었던 눈물이 솟고 등이 휠 것 같은 삶의 무게여 가거라 사람아 세월을 따라 모두가 걸어가는 쓸쓸한 그 길로"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 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 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
'나팔꽃'의 노래를 직접 들어보고 싶으시다고요? 나팔꽃은 그동안 시와 노래가 함께 하는 북 CD를 '제비꽃 편지', '아무도 슬프지 않도록'을 펴냈지만, 아쉽게도 출판사가 문을 닫아 절판된 상태입니다. 하지만 곧 다른 회사에서 다시 찍어낸다고 하니 조금만 기다려 보세요. 북 CD 3집도 현재 제작 중이라고 합니다. 직접 콘서트장에 가 보시는 것도 좋겠지요. 가을 정기 공연은 9월에 열립니다. 인터넷 홈페이지(www.napal.co.kr)에서도 노래 몇 곡을 직접 들어볼 수 있습니다. 정신없이 바쁘게만 돌아가는 세상, 좋은 시 한 편 읽어본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제가 '나팔꽃' 모임을 취재하고 콘서트를 본 것은 기사를 쓰기 위해서였지만, 한편으로는 '제 눈을 맑게 하고 귀를 씻는' 계기도 됐습니다. 아침을 여는 꽃, 나팔꽃의 꽃말은 '기쁨'입니다. '나팔꽃' 모임은 '작고 낮고 느리지만' 깊은 울림으로, 현대인들이 잊고 사는 삶 속의 기쁨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이 글은 SBS 매거진 7월호에 실린 글의 원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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