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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멘터리] 한국영화 볼 게 없다? "지금이 골든타임"

이주형 기자의 씨네멘터리 #69

  2003년은 한국영화사에서 중요한 작품들이 나온 해였다. 

지금은 세계적 거장이 된 봉준호 감독을 대중들에게 알린 출세작 “살인의 추억”이 개봉했고, 박찬욱 감독의 “올드 보이(57회 칸 영화제 심사위원대상)”도 극장에 걸렸다. 또 ‘저주받은 걸작’ 또는 ‘희대의 괴작’이라는 불리는 “지구를 지켜라!(25회 모스크바영화제 감독상)”도 이 해 4월에 개봉했다. 다만 장준환 감독의 “지구를 지켜라!”는 같은 달 개봉했던 “살인의 추억”과 달리 흥행에 실패하고 잊혔다. 장 감독은 봉준호 감독과는 한국영화아카데미 11기 동기 사이기도 하다. 

이 두 명의 ‘영화 천재’들을 각각 조감독과 연출부원으로 데리고 자신의 데뷔작을 찍은 감독은 ‘전생에 나라를 구했냐’는 말을 들을 만도 하다. 박기용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모델 선인장(1997)" 포스터
한국영화아카데미 3기인 박기용 위원장의 감독 데뷔작인 “모텔 선인장(1997)”은 정우성,박신양,이미연,진희경 등이 주연으로 나오고 무려 ‘왕가위의 크리스토퍼 도일’이 “중경삼림”을 찍은 뒤 촬영을 맡았으니 박 위원장은 전생에 나라가 아니라 지구를 구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봉준호 감독이 장준환 감독과 자신은 모차르트와 살리에르의 관계라고 얘기를 했는데, 그때는 자기가 살리에르라고 했죠, 장준환 감독이 모차르트고.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어.”(웃음)

     1973년 영화진흥공사로 출발한 영화진흥위원회가 출범 50주년을 맞았다. 봉준호를 배출한 한국영화아카데미는 40주년이 됐다. 그런데 올해 들어 관객들은 한국영화를 보러 가지 않는다. 볼만한 한국영화가 없다고 한다. 이것은 일시적 현상일까, 큰 흐름일까. 임기 반환점을 돈 박기용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을 만났다.

“제가 최근에 경험 많은 제작자를 만났는데 이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최근에 새로운 한국영화를 찾기가 되게 어렵다. 소위 ‘안전빵’으로 가는 영화들 밖에 보이지 않아서 굉장히 답답하다. 그러니 영화진흥위원회가 새로운 영화들이 만들어질 수 있도록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

서울 서교동 영화교육지원센터에서 인터뷰 중인 박기용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
   “범죄도시2”가 코로나를 끝장낼 듯 파죽지세로 천만 관객을 돌파한 게 약 1년 전이다. 그때만 해도 극장가는 희망에 부풀었다. 하지만 2월 한국영화 매출 점유율(19.5%)과 관객 점유율(19.8%)은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이 만들어진 2004년 이후 2월 최저치를 기록했다. 2월 한국영화 관객 수는 127만 명으로 최고 호황기였던 2019년 2월의 7.4% 수준이었다. 설 대목을 겨냥한 “교섭”과 “유령”은 물론 “카운트”, “대외비” 등도 줄줄이 손익분기점을 넘어서지 못했다. 

2월 전체 영화 관객 수도 642만 명으로 2019년 2월의 28.8%에 그쳤다. 그나마 “더 퍼스트 슬램덩크”와 “스즈메의 문단속”같은 일본 애니메이션이 400만을 넘기며 시장을 이끌어 가고 있다. 올들어 국가별 시장점유율은 4월8일 현재 일본이 36.2%로 유례없는 1위를 달리고 있다. 29.5%의 한국은 미국(30.6%)에 이어 3위다.

“기생충”으로 변방에서 중심으로 우뚝 올라 선 한국영화의 약진이 엊그제 같고, 넷플릭스 같은 스트리밍 서비스에서도 K-콘텐츠가 여전히 위력이 발휘하는 것 같은데, 극장가의 침체는 잘 실감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올해 상반기, 관객들의 한국영화에 대한 외면은 '느낌적 느낌'이 아니라 사실이다. 

영화진흥위원회 웹진 "한국영화" 4월호 표지
(사진은 영화진흥위원회 웹진 "한국영화" 4월호 표지)

“지금이 한국영화의 골든 타임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이 기회를 놓치게 되면 언제 또다시 이런 기회가 돌아올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한국영화가 이 정도로 각광받게 된데는 “기생충”의 역할이 컸지만, 한편으로는 중국영화가 팬데믹으로 락다운되고, 영화 대국 일본이 전반적으로 경제가 침체되면서 영화 산업도 상당히 주춤한 측면이 있거든요.”

- 그렇다면 지금 한국영화의 골든 타임을 살리는데 있어서 가장 위협적 요소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2019년이 한국영화 역사상 최고의 해였다고 하면서 어떻게 하면 2019년의 좋았던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을까 하고 영화계에서 얘기를 많이 하는데 저는 그 생각 자체가 가장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돌아가는 건 불가능하거든요. 계속 직진을 해야지 유턴을 하는 것은 이 시대에는 가능하지 않아요.”

- 코로나 국면에서 미국과 일본의 영화 시장은 90% 가까이, 중국은 100% 회복했다고 말씀하셨는데, 한국의 회복률이 떨어지는 이유는 뭘까요?

코로나 방역 대책이 상당히 강했던 것도 분명히 영향이 있었던 모양이고, 극장에 가는 문화 자체가 옅어진 것도 작용을 했죠. 온라인 스트리밍에 익숙해진 젊은이들이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에 가는 동력이 특히 한국에서 상당히 떨어졌다고 알고 있습니다. 또 입장료가 올라가니까 극장에 갈 동력이 더 떨어졌죠. 그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봅니다.

“극장업계도 영화관람료 인하 고민 중”

실제로 코로나 기간에 급격히 인상된 관람료에 대한 불만과 우려의 목소리는 관객들 사이에서, 그리고 영화계 안팎에서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최근 10~60대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 열 명 중 여섯 명은 영화관 이용의 최대 단점으로 비싼 관람료를 꼽았다. (3월29일 빅데이터전문기업 조사) 박기용 위원장은 극장업계에서도 요금을 낮추는 게 필요하다는 생각은 하고 있다고 전했다.

“극장업계 관계자들에게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자기네들도 입장료를 낮추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은 하는데, 이 방법은 사실 마지노선이라 입장료를 낮췄을 때 (상황이) 나아지지 않으면 어떡하느냐, 자신들은 그 다음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그래서 지금 고민을 하고 있다고 얘기하더라구요.”

박 위원장은 이르면 다음 달 쯤 한국영화 위기 극복을 위한 범 영화계 협의체를 꾸려 다양한 위기 극복 방안과 정부에 대한 요구, 대국민 호소 등 한국영화의 골든타임을 살리기 위한 대책을 내놓을 예정이라고 했다. 이 협의체에는 영화산업의 큰 축 가운데 하나인 극장업계도 참여할테니 그때 쯤이면 아마도 영화계 자구 노력 가운데 하나로 관람료 인하가 발표될 가능성도 없지 않아 보인다.

   인상된 관람료과 더불어 한국영화가 관객들에게 비판을 받는 부분이 있다. “요금도 올랐는데 영화는 오히려 돈값을 못한다”, 다시 말해 “그 돈 내고 볼만한 한국영화가 없다”는 것이다.
 
사실 이 문제는 코로나 사태와 맞물려 있다. 코로나로 개봉을 못한 한국영화가 아직도 90편에 육박한다. 이걸 풀지 않으니 볼 영화가 없고, 관객이 없으니 풀 수가 없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2~3년 묵은 영화들이잖아요. 영화를 개봉하려면 그냥 극장에 건다고 개봉이 되는 게 아니라 P&A 비용(홍보마케팅 비용)을 지출해야 하잖아요. 그것도 최소 몇십 억 원은 써야 효과가 있지 그걸 하지 않고 개봉을 하는 건 거의 자살 행위나 다름없죠. 그런데 P&A 비용을 써서 과연 손익분기점을 넘길 수 있을지는 아무도 장담하기 어려워서 계속 주저하는 거거든요. 주저하면서 시간을 끌면 끌수록 더 불리하다는 것을 다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요.”

시간은 가고 트렌드는 계속 바뀐다. 요즘 볼만한 영화가 없는 이유 중 하나는 관객들이 지각 개봉한 영화들이 어딘지 모르게 시의성이 떨어진다고 느끼기 때문은 아닐까. 흥행의 공기는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다. 대중을 상대로한 엔터테인먼트는 대중의 미묘한 정서적 클라우드 속에 예민하게 촉수를 뻗쳐놓고 대중의 기호를 낚아채야 한다. 

아무리 첫 개봉이라고 할지라도 철 지난 영화는 대중의 기호를 감각적으로 건드리지 못한다. 관객들은 안다. 뭔가 어색하다는 것을. 요즘 개봉하는 한국영화 메인 포스터에까지 등장하는 ‘킹 받는 미친 개’같은 비속어 카피는 어떻게든 젊은 관객들을 끌어들여 보자는 안간힘의 패착으로 보인다. 전혀 힙하지 않다. 오히려 영화의 격만 떨어뜨릴 뿐이다. 

이른바 ‘창고 영화’를 털어야 새 영화의 투자와 제작이 활발해진다. 박 위원장은 적어도 300억 원 정도의 개봉 촉진 지원금을 마련하기 위해 애쓰고 있으며 조만간 대책을 마련해서 공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3대 멀티플렉스들의 모임인 영화관산업협회에서도 이달 개봉하는 “리바운드”, “킬링 로맨스”, “드림” 등 한국영화에 관객당 1000~2000원의 개봉 지원금을 주기로 했다.

“OTT 영화도 영화다”

   한국영화가 어려워졌다는 말은 애매한 표현이다. ‘한국영화’를 구성하는 주체가 다양하기 때문이다. 창작, 투자, 제작, 배급, 상영 모두 한국영화의 주체다. 한국영화가 어려워졌다고 해서 이 모든 부문이 팍팍해진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스트리밍 서비스가 각광을 받으면서 감독과 배우 등 창작 부문은 오히려 찾는 사람도 많아지고 바빠졌다. 

앞서 박 위원장의 언급도 있었지만 한국영화가 위기에 빠진 것은 한국에서는 주로 ‘OTT’로 불리는 스트리밍 서비스가 활성화된 데 기인한 측면도 크다. 그렇다면 ‘영화진흥위원회’의 박기용 위원장은 스트리밍 서비스에 적대적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 저는 영화를 영화답게 하는 것은 큰 스크린, 암전, 그리고 타인과 함께 본다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위원장님이 재정립하겠다고 하는 영화의 정체성은 무엇입니까?

개인적으로는 저도 극장에서 많은 사람과 암전 상태에서 집중해서 영화를 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정책 기관은 시대의 큰 흐름에 올라타야 합니다. 이제 영화는 극장에서 보는 것이기도 하지만 극장 외에서도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극장업계는 물론이고 진흥위원회 위원님 중에서도 극장을 포기하자는 거냐며 반대의 목소리가 있었습니다. 설득했습니다. 극장을 포기하자는 것이 아니라 지금은 극장+알파의 시대가 아니냐, 지금의 스트리밍 서비스에서 더 나아가 또 다른 뉴미디어가 계속 나와서 새로운 방식으로 영화를 보고 제작할 수 있을텐데 그때는 어떻게 할 것이냐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박 위원장의 포석은 영화진흥위원회의 위상 재정립과 연결된다. 박 위원장은 기존의 영화 관련 업무뿐 아니라 넷플릭스 같은 스트리밍 서비스를 포함한 모든 영상 관련 업무는 콘텐츠진흥원에서 영화진흥위원회로 이관해 영화진흥위원회가 담당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말했다. 

방송, 게임, 애니메이션, 만화, 음악, 패션 등을 광범위하게 다루는 콘텐츠진흥원의 올해 예산은 약 6200억 원으로 영화진흥위원회의 7배가 넘는다. 제 논에 물대기 싸움로 비춰질 수도 있겠지만, 납세자 입장에서는 어느 쪽이 됐든 한국문화 융성의 기폭제가 된 영상 분야를 맡아 잘할 수 있는 기관에서 담당하는 것이 바람직하므로 정부와 입법부 전문가들이 잘 판단해봤으면 좋겠다.  

국내 1호 영화 ‘프로듀서’

   ‘코리안 뉴웨이브’를 아시는지? 1980년대 후반 민주화 운동과 맞물리며 한국영화에 나타난 새로운 경향으로 한국영화사에서 등장한 첫 사조라고 할 수 있다. 박광수 감독의 “칠수와 만수(1988)”, 장선우 감독의 “성공시대(1988)”, 이명세 감독의 “개그맨(1988)” 등 사회비판적 메시지를 전하거나 과거와는 사뭇 다른 영화 스타일을 선보인 일군의 영화를 말한다. 

그 중 박광수 감독은 “칠수와 만수” 이후 “그들도 우리처럼(1990)”, “그 섬에 가고 싶다(1993)”같은 코리안 뉴웨이브 영화를 내놓았는데, 박기용 위원장은 “그 섬에 가고 싶다”에서 프로듀서를 했다. 국내 1호 프로듀서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한국영화계에서 ‘프로듀서’라는 용어를 처음 쓰기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영화사 대표가 제작자가 되는 거잖아요. 박광수 필름이라는 독립 영화사를 만들었고 박광수 감독님이 영화사를 대표했는데 실질적으로 제작을 총괄한 건 저였으니까 제가 프로듀서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도입했었고요, 이후로 젊은 영화인들이 직접 제작을 시작하면서 프로듀서라는 용어를 막 쓰기 시작했죠.”

박기용 위원장

영화계에서 창작자(감독·프로듀서), 교육자(단국대 교수·한국영화아카데미 원장), 행정가를 두루 거치고 있는 박 위원장은 지난해 영국영화협회(BFI)가 발간하는 저명한 영화잡지 ‘사이트 앤 사운드(sight & sound)’가 10년 주기로 발표하는 '역대 가장 위대한 영화' 투표에 참여했다. 이번 투표에서는 “기생충”이 한국영화로는 처음으로 90위로 올라 화제가 된 바 있다.  

박 위원장이 제출한 리스트의 낯선 제목들을 보고는 좌절 모드가 작동했지만, 어쨌든 그 중에서도 한 편만 고른다면 어떤 영화를 꼽겠냐고 물었다.

“장 르느와르 감독의 ‘토니(1935)’라는 영화를 뽑아 봅니다. 그 영화는 사실 ‘게임의 규칙(1939)’처럼 장 르느와르 감독의 대표작은 아니거든요. 그런데 이 영화를 뽑은 이유는 장 르느와르가 추구했던 영화관이 '토니'에서 가장 잘 구현됐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장 르느와르가 1930년대에 어떤 얘기를 했냐면, 카메라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촬영을 하고 싶을 때 꺼내서 촬영을 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배우가 사람들 다 있는 시장 같은 곳에 들어가서 그냥 살아있는 모습 그대로 찍었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제가 추구하는 영화관하고도 상당히 유사한 부분이 있어서 자극을 많이 받았습니다.”

안타깝게도 지금 이 영화를 한국어 자막으로 볼 수 있는 스트리밍 서비스는 없다. 

   박 위원장에게 마지막으로 한국영화아카데미 후배이자 “모텔 선인장” 감독 시절(당시 36세) 조감독이었던 봉준호는(당시 28세) 어떤 직업인이었고 어떤 사람이었냐고 성공의 비결이나 구해볼 요량으로 넌지시 물었다. 나는 답을 얻었다. 독자 여러분께서도 박기용 위원장의 대답에서 인생의 힌트를 찾아보시길. 

“일단 되게 싹싹했었고요. 인사성이 상당히 밝았고, 선배들한테 잘했고. 그리고 무엇보다 저는 봉준호 감독이 재기발랄해서 같이 이야기하는 게 되게 재밌더라고요 되게 유머러스하고 톡톡 튀는 그런 게 있어서 재미있었어요. 같이 술을 먹어도 재미있고. 조연출로서도 상당히 성실하고 저한테도 많은 자극이 됐죠. 그리고 무엇보다 상당히 착합니다. 그래서 믿고 같이 일을 할 수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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