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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멘터리] 홍금보의 쿵푸와 백혜선의 피아노...영화 "칠중주:홍콩 이야기"

이주형 기자의 씨네멘터리 #74

   '홍콩 영화'는 이제 존재감이 거의 사라졌지만, 한국 영화를 '방화'라고 부르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면 할리우드 영화, 한국 영화와 더불어 극장가를 지배하는 3대 영화이자 일종의 장르였습니다. 영화깨나 본 사람들은 다 기억할 텐데, 당시 홍콩 영화의 대표적인 제작사가 바로 '골든 하베스트(가화,嘉華)'로 그 흔적은 지금까지도 CGV에 남아 있습니다. CGV는 한국의 CJ, 홍콩의 골든 하베스트(Golden Harvest), 호주의 빌리지 로드쇼(Village Roadshow)가 합작해서 출발한 극장 체인입니다.

그런데, 골드 하베스트사에는 '골든 트리오' 즉 '가화삼보(嘉禾三寶)'가 있었으니 그게 바로 성룡·홍금보·원표입니다. "오복성(1983)", "쾌찬차(1984)", "복성고조(1985)" 등 이 세 사람이 뭉쳐 만든 6편의 코믹 무술 액션 영화는 한국에서도 나올 때마다 큰 히트를 치고 명절 때면 특선 영화로 방영되며 뭇 시청자들을 TV 앞으로 불러 모았습니다.

"쾌찬차(1985)." 왼쪽부터 성룡, 홍금보, 원표
그중 홍금보는 주로 코믹하면서도 어리숙한 캐릭터를 연기했는데, 특히 100kg 넘는 거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날렵한 무술 솜씨는 경탄을 자아냈습니다. 신인 시절에는 "용쟁호투(1973)"에서는 단역으로서 이소룡과 일합을 겨루기도 했었죠. 성룡의 대중적 인기에는 못 미쳤지만 사실 홍금보는 홍콩 영화 전성기에 배우, 감독, 무술감독, 제작자로 맹활약한 전천후 영화인이었고 나이가 들면서는 홍콩 영화계의 대부로 불렸습니다.

   실로 오랜만에 그가 돌아왔습니다. 최근 개봉한 "칠중주: 홍콩 이야기"라는 옴니버스 영화의 첫 번째 에피소드 '수련(원제는 鍊功)'은 홍금보가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고하며 자신이 인생에서 배운 바에 대해 한마디 던지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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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대 홍콩의 어느 건물 옥상. 이십여 명의 아이들이 다리를 벽에 기댄 채 오수를 즐기고 있습니다. 다만, 한 소녀만 쉬지 않고 망을 봅니다. 사부님이 언제 옥상으로 올라올지 지켜보고 있는 거죠.

영화 "패왕별희"에 잘 나와있지만 중국의 경극 학교나 무술 학교의 훈련은 지금의 기준으로는 아동 학대라고 할 만큼 혹독했습니다. '수련'에서도 아이들은 아침 7시부터 낮 12시까지 쉬지 않고 훈련을 하고, 허리를 활처럼 휜 채 30분 동안 물구나무서기를 합니다. 그러니 아이들이 사부님의 눈을 피해 농땡이를 치는 것도 이해할만합니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어느 날 망보던 소녀마저 까무룩 잠이 들어버리는 바람에 사부님에게 모든 게 들통납니다. 평소 반장 역할을 하며 사부님이 없을 때면 훈련을 주관하던 큰형 금보가 대표로 벌을 받습니다. 오랜 시간 땡볕에서 의자 위에서 물구나무서기를 하던 금보는 땀범벅이 돼 팔을 후들거리다 결국 미끄러져 떨어집니다. 머리가 깨져 정수리에서 피가 흘러내리는 금보는 혼자 생각합니다. '왜 이렇게 땀이 뜨겁지?'

그날 이후 금보와 아이들은 사부님이 안계서도 쉬지 않고 연습에 매진합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 영화가 그저 옛날을 생각하며 홍금보가 지어낸 이야기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텀블링하고 있는 있는 아이들 모습에서 엔딩 씬으로 컷 하면, 화면 가득 백발이 눈에 들어옵니다.

영화 "칠중주:홍콩 이야기" 중 홍금보 / 콘텐츠판다
하얗게 센 머리카락 아래로 길게 사선으로 찢어진 상처가 보입니다. 실화였던 겁니다. 카메라가 뒤로 빠지면서 부리부리한 눈매는 그대로지만 어느덧 칠순 노인이 된 홍금보가 나와 말합니다.

"시간은 쏜살같고 되돌릴 수 없다. 과거는 그저 추억일 뿐"

'소년이로학난성(少年易老學難成).' 소년은 늙기 쉽고 학문은 이루기 어렵다는 유명한 구절이 생각났습니다. 같은 얘기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달리 들립니다. 그 뚱뚱한 몸에서 나오리라고는 상상하기 힘들었던 유연하고 민첩한 동작들은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싶을 정도의 부단한 수련의 결과였습니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백혜선은 최근 펴낸 "나는 좌절의 스페셜리스트입니다"라는 책에서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틀리지 않고 100번을 연주하는 연습을 했다고 말합니다. '무궁무진한 반복은 완전무결한 결과를 넘어 자유화된 표현으로까지 나아간다'는 겁니다. 백혜선 씨의 경험에 따르면 그렇게 수련하다 보면 피아노 연주가 근육 훈련을 넘어 정신적인 연마의 단계로 나아간다고 하네요.

무작정 될 때까지 몰아붙이는 묻지마식 훈련을 마냥 옹호할 수는 없습니다. 훈련과 학대를 엄격히 구분하는 것이 이 시대의 정신입니다. 그러나 놀랄만한 기량이 초인적인 노력 끝에 달성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손흥민, 김연아 등 우리에게 영감을 주는 세계적인 스포츠 스타들은 종목 불문하고 어려서부터 엄청난 훈련을 합니다. 다만 그들의 탤런트와 자발적 의지가 부정적 시선을 가려주고 있을 뿐입니다. 어느 수준까지 갈 것이냐, 어떤 인생이 좋은 인생이냐는 각자의 선택입니다.

   영화 "칠중주:홍콩 이야기"에는 이밖에도 이제는 사라져 가는 것들을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가슴에 새겨둘 만한 주옥같은 대사와 장면들이 많습니다.

허안화 감독은 7,80년대 초등학교 풍경을 떠올리게 하는 '교장 선생님(원제 校長)'에서 "아름답지 않은 들꽃도 누가 보라고 존재하는 건 아니다"라는 대사로, 임영동 감독은 유작이 된 '길을 잃다(원제 迷路)'에서 "기억해, 행복하게 사는 건 어렵지 않아" 등의 대사로 올드팬들의 마음을 훔칩니다. '홍콩의 스필버그'로 불렸던 서극 감독도 '심오한 대화(深度對話)'로 녹슬지 않은 발랄한 재기를 보여줍니다.

홍콩 영화 전성기를 이끌며 명성을 날리던 7인의 명감독이 슬쩍 힘을 빼고 따뜻하게 인생을 관조하며 만든 소품들을 감상하면 슴슴한 맛이 진국처럼 느껴지는 영화입니다. "칠중주:홍콩 이야기"를 보고 나서 노포에서 평양냉면 한 그릇 하며 옛 추억에 젖는다면 더할 나위 없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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