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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멘터리] "3000년의 기다림" 이후의 챗GPT

이주형 기자의 씨네멘터리 #64

[씨네멘터리] "3000년의 기다림" 이후의 챗GPT
   옛날 옛적에 유발 하라리라는 사람이 이스라엘에 살았다. 그는 대학에서 역사를 가르치며 먹고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하라리는 자신이 강의했던 내용을 정리해 책으로 펴냈는데 몇 년이 흐른 뒤 이 책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는 무명의 교수에서 일약 스타 학자가 되었다. 그의 말은 “사피엔스”라는 책 이전과 이후로 사람들에게 달리 들렸다.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자신을 비롯한 사피엔스종(種)이 다른 인간종은 물론 다른 동물들까지 지배하게 된 것은 언어 때문이라면서 허구, 즉 이야기를 만드는 능력이 사피엔스가 사용하는 언어의 가장 독특한 측면이라고 주장했다. 이야기 덕분에 인간은 집단적으로 상상할 수 있게 됐고 그렇게 해서 만들어낸 전설, 신화, 신, 종교가 사피엔스에게 ‘많은 숫자가 모여 협력하는 유례없는 능력’을 주었다는 것이었다.

   “사피엔스”가 한국에서 출간되던 해에 “매드맥스:분노의 도로”라는 영화도 개봉했다. 그해 최고의 흥행 영화는 아니었지만, 그해 최고의 ‘미친 영화’임에는 분명했다. ‘빨간 내복’이 스피커 트럭 위에서 화염을 내뿜으며 일렉 기타를 연주하는 장면에서는 극장에 모인 사피엔스들의 몸에서 엄청난 아드레날린이 분비되었다. 

"매드맥스:분노의 도로"의 한 장면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은 놀랍게도 70대 할배였다. 조지 밀러라는 이름의 이 할배는 젊었을 때 “매드맥스”라는 컬트 무비 트릴로지(1979-1985)를 만들었다. “매드맥스” 시리즈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를 개척했는데, 인류 문명 종말 이후의 세계를 그리는 ‘포스트 아포칼립스’라는 개념 자체가 이야기를 만드는 능력을 가진 사피엔스만이 생각해낼 수 있는 상상의 세계이자 이야기였다.

“매드맥스:분노의 도로”는 당시 사피엔스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있던 영화상인 오스카상에서 미술상, 편집상, 음향상 등 6개 부문을 수상하며 액션영화 사상 유례없는 인기와 평가를 누렸다. 매드맥스 팬들은 고령인 감독이 하루라도 빨리 시리즈의 5번째 작품을 만들어 주기를 기대했지만, 밀러 할배는 그로부터 8년이 지나서야 다음 영화를 들고 나타났는데 그것도 “매드맥스”가 아닌 “3000년의 기다림”이라는 판타지 멜로 로맨스 영화였다. 그 영화는 ‘사피엔스에게 이야기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였다.

영화 "3000년의 기다림" 포스터 (제공:엔케이컨텐츠)

   알리테아(틸다 스윈튼)는 적당히 행복하게 홀로 살고 있는 서사학자(narratologist)다. 다시 말해 이야기가 그녀의 전공이란 이야기다. 어느 날 알리테아는 컨퍼런스에 참석하기 위해 튀르키예의 이스탄불로 떠난다. 

한때는 이야기가 인간의 존재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유일한 수단이었고, 계절의 변화와 자연재해 등 세상만사 또한 신들의 이야기로 설명되어 왔다는 사실을 잘 아는 그녀는 대강당에 가득 모인 사피엔스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과거에 알던 것은 신화였습니다. 지금 아는 것은 과학이라고 하고요. 조만간 인류의 창조 이야기는 과학적 서술로 교체될 겁니다. 모든 신과 괴물들은 존재 이유를 다하고 은유로 전락할 겁니다.”

강연을 마치고 나온 알리테아는 골동품상에서 호리병 하나를 사는데 그 안에는 “알라딘”에 나오는 램프의 요정 지니 같은 정령이 갇혀 있었다. 알리테아가 호리병을 닦는데 뚜껑이 빠지면서 거대한 몸집의 정령이 연기처럼 빠져나와 알리테아에게 세 가지 소원을 빌라고 말한다. 그걸 들어준 뒤에야 자신이 호리병에서 탈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알리테아가 누군던가, 이야기를 연구해온 서사학자가 아니던가. 자족적인 삶을 누리는 알리테아는 자신은 특별한 소원도 없을뿐더러, 소원을 비는 사람을 이용해 먹는 사기꾼 정령의 이야기도 많이 봤다면서 빠져나간다. 

그러자 정령은 시바 여왕을 사랑한 죄로 3000년 동안 호리병에 갇혔다 풀려났다를 반복한 자신의 기구한 사연을 털어놓는다. 정령의 이야기를 다 들은 알리테아는 마침내 소원을 빌게 되는데…
 
*   *   *

   “3000년의 기다림”이 개봉하던 바로 그 해 그 달, 지구별에서는 ‘챗GPT’라는 인공지능이 “사피엔스”이상으로 큰 화제가 되었다. 챗GPT가 최초의 퍼스널 컴퓨터(PC)나 최초의 휴대전화 컴퓨터(아이폰)이상으로 지구촌을 들썩이게 한 것은 이 A.I가 사피엔스도 아닌데 이야기를 만들어낸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것을 넘어(새나 늑대도 울음 소리로 정보를 전달한다) 허구를 짓는다는 것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를 통틀어 사피엔스만이 가진 ‘종특’이었다. 사피엔스들은 난리가 났다. 한편으로는 위협을 느꼈고 한편으로는 동족을 만난 것 같은 반가움이 교차하면서 묘한 감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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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와 교수, 공무원, 소설가, 과학자할 것 없이 속속 일간지에 글을 써서 ‘내가 챗GPT에 뭘 물어봤더니 어떻게 답하더라’로 칼럼의 절반을 채웠다. (일부는 마땅히 원고료를 뱉어내야 할 만큼 챗GPT를 장황하게 인용했다) 유발 하라리까지 합세해 “사피엔스” 출간 10주년 기념 특별 서문을 챗GPT에 맡겼는데, 충격적인 결과물에 놀랐다고 말했다. 

그런데 사실 챗GPT는 그때 막 나온 것도 아니었다. 일부 사피엔스는 갑작스런 난리법석에 조금은 어안이 벙벙했다. 챗GPT의 이야기가 진짜 이야기냐는 질문도 나왔다. 

컴퓨터공학자인 장병탁 서울대 AI연구원장은 “챗GPT가 잘하는 건 말하는 흉내를 내는 거다. 질문을 이해한다기보다 그냥 한번 말을 시작하면 다음엔 어떤 단어가 나올 확률이 얼마인지를 학습해서 단어를 계속 던지는 거다. 글자만으로 학습했기 때문이다….사람을 완전히 대체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인터페이스가 잘 안 된다.”라고 한 신문(중앙일보 2월17일자)에 말했다.

언어학자 김성도도 일찍이 “일꾼과 이야기꾼(2022)”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인간 서사 텍스트의 규칙성뿐만 아니라 규범과 관습으로부터의 일탈성까지도 함께 포착하여 창의적 텍스트를 생산할 수 있는 알고리즘이 과연 가능할 것인가라는 궁극적 물음이 제시된다. 위대한 예술 작품과 문학작품은 역설적이게도 비규범적이고 비순응적인 본질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비평가 박권일은 한겨레에 이렇게 기고했다. “이미 인류는 대부분의 시간을 콘텐츠를 가장한 광고, 혐오 선동, 포르노 등 온갖 주목 경쟁에 ‘낚이는(hooked)’데 보낸다. 그나마 어떤 주제를 직접 고민하고 스스로 공부하던 우리의 짧은 시간마저 인공지능에 몽땅 넘겨버리고 나면, 깊이 배우는(deep learning) 유일한 존재는 기계가 될 터다. 그게 바로 정치의 종말이고 인간이라는 종(사피엔스-필자)의 마지막 모습일 것이다.”
 
*   *   *

   “3000년의 기다림”의 엔딩에서 정령은 말한다. 인류는 수수께끼라고...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면서도 최선을 다해 지능을 발휘한다고... 그건 정말 대단한 이.야.기.라고. (사피엔스가) 어떻게 흘러갈지 궁금하다고… 
 
정령: “흙의 피조물(사피엔스)들은 정령과 천사의 힘과 목적조차 무색하게 하는 존재죠. 당신들은 우리가 필요 없습니다. 우리는 소멸하거나…
알테이아: 소멸하거나 사라질거라구요? 물론 저는 그 주제로 강의도 하고 논문도 많이 썼어요.
정령: 압니다.
알테이아: 그런데 말이죠. 당신이 지금 여기 있잖아요. (and yet here you are)

물론 신화와 전설은 과학에 자리를 내주었다. 그러나 과.학.도. 이.야.기.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는 이렇게 시작한다. 

‘약 135억 년 전 빅뱅이라는 사건이 일어나 물질과 에너지, 시간과 공간이 존재하게 되었다. 우주의 이런 근본적 특징을 다루는 이.야.기.를 우리는 물리학이라고 부른다.’ 

물리학은 수학이라는 언어로 쓰인 이야기다. 이야기는 사피엔스의 DNA다. “3000년의 기다림”이 나온 이듬해 “매드맥스:분노의 도로” 프리퀄에 해당하는 “퓨리오사”가 개봉했다. '이야기꾼' 조지 밀러가 79세된 해였다. 영화가 개봉하기도 전부터 사피엔스들은 “매드맥스” 이야기가 어디까지 이어질지 궁금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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