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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프] 좌절의 연속이었던 선거제 개혁, 성공의 조건은

[선거제 개혁] ③ 노무현부터 윤석열까지, 선거제 개혁의 역사

스프 선거제 개혁3
독재시절 '양당 체제' 굳힌 2인 선거구

올해 초, 신년 인터뷰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중대선거구제 도입'을 언급했습니다. 지역 특성에 따라 2명에서 4명까지 뽑는 중대선거구제를 말했는데, 몇 명을 뽑느냐에 따라 제도의 효과에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명확히 정해진 것은 없지만 보통 한 선거구에서 2명에서 4명까지 선출하는 것을 중선거구제, 5명 이상을 선출하는 걸 대선거구제로 부릅니다.

대선거구제에서는 비례성을 높이고 지역주의를 완화시키는 등 제도 개혁의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다만 1명을 뽑는 소선거구제에서 2명을 뽑는 중선거제도로 바꿀 경우 오히려 양당 구도가 더 강해지는 효과를 가져옵니다.

스프 선거제 개혁3
한국 역사에도 국회의원 2인 선거구제가 있었습니다. 선거가 처음 도입된 1948년의 초대 선거는 한 선거구에서 한 명을 뽑는 소선거구제였습니다. 하지만 5.16 군사반란 이후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 독재 시기에 2인 선거구제가 도입됐습니다. 선거구에서 2명을 뽑을 경우 제1당과 제2당이 한 석씩 나눠 갖는 효과가 발생해 강력한 양당 구도가 굳어지고 제3당은 자랄 토양이 사라질 가능성이 큽니다. 이런 2인 선거구는 전두환 씨의 독재 정권에서도 유지됐습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1988년 총선에서야 다시 도입된 것이 소선거구제입니다. 2인 선거구제가 표심을 심하게 왜곡한다는 비판이 쌓여 있는 상태에서 민주화의 결과로 쟁취한 것이 지금의 소선거구제였습니다. 지금까지 선거제 개혁에 미온적인 반응을 보여 왔던 국민의힘 측에서 중대선거구제를 이야기하니, 민주당이나 시민사회에서는 2인 선거구제의 부작용 사례를 들며 오히려 반대하고 나선 상황입니다.

실제 SBS 설문조사에서도 민주당 의원들 중 상당수가 소선거구제 유지를 지지했고, 몇몇 의원들은 윤석열 대통령이 언급한 '중대선거구제'가 아닌 최소 4명 이상을 선출하는 '대선거구제' 도입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국회 밖에서 촉발된 개혁

87년 민주화 이후 정착된 소선거구 단순다수제(한 선거구에서 1등 한 명만 당선되는 방식)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다만 지역구 의석(253석)이 아닌 비례대표 의석(47석)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이 변화는 국회 내부의 개혁 노력보다는 외부에서 강제한 부분이 큽니다.

먼저 2001년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이 있었습니다. 이전까진 비례대표 의석을 '전국구'라는 명칭으로 불렀습니다. 전국구 의원은 지역구 선거에서 얻은 득표율에 따라 그대로 배분됐습니다. 국회의원 선거를 할 때 지역구 의원 한 표만 뽑았던 겁니다. 헌법재판소는 지역구 투표를 소속 정당에 대한 지지 투표로 해석하는 이 방식을 위헌이라고 결정했습니다. 지역구뿐 아니라 비례대표 의원도 유권자가 직접 투표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헌재 결정에 따라 지역구 의원에 1표, 지지하는 정당에 1표를 주는 '1인 2표제'가 도입됐습니다.

선거제 개편에 대한 두 번째 외부로부터의 충격은 2015년 선거관리위원회로부터 왔습니다. 선관위는 전국을 5~6개 권역으로 나눠서 300석을 지역구 200석, 비례대표 100석으로 나누는 선거제도 개편안을 발표했습니다. 지역구와 비례대표가 2:1로 권역 내에서 연동되는 '권역별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이때부터 선거제 개편의 핵심 주제로 떠올랐고 현재도 유력한 제도 개편안으로 논의되고 있습니다.

당시 선관위가 19대 총선 득표율을 기준으로 권역별 비례대표제 도입할 경우에 대해 시뮬레이션을 해봤습니다. 그 결과 새누리당이 호남에서 4석, 민주통합당이 TK에서 5석, PK에서 14석을 얻어 지역주의가 완화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정치인들의 개혁 시도

정치권 내부에서도 개혁 시도는 있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 이전에 중대선거구제를 말한 대통령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입니다. 2005년 노 전 대통령은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에 국무총리와 장관 등 내각의 구성 권한을 넘겨주는 '대연정'을 말하면서까지 선거제도 개혁을 이뤄내려 했습니다.

자서전 <운명이다>에 따르면 지역주의 타파를 소명으로 삼았던 노 전 대통령은 "나는 지금도 여전히, 국회의원 선거구제를 바꾸는 것이 권력을 한 번 잡는 것보다 훨씬 큰 정치발전을 가져온다고 믿는다"고 선거제 개혁에 대한 소신을 밝힌 바 있습니다. 대연정 제안에 야당이 적극적으로 응하지 않았고, 여당 내에서도 반대 목소리가 나오면서 결국 중대선거구제 도입은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스프 선거제 개혁3
소수정당에서도 개혁 시도가 꾸준히 있었습니다. 현행 선거제로 실제 득표율보다 더 많은 의석을 가져가 이익을 보고 있는 게 거대 양당이라면, 실제보다 적은 의석을 가져가고 있는 소수 정당으로서는 선거제도 개혁이 당의 흥망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 이후 1인 2표제가 도입된 뒤 처음 치러진 2004년 17대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은 13%의 정당 득표율을 얻었습니다. 지역구 2석과 비례대표 8석 등 총 10석을 가져가며 창당 4년 만에 의미 있는 의석수를 기록했습니다.

민주노동당은 10석을 토대로 무상 급식과 무식 의료 등 보편적 복지를 정치적 의제로 끌어냈습니다. 이후 20년 가까이 진보정당은 점차 의석수가 줄어드는 길로 접어들었고, 확장성을 가지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 원인으로는 내부적 역량 부족도 있지만 제도의 문제도 존재합니다. 지난 총선 당시 정의당은 여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에 협조하면서까지 선거제 개혁을 이뤄내려 했지만 결과는 반쪽자리인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에 그쳤고, 그마저도 위성정당이라는 꼼수를 통해 제도 개혁 효과는 사라졌습니다.

스프 선거제 개혁3
한국 정치사에 제3당 실험은 여러 번이었지만 최근 들어 가장 강력한 에너지를 가졌던 건 안철수 의원의 도전입니다. 15대 총선에서 충청 지역에 기반을 둔 김종필 총재의 자민련이 50석을 가져가며 제3당의 위치를 굳힌 적 있지만 전국 정당으로 존재하진 않았습니다. 20대 총선 당시 새정치를 말하며 정치권에 등장한 안철수 의원이 이끈 국민의당은 호남 의석을 다수 가져가고 정당 지지율에 힘입어 38석의 제3당이 됐습니다.

특히 정당 득표율에선 제1야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보다 1.2% 높은 26.7%를 얻으며 비례대표 13석을 가져갔습니다. 하지만 제3당의 시도들은 지금까지 모두 좌절되고 결국 거대 양당에 흡수 통합됐습니다. 1등만 당선되는 제도에서 제3당은 항상 단일화를 요구받습니다. 표가 분산되면 '최악'인 당이 당선되니까 차선책으로 단일화를 통해 최악은 막아야 한다는 논리가 작용하는 겁니다.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과 위성정당 논란

21대 총선을 앞둔 2019년, 민주화 이후 가장 의미 있는 선거제 개혁 시도가 있었습니다. 당시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자유한국당을 배제한 채 정의당과 함께 패스트트랙으로 선거제 개혁안을 지정해 통과시켰습니다.

자유한국당은 국회의원을 270석으로 줄이고 비례대표제를 폐지하는 안을 주장하는 등, 정개특위 내내 더불어민주당과 합의점을 찾지 못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여당인 민주당은 공수처법과 함께 선거법 개정안을 제1야당을 배제하고 통과시키려 했고, 이 과정에서 자유한국당 의원과 보좌진의 농성과 충돌도 나왔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지금의 '준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도입됐지만, 개혁에 동의하지 않은 자유한국당(총선 당시 미래통합당)은 21대 총선에서 위성정당이라는 방식을 통해 제도 개편을 무력화시켰습니다. 스스로 개편을 주도했던 더불어민주당 또한 따라서 위성정당을 만들면서 제도 개혁의 효과는 사라져 버렸습니다.

자신의 이해관계가 걸린 지역구 의원들의 반대, 이슈 자체의 복잡함으로 인한 국민들의 관심도 부족, 또 국민적 관심을 이끌어내지 못한 정치권의 문제가 겹쳐 2019년의 선거제 개혁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뉴질랜드는 어떻게 선거개혁에 성공했나?

스프 선거제 개혁3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이처럼 여러 가지 시도들이 좌절되고 미완으로 남은 상황에서 성공사례를 살펴보려 합니다. 원래 뉴질랜드는 한국처럼 소선거구 단순다수대표제로 지역구 의원을 선출했습니다. 이런 선거제도 덕에 국민당과 노동당, 거대 양당이 돌아가며 집권했습니다. 1980년대부터 1996년까지 이 양당은 정권 교체와 상관없이 높은 강도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국민 대다수는 이런 정부의 정책에 반대했고, 양대 정당에 대한 불만과 분노가 쌓여갔습니다. 따라서 선거제도 개혁이 필요하다는 국민들의 요구가 점차 분출됐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당 내각의 부수상이자 법무장관이던 제프리 팔머는 선거제 개혁을 자신의 소명으로 삼았습니다. 팔머의 주도하에 '선거제도 개혁을 위한 왕립위원회'가 만들어졌고, 시민사회에서도 '선거제도개혁연합(ERC)'이라는 시민단체가 만들어졌습니다. 노동당 의원의 대다수나 국민당은 선거제 개혁을 지지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ERC 등 시민사회의 압박을 토대로 왕립위원회는 독일식 비례대표제를 도입하자는 안을 냈고, 국민투표를 통해 이를 결정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총선을 앞둔 국민당과 노동당은 서로 표를 얻기 위해 이슈를 선점하려 선거제 개혁을 공약으로 내세우게 됩니다. 국민당은 독일식 비례대표제로의 급격한 변화는 반대하는 입장이었습니다. 1990년 총선을 통해 집권한 국민당의 의사와는 달리, 한번 물꼬를 튼 개혁의 방향은 걷잡을 수 없이 진행됐습니다. 1992년 국민투표에서 국민의 70%가 독일식 비례대표제로 전면적인 개혁이 필요하다고 밝혔습니다.

소선거구제에서 독일식 비례대표제로 갑작스럽게 변화된 후 치러진 총선인 1996년 이후 뉴질랜드는 양당제에서 다당제로 변화했습니다. 그 뒤 뉴질랜드는 여러 당이 연립정부를 구성하게 됐고, 이로 인해 신자유주의 일변도의 정책이 복지를 늘리는 방향으로 변화되었다고 평가됩니다.

뉴질랜드 사례를 볼 때, 선거제도 개혁이 성공하기 위한 조건을 이렇게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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