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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가해자 대한민국을 어떻게 볼 것인가

우리가 마주해야 할 또 다른 과거사,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사건

[취재파일] 가해자 대한민국을 어떻게 볼 것인가
재작년 11월 16일 서울중앙지법 453호 법정에 류진성 씨가 증인으로 출석했습니다. 그는 과거 베트남 퐁니 마을에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살상이 있었다는 사실을 고백한 몇 안 되는 참전 군인입니다. 사건을 심리한 박진수 부장판사는 류 씨에게 "제가 전쟁을 잘 모른다"며 몸을 낮췄습니다. 전쟁을 아는 70대 국가유공자의 증언은 힘이 셌습니다. 결정타까진 아니어도 여러 증거와 함께 퐁니 사건 생존자 응우옌 티 탄 씨가 승소한 배경이 됐습니다.

과거사 문제를 해결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은 아마도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일 겁니다. 류 씨를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도 않습니다. 무고한 양민의 죽음을 목도하고도 죄책감이 들지 않았던 자신을 변화 시킨 건 다름 아닌 시간이었다고 그는 말합니다. 양심선언은 누적된 세월의 산물이라는 겁니다. 여전히 '학살'이 아닌 '사고'라는 표현을 고수하는 그도, 55년 전 벌어졌던 끔찍한 일이 전쟁이라는 이유로 용납될 수 없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습니다.

다시 선고가 있던 지난달 7일입니다. 박 부장판사는 "불법 행위가 있었다 하더라도 사건 발생 시점 내지는 원고 응우옌 씨가 성인이 된 해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만큼, 손해배상 청구권의 소멸시효(장기 5년, 단기 3년)가 이미 완성됐다"는 정부의 논리를 권리 남용이라며 기각했습니다. 법원에 국가배상소송이 제기된 2020년 무렵까지도 응우옌 씨에게는 대한민국을 상대로 소송을 낼 수 없었던 특별한 사정이 있었고 이걸 무시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퐁니 사건 생존자 응우옌 티 탄 씨 (출처 : 고경태 기자)

퐁니 사건 이후로도 전쟁은 계속됐고 한‧베 양국이 오랜 단교 상태였다는 점, 가족을 잃고 사실상 고아가 된 응우옌 씨가 기본 교육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고 살아온 삶, 한국 정부가 자료를 은폐하려 했던 정황 등을 재판부는 두루 살폈습니다. 물론 정부는 받아들일 수 없다며 항소했습니다. 소멸시효 문제는 앞으로도 쟁점이 될 테니 결론이 뒤집힐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어찌 됐든 1심 재판부의 이런 판단 덕에 응우옌 씨는 최종 승소를 위한 첫 번째 문턱을 넘을 수 있었습니다.

지난 1심 판결을 굳이 돌아본 까닭이 있습니다. 저는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사건을 바라보는 우리가, 흘러간 시간을 대하는 두 사람의 태도를 고루 차용해야 한다고 봅니다. 류 씨는 지난 세월을 망각과 합리화의 기제가 아닌 반성의 밑거름으로 삼았고, 법대에 앉아 있던 이는 수십 년 삶에 묻어 있는 고통을 가능한 범위 안에서 최대한 살폈습니다. 최근 SBS가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사건을 집중 보도한 이유도 두 사람의 이런 자세에 닿아 있습니다. 하지만 어두운 과거사에 대한 책임을 부정하는 목소리는 여전히 끊이지 않습니다. 나름의 이유들도 있습니다. 방송에서는 제대로 다루지 못한 것 같아 <취재파일>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문제가 불거진 뒤 일관되게 나오는 주장이 있습니다. 지금의 잣대로 당시 상황을 평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 분명히 해두자면, 당시의 잣대로도 전쟁 중에 민간인을 학살하는 건 엄연히 불법이었습니다. 처벌 받은 전례도 있습니다.

베트남전 당시 민간인 7명을 사살한 뒤 상부에 베트콩 사살로 허위 보고했던 한 군인은, 1968년 7월 보통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이듬해 2월 고등군법회의가 무기징역으로 감형했고 대법원은 이를 확정했습니다. 그보다 앞선 1949년 문경 석달 마을에서 벌어진 학살 사건은 또 다른 예입니다. 당시 군은 공비 소탕 명분으로 어린이와 여성, 노인 등 주민 86명을 무차별적으로 사살했는데, 여기서도 국가배상책임이 인정됐습니다.

1969년 중앙정보부(지금의 국정원)는 퐁니 사건에 관해 부대원을 상대로 진상 조사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정부는 이미 오래 전부터 이 사건과 한국군 사이의 연관성을 알고 있었습니다. 퐁니 사건 변호인단은 소송 끝에 당시 조사를 받았던 소대장들의 이름이 적힌 목록 정도만 받아낼 수 있었습니다. 정부는 재판 과정에서 이 보고서 내용을 확인하지 못했다고 답했습니다. 선고 이후 관련 자료를 살펴봐도 학살은 전혀 확인되지 않았다던 국방부 장관에게 비판이 제기되는 이유입니다.

비정규전(게릴라전)의 특수성을 이해해야 한다고들 합니다. 당시 상황이 복잡하기는 했습니다. 실제 전쟁에 나갔던 류 씨는 "베트콩 사살 경험을 구체적으로 풀어놓는 사람의 말은 거짓일 수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숨어서 공격하는 적의 위치를 찾기도 어려웠다는 겁니다. 두려움은 보이지 않음의 다른 말입니다. 어디서 날아오는지도 모르는 총알에 내 옆에 있던 사람이 하나둘 죽어가는 상황이었던 겁니다. 베트콩은 여러 마을에 수시로 잠입해 활동했다고 합니다.

군인들이 느꼈던 두려움에 감정을 이입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당부를 가리는 판단은 엄연히 다른 영역의 일입니다. 민간인 학살 사건의 초점은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이 있는지에 맞춰져야 합니다. 살인 행위에 불가피함을 함부로 붙이는 게 정의도 아닐 뿐더러 마을에 살던 주민이, 그것도 어린이와 갓난아기까지, 적군을 위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동일체였다는 주장 자체가 애초 비합리적입니다. 여러 생존자들은 눈앞에서 죽은 가족과 이웃이 전투와는 무관한 사람들이었다고 입을 모아 말하고 있습니다.

퐁니 사건 재판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쟁점이 됐습니다. 정부는 당시 전투 양상을 근거로 "(퐁니 사건) 피해자들이 베트콩 내지 그 동조 세력이었을 가능성이 있고 교전 중 발생한 전투행위나 사고로 인해 살상 당한 것이므로 정당행위에 해당한다"는 취지의 논리를 폈습니다. 퐁니 사건 1심 재판부는 이런 판단을 내놨습니다.
 
"전쟁 중이어도 적대행위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였다거나 참여한 것으로 의심할 만한 정황이 없는 상태에서 적대행위를 한 사람과 이를 하지 않은 사람을 구별하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살상하는 것이 허용된다고 볼 수 없다. 이는 당시 베트콩이 군복을 입지 않은 상태에서 민간인 복장을 하고 전투행위에 참여한 경우가 있었다고 하여 정당화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 원고(응우옌 티 탄)의 친척인 T와 K는 각각 남베트남 민병대와 농촌개발단에서 근무하고 있었고, 실제 당시 총격을 입었던 사람들 중에는 남베트남 민병대의 가족들이 포함되어 있던 것으로 보이는 점에 비추어 … 사건의 생존자, 목격자, 이 사건 1중대원, 미 해병대 연락병의 각 진술에 따르면, 원고와 원고의 가족을 비롯하여 다수의 사람들이 비무장 상태에서 무차별적으로 총격을 받았고, 그렇게 총격을 받은 사람들 중에는 영유아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퐁니 사건' 1심 판결문 중)

하미 마을에서 벌어진 한국군의 학살을 증언한 응우옌 티 홍 씨

하미 마을에서 벌어진 한국군의 학살을 증언한 응우옌 티 홍 씨는 취재진에게 "그 사람들 중에도 눈물을 흘리며 총을 쏜 사람이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생존자조차 군인 개개인의 상황을 애써 이해해보려 하는데, 희생양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을 되풀이하는 게 과연 옳은가요. 우리 군을 학살자로 매도하지 말라는 이들이 되려 무고한 양민을 불가피하게 죽어야 했던 사람들로 치부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일입니다.

 

사과는 베트남이 거부하는데 어쩌란 말이냐?

1심에서 승소한 응우옌 씨의 변호인단조차 소송은 민간인 학살 사건 피해자를 위한 바람직한 구제책이 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타국에서, 관련 자료를 확보하지도 못한 채로,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여 봤자 높은 수준의 입증 문턱을 넘기 어렵다는 겁니다. 결국 행정력을 동원해 폭넓은 진상 조사를 벌인 뒤 보상안을 마련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과 베트남 양국 정부가 각자 보유하고 있는 자료를 토대로 교차 검증하는 방식이 가장 이상적인 대안으로 거론됩니다.

물론 반론이 있습니다. 베트남은 승전국이라는 이유로 사과를 거부하고 있으며 진상 조사를 내켜하지 않는 건 베트남 정부도 마찬가지라는 주장입니다. 승전국 논리부터 보겠습니다. 일단 전제가 잘못됐습니다. 우리 정부는 명령에 복종해야 했던 군인들을 대신해 총체적인 가해 책임을 져야 합니다. 하지만 사과를 받아야 할 대상은 국가가 아니라 베트남에 살고 있는 피해자와 유족들입니다. 피 흘리며 죽어가던 가족의 모습을 수십년째 잊지 못하는 이들의 삶에 승리라는 표현이 가당키나 할까요.

제가 베트남에서 만난 생존자들은 하나같이 한국 정부의 사과를 원했습니다. 사흘 전에도 호치민시에서 메일 한 통이 왔습니다. 발신자는 대학 교수로 지내다 은퇴한 후인 응옥 상 씨입니다. 퐁니 사건 1심 판결을 안다던 그는 SBS가 자신의 가족사도 다뤄줄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1966년~1967년 사이 고향인 꽝응아이성 빈선현 빈탄이라는 곳에서 어머니를 포함한 50명이 한국군에 의해 숨졌고 본인도 다쳤다는 게 골자였습니다. 저는 이게 현실이라고 봅니다. 베트남에는 지금도 이런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양국 차원의 공동 조사가 당장 성사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우리뿐 아니라 베트남 정부 역시 진상 조사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왔기 때문입니다. 한국과의 경제 협력 관계를 고려해야 하는 베트남 정부의 현실적인 판단과 함께 내전을 치른 나라의 특수성도 작용했다는 분석입니다. 자국민끼리 총을 겨눴던 어두운 역사를 다시 끄집어내는 것 자체가 부담일 수 있다는 겁니다. 일단 조사를 한번 시작하면 그들로서는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사실이 드러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가 할 일을 해야 합니다. 정부 산하 위원회를 만들어 진상 조사를 시작하자는 제안은 몇 년 전부터 거론돼 왔습니다. 최근 국회에서는 특별법이 발의됐습니다. 민간위원으로 구성된 피해조사위원회를 설치해 의혹을 규명하고 정부에는 피해자의 명예 회복을 위해 필요한 조치를 권고하도록 하는 내용입니다. 일단 직권 조사가 가능한 진실화해위원회부터 움직여야 합니다. 하미 학살 사건 피해자들은 지난 2020년 진화위에 진실규명을 신청했지만 지금까지 아무런 답변도 듣지 못했습니다.

베트남 정부의 태도에서도 변화가 감지됩니다. 지난 9일 한국 정부가 퐁니 사건 1심 판결에 대해 항소한 직후 외교부 부대변인을 통해 이례적으로 강한 유감을 표명한 게 대표적 예입니다. 법원의 판단 등으로 사실 관계가 어느 정도 확인된 영역에서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해석이 나옵니다. 퐁니 사건의 진상을 이 정도라도 밝혀낸 건 한겨레 고경태 기자와 같은 우리나라 언론인과 시민단체 그리고 변호사들이었습니다. 여기까지 오는 데 한국 민간의 역할이 컸다는 건 불행 중 다행인 일입니다.

가해자로서 경험한 역사를 이제는 마주해야 합니다. 1심 재판이 막 끝났을 뿐이지만 추후 대법원이 국가배상책임을 확정할 경우까지 내다본다면 지금부터라도 포괄적인 진상 조사를 시작하는 게 국익에도 부합합니다. 너무 늦지 않은 시점에 정부가 바뀐 태도를 보여주기 바랍니다. 저는 제 나라 대한민국이 잘못을 바로잡는 데 주저함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 다음 <취재파일>에서는 퐁니 사건의 생존자이자 국가배상소송을 제기한 원고 응우옌 티 탄 씨와 응우옌 씨를 돕겠다고 나선 한 변호사의 인터뷰 전문을 차례로 전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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