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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깟 1조 달러 짜리 동전, 발행해 버려!" 그럴 수도 있는 미국, 그리고 한국

일주일 뒤면 미국이 부도날 수 있다니 대체 무슨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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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조 달러, 우리 돈으로 1천3백조 원짜리 동전을 찍어내자는 게 도대체 무슨 소리일까? 살짝 맛이 간(?) 사람의 횡설수설인가 싶지만, 그렇지 않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이자 대중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동시대 경제학자 중 한 명인 폴 크루그먼의 2013년 1월 8일자 뉴욕타임스 칼럼에 나오는 말이다.

"자, 그 1조 달러짜리 동전 얘기 말이에요 - 법적 허점을 이용해서 재무부한테 1조 달러짜리나 그보다 더 값나가는 동전을 발행하게 시켜 가지고 연준에 입금시키고 그 돈으로 밀려드는 청구서들을 처리함으로써 '부채상환' 위기를 넘기자는 얘기요- 이 계획에 진짜 관심이 크잖아요. …..(중략)….. 동전 발행 그거, 좀 꼼수긴 하죠. 그래서 뭐요? 경제적으로는 무해하잖아요. 경제적 재앙이 진행되는 걸 막으면서 정부를 벗겨먹을 수도 있죠. 물론 우리가 바라는 건 이 '동전 대책'이나 비슷한 전략이 있다는 걸 주지시켜서 이 부채한도 협상이 잘 끝나게 하는 거죠. 하지만 뜻대로 안 된다면, 그놈의 동전, 그냥 찍어내자고요."

이 칼럼을 이해하려면 요즘 뉴욕 증시를 연일 들었다 놨다 하고 있는 미국의 '부채한도 협상'이 도대체 무슨 일인지 이해해야 한다.
 

무슨 상황인데? - 미국 부도 D-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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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주 일본에서 G7 정상회의에 참석하고 나서 이후의 순방 일정을 모조리 취소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재닛 옐런 미국 재무장관이 "미국이 부도납니다" 하고 못 박은 6월 1일 이전에 '부채한도 협상'을 마무리 짓기 위해서다. 돌아간 직후, 우리 시간으로 지난 화요일(한국시간 23일) 오후 미국 '실세 국회'인 하원의 대표이자 야당 공화당 소속의 케빈 매카시 하원의장을 만났다.

이 문제를 놓고 대통령과 하원의장이 만난 것만 벌써 세 번째였다. 그러나 소득은 이번에도 없었다. 협상은 결렬됐다. 이후 백악관과 의회의 실무진들이 연일 접촉하고 있지만 '국가부도일 D-7'인 26일까지도 아직 협상 타결 소식은 들려오지 않고 있다.

뉴욕증시는 '오늘도 헛수고'였다는 뉴스가 나올 때마다 조금씩 주저앉고 있다. 달러 대비 한국 돈 원화의 가치도 야금야금 다시 떨어진다. 국제 신용평가회사 피치는 일단 미국의 국가 신용등급을 최상위 등급인 AAA로 유지했지만, 앞으로 문제가 생길 수도 있는 국가로 주시하고 있음을 뜻하는 '부정적 관찰대상'에 올려놓았다.

나라가 며칠 안에 부도날 수 있다는데 AAA는 유지하고 고작 '부정적 관찰대상'이라니, 미국이 아니고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지위다. 단, 이것은 미국이 미국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국가부도 가능성'에 대한 살벌한 경고가 어차피 '짜고 치는 고스톱'의 일환이라고 받아들이는 지난 100년 동안의 경험치가 전제돼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짜고 치는 고스톱'이 아니라 양치기 소년의 외침이라면? 모두 알고 있다시피, 양치기 소년의 양떼는 결국 늑대에게 모조리 잡아먹혔다…)
 

좀 더 설명하면 - 법을 또 바꿔야 하는데

미국에는 특이한 제도가 하나 있다. 정부가 낼 수 있는 빚의 액수를 아예 법으로 못 박아 놓은 것이다. (전 세계에 이런 제도를 가진 나라는 미국과 덴마크뿐이다.) 당장 짐작하게 되는 것처럼 아껴 쓰라고 이런 제도를 만들었다기보다는, 100년 전이었던 1차 세계대전 이후 오히려 정부의 재정운용을 좀더 자유롭게 해 주려고 만든 제도였다. 그전까지는 사사건건 의회 승인을 받아야 했던 정부 재정운용에 대해서 '상한선만 줄 테니 그 안에서는 재량껏 해'라는 의미로 만든 법적 장치였던 것이다. 정부의 씀씀이를 감시하는 제도로 성격이 변화한 것은 한참 이후의 일이다.

미국은 세금을 포함해서 벌어들이는 수입보다 늘 지출이 더 많은 나라다. 그것도 상상 이상으로 훨씬 더 많은 나라다. 특히 2008년 금융위기 이후로 미국 정부는 더더욱 많은 돈을 쓰기 시작했고, 지난 코로나 3년 동안에는 문자 그대로 물 쓰듯이 썼다. 40여 년 전인 1980년대 초반만 해도 미국 정부가 낼 수 있는 빚의 한도가 5천억 달러 정도에 불과(?)했는데, 지난 1월 기준으로 미국 정부의 빚은 31조 4천억 달러까지 불어났다.

최근 환율로 환산하면 우리 돈 4경 820조 원에 달하는 규모다. 짐작조차 가지 않는 액수다. 아래 그래프의 기울기 변화를 보면, 금융위기 이후, 특히 코로나 발생 이후 미국 정부가 얼마나 많은 돈을 얼마나 빠르게 빚지고 있는지 한눈에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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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에 못 박아 놓은 빚의 상한선이 있는데, 어떻게 이렇게 빚이 커질 수 있는 걸까. 사실 미국 정부는 법에 정해놓은 빚 규모를 지키려고 쓸 돈을 안 쓴 적은 없다고 봐야 한다. 그럼 어떻게 해 왔나. 법을 바꿔왔다. 정부가 기존 법에 정해진 액수만큼 빚을 지고 나면, 의회가 법을 바꿔서 그 액수의 한도를 올려주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20세기 중반 이후 109번 반복해 왔다. 정부의 '부채한도'를 상향시키거나 한도를 지켜야 하는 시한을 뒤로 미뤄주는 걸 사실상 해마다 반복해 왔다. 지금 상황에 앞서 마지막으로 부채 한도를 올려줬던 게 지난 2021년 12월이고, 그때 법에 고쳐 적은 부채 한도가 31조 4천억 달러(우리 돈 4경 820조 원)이었다. 그리고 미국의 빚은 그 한도에 지난 1월 또! 다다랐다.
 

한 걸음 더 - '야당의 시간'.. 진짜 부도나면?

이제 지난 100여 번에 걸쳐 해왔듯이 법을 고쳐 적을 차례다. 의회에서 미국 정부가 가질 수 있는 부채의 상한액을 올려주거나 상한을 지켜야 하는 시점을 뒤로 미뤄줘야 한다. 그런데 마침 그때 의회에서 야당의 힘이 강하다고 치자. '부채한도 협상'은 야당이 정부와 여당에 요구하는 바를 내세우며 실랑이를 하기 딱 좋은(?) 협상이다.

심지어 지금처럼 내년에 대선까지 앞두고 있는데 야당이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공화당이기까지 하면, 지지자들에게 정치철학과 노선을 다시 한번 각인시키며 민주당 정부의 실정(으로 공화당은 판단하는 각종 조치들)을 부각시키기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이럴 때 유독, 거의 해마다 반복되는 미국 정부의 부채한도 협상에서 갈등이 첨예해진다. 지금이 바로 그런 때다.

게다가 지금은 안 그래도 초유의 특수성까지 돌출돼 있는 시점이다. 정부와 연준이 풀어놓은 전대미문의 유동성이 수십 년 만에 나타난 인플레이션 공포의 원인 중 하나라는 논쟁이 오가고 있던 시점. 현재 하원에서 다수당을 차지하고 있는 야당 공화당으로서는 이런 시기에 부채 한도를 곱게(?) 올려주기 어렵다.

물론 야당 입장에서도 정말 법 개정을 못하게 하는 건 정치적인 부담이 너무 크다. 이대로 미국의 부채한도가 오르지 않은 채 미국 정부의 곳간이 바닥나면 어떻게 될까. 미국 정부가 질 수 있는 빚의 법적 상한선인 31조 4천억 달러 선에 닿은 건 이미 지난 1월이다. 이후로 미국 정부는 더 이상의 부채를 만들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다. 그냥 갖고 있는 돈 안에서 당장 급하지 않은 이쪽 돌 빼서 저쪽 괴며 버티고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공무원 퇴직자들을 위한 기금의 신규 투자를 멈추고, 연준에 만들어 놓은 재무부 통장에서 예금 빼 쓰면서 버티고 있다.)

하지만 세상 누구보다 빚 많은 미국 정부에게 끊임없이 만기일이 돌아온다. 보통 사람들도 대출 만기가 돌아오면 그 돈 갚아야 하듯이, 만기가 된 국채에는 채권자가 원하면 돈을 돌려줘야 한다. 재닛 옐런 미 재무장관이 "우리 현금 바닥나고 채권자들에게 줄 돈 하나도 없게 된다!"고 못 박은 시점이 바로 앞서도 언급한 6월 1일이다. (이것에 대해서도 공화당 의원들은 "못 믿겠다"는 제스처를 취하고 있긴 하다.)

미국 정부가 "우리 진짜 갚을 돈 없어!" 손 들어버리면? 문자 그대로의 국가 부도이다. 요새 끊임없이 언급되는 '디폴트 사태'가 펼쳐질 수 있는 것이다.
 

과거 상황을 보면 - '1조 달러 동전' 아이디어

이전까지 되풀이된 109번의 부채 상한 조정 중에서 정말 '국가부도'에 근접했던 때는 지난 2011년 오바마 행정부 시절이다. 당시 디폴트 시한으로 삼았던 날로부터 이틀 전까지 벼랑 끝 협상이 계속됐다. (올해로 따지자면 5월 30일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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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때, 서두에서 언급한 '1조 달러 동전' 아이디어가 정부 내에서도 오갔다. 미국 정부가 발행하는 백금 기념주화가 있다. 법적으로는 재무부 장관이 이 기념주화에 액면가를 재량껏 부여할 권리가 있다. 정부가 연준처럼 '진짜 돈', 지폐를 찍어낼 수는 없지만, 이 주화를 만들 권리는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재무장관 명령으로 액면가 1조 달러짜리, 지금 우리 돈으로 1천300조 원짜리 기념주화를 하나 찍어내서 그걸 연방준비은행에 입금하고 그만큼 진짜 돈-1조 달러-를 달라고 하면 된다는 아이디어가 나왔던 것이다.

제아무리 미국이라고 해도 이 정도로까지 돈을 가지고 '꼼수'를 부리면 달러의 위상에 아무 흠집이 나지 않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당장 달러가 어떻게 돼버릴 일은 없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미국이 금본위제를 폐기할 때의 논리도 어디 한 군데 명분이 없긴 하다.) 오히려 무슨 짓을 해도 (달러 인덱스가 서서히 기울어질 뿐) 박살은 나지 않는 기축통화 달러의 위상을 역설적으로 확인시키는 계기가 될 수도 있었을까?

아무튼 그래서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폴 크루그먼도 특유의 신랄한 냉소가 배어 나오는 칼럼에서 "1조 달러짜리 동전 발행, 그거 꼼수긴 하죠. 하지만 그래서 뭐요? 경제적으로는 무해하잖아요."라고 약간의 반어와 진심을 섞어 말하고 있는 것이다. (폴 크루그먼이 이 칼럼을 쓴 시점은 2011년의 가장 첨예했던 부채한도 협상이 지나가고 그다음 협상 시점이 도래했던 2013년 초다.)
 

역사와 교훈 - 터질 뻔했던 '새우등' 한국

2011년에 결국 1조 달러짜리 동전은 발행되지 않았다. 늘 그랬듯 민주당 정부와 공화당은 합의에 이르렀다. 오바마 전 대통령은 2017년에 한 인터뷰에서 "그런 얘기가 정부 내에서 나왔던 건 사실이지만, 이상한 생각이었다."고 이 '동전 계획'에 대해서 언급한다. 상황이 수습된 이후 승자의 여유가 느껴지는 인터뷰다. (2011년의 미국 정부 부채한도 협상은 기존 방식의 정치적 협상을 거부하고 밀어붙이는 전략을 잘 구사했던 오바마 전 대통령이 이듬해 재선으로 승리하고, '어, 이쯤 하면 정부가 우리를 달래야 하는데' 당황했던 공화당 강경파인 '티 파티'가 이듬해 전멸하며 장기적인 관점에서 완패한 사건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

하지만 당시 전에 본 적 없는 수준으로 첨예한 대치가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되자, 신용평가기관 스탠더드앤푸어스가 미국의 신용등급을 최상위 등급인 AAA에서 AA+로 강등시켜 버렸다. 정확한 강등 시점은 부채한도 협상이 타결된 직후지만, 당시 마지막 순간까지 첨예했던 갈등 속에 노출된 긴장이 영향을 미친 것이다.

이후 뉴욕증시의 다우와 S&P지수는 16~18%의 폭락세를 보였다. 남의 일이 아니다. 코스피는 무려 27%나 빠졌다. 미국 국가부도의 위험성이 전에 없이 심각한 수준으로 언급되게 만든 정치적 다툼이 시장에 던진 동요가 그토록 컸던 것이다. 이후에도 미국은 시중에 풍부한 유동성을 유지하며 이내 증시 폭락을 비롯한 문제 상황들이 수습됐지만, 기축통화국 미국처럼 곤경에 처할 때마다 돈을 찍어내는 마법을 부릴 수 없는 우리나라는 한동안 더 휘청거려야 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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