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젠슨 황 엔비디아 CEO가 지난 10월 31일 포항경주공항에서 출국하고 있다.
미국이 8일(현지시간) 엔비디아 인공지능(AI) 칩 'H200'의 중국 수출을 허용하기로 결정한 것은 전 세계 반도체 업계와 AI 업계의 판도를 뒤흔들 것으로 예상됩니다.
엔비디아는 기존의 독주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겠지만, 미국의 거대 기술기업들은 연초 '딥시크' 충격의 트라우마를 다시 떠올리게 됐습니다.
중국은 자국 AI 산업 발전과 반도체 자립 사이를 저울질하며 대응을 고심할 것으로 전망됩니다.
빅테크, 중국 AI 추격에 긴장할 듯
미국의 이번 결정에 가장 촉각을 곤두세울 곳은 오픈AI와 구글, 메타 등 미국의 거대 기술기업들입니다.
이들은 그간 미국의 강력한 대중국 반도체 제재를 등에 업고 중국의 AI 경쟁사들과 격차를 안정적으로 벌려왔습니다.
미국 AI 기업이 여전히 중국 기업들보다 경쟁력이 높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지만, 중국 기업들이 엔비디아의 그래픽처리장치(GPU) H200을 확보하게 되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H200은 최신 아키텍처인 '블랙웰'을 장착한 B200보다 한 세대 전 모델이지만, AI 훈련과 추론에는 여전히 강력한 성능을 보입니다.
싱크탱크 '진보연구소'(IFP)의 알렉스 스탭은 AFP 통신에 이번 결정을 "엄청난 자살골"이라고 평가하며 H200이 기존에 수출이 허용된 H20보다 6배 더 강력하다고 지적했습니다.
올해 초 중국의 오픈소스 AI 모델 '딥시크'의 등장이 전 세계에 충격을 준 바와 같이, 중국은 이미 상당한 수준의 소프트웨어 역량을 입증했습니다.
알리바바와 바이두 등 중국의 AI 기업이 하드웨어 족쇄마저 풀고 엔비디아의 고성능 칩을 활용해 미국 기업을 위협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다리오 아모데이 앤트로픽 최고경영자(CEO)는 중국과 같은 권위주의 국가가 엔비디아의 최첨단 칩을 확보하면 더 빨리 AI 경쟁력을 확보할 것이라며 "이는 상식적인 이야기"라고 강조했습니다.
중국 정부의 막대한 보조금과 저렴한 전력 인프라가 고성능 H200 칩과 결합할 경우, 중국 AI 산업의 추격 속도가 더 빨라질 것이라는 위기감을 반영한 것으로 풀이됩니다.
▲ 다리오 아모데이 앤트로픽 최고경영자(CEO)
엔비디아는 '독주' 굳히기
세계 시가총액 1위 기업인 엔비디아에 이번 수출 규제 완화는 독주 체제를 완전히 굳힐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엔비디아는 지난달 19일 회계연도 3분기(8∼10월)에 사상 최대인 570억 1천만 달러(약 84조 원)의 매출을 발표하면서, 이어지는 4분기(11월∼내년 1월)에는 이보다 더 높은 650억 달러(약 95조 원)를 기록할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그러나 이 실적 전망은 중국 시장에 대한 매출을 반영하지 않은 수치였습니다.
뱅크오브아메리카 등은 AI 칩 시장에서 현재 엔비디아의 점유율은 80∼90%로, 사실상 독점 수준이라고 평가합니다.
여기에 H200을 통해 거대한 중국 시장 지배력도 회복하면, 엔비디아의 실적은 그야말로 '양자 도약'(퀀텀 점프)하며 AMD를 비롯한 경쟁사 추격도 멀찌감치 따돌릴 수 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엔비디아는 중국에 수출되는 칩 가격의 25%를 미국 정부에 납부해야 하지만, 엔비디아의 3분기 영업이익률이 60% 이상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여전히 30∼40%의 이익이 남는 셈입니다.
물론 이미 중국 수출이 허용된 H20과 마찬가지로 H200도 중국이 보안 위협 등을 거론하며 자국기업에 구매를 자제하라고 종용할 가능성도 없지는 않습니다.
젠슨 황 엔비디아 CEO도 H200 수출이 허용되면 중국에서 이를 받아들일지에 대한 질문에 "알 수 없다"고 답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 입장에서도 실리를 고려하면 H200을 받아들이는 쪽이 유리합니다.
중국 수출을 위해 일부러 성능을 낮춘 H20은 화웨이 등 자국 기업 반도체와 성능 차이가 그다지 크지 않았습니다.
H20이 중국 AI 칩보다 전력 효율이 좋았지만, 중국 정부는 자국 기업들에게 에너지 보조금을 지급해 H20의 장점을 상쇄했습니다.
반면 '진짜' 엔비디아 칩인 H200은 중국 반도체 기업이 아직 도달할 수 없는 수준이기 때문에 자국 AI 산업 발전을 꾀하는 중국이 마다하기가 어렵습니다.
트럼프 대통령도 이날 트루스소셜에 올린 글에서 H200의 중국 수출 허용 사실을 전하자 "시(진핑) 주석은 긍정적으로 반응했다"고 말했습니다.
크리스 맥과이어 외교관계협의회(CFR) 연구원은 로이터 통신에 "H200이 중국이 제조 가능한 모든 칩보다 우수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구매하지 않는 것은 자멸적"이라며 "중국은 거의 확실히 수용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H200의 중국 수출이 이뤄지면 그간 정부의 규제 아래에서 발전해온 화웨이와 캠브리콘 등 중국 반도체 기업들은 직격탄을 맞게 됩니다.
당장 텐센트나 바이트댄스와 같은 기업이 다시 엔비디아 생태계로 돌아설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입니다.
다만 중국 정부가 H200 수입을 허용하더라도, 자국 반도체 산업 보호를 위해 쿼터를 설정할 수도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HBM 수요 '폭발'로 한국엔 호재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고대역폭메모리(HBM)를 개발하는 양대 메모리 반도체 기업을 보유한 한국에는 호재로 평가됩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엔비디아의 최고사양 모델이었던 H200은 141GB 용량의 HBM3e(5세대 고대역폭 메모리)를 탑재한 이른바 '메모리 먹는 하마'입니다.
H200칩의 중국 수출길이 열리면 일각에서 공급 과잉 우려가 일었던 HBM도 안정적인 수요처를 확보하게 되는 셈입니다.
특히 수요 급증은 삼성전자의 엔비디아 HBM 공급망 진입에도 청신호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한국 기업이 생산한 HBM이 중국에 들어가게 되면 제재 대상 기업에서 사용되거나 군사용으로 전용되지 않는지 등에 대한 관리 책임이 부과되는 등 숙제도 남아 있습니다.
(사진=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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