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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제2의 바다이야기…변종 홀덤펍 기승

도박 중독자 양산하는데 단속 기관은 서로 떠넘기기만


▲ 거액 상금을 내걸고 도박 중독자를 양산하고 있는 변종 홀덤펍을 비디오머그에서 잠입 취재했다.
 
지난 3일 서울 강남구 한 호텔. 'ㅇㅇ카지노 바'라고 이름 붙은 맨 위층에 올라가니 200평 남짓한 공간에 라스베이거스에서나 보던 카지노 테이블이 빽빽하다. 20~30대로 보이는 젊은이 100여 명이 북적이고 있다. 간간이 머리 희끗한 장년층도 보인다. 카드게임의 일종인 텍사스 홀덤을 하러 모인 사람들이다.

업소 곳곳에 설치된 모니터엔 "페이-아웃 이벤트"가 진행 중이라고 씌어 있다. 우승 시 '현금'을 준다는 뜻의 은어다. 업주는 이날 노골적으로 '총상금 4,000만 원'을 내걸고 참가자를 모집했다. "운이 좋아 1등 하면 얼마를 버느냐" 물었더니 업주는 "1,300만 원, 계좌로 쏴 드린다"고 호언했다. 옆에 있던 다른 직원은 한술 더 떠 "현금을 원하시면 (주변 ATM기) 돌아서 다 뽑아 드린다"며 참가를 독려했다.

이날 한 판 참가에 드는 돈은 현금 30만 원. 처음 받은 칩을 다 써도 다시 참가가 가능해 사실상 판돈이 무제한이다. "한 사람당 두세 번씩 베팅하는 건 일쑤"라고 한 참가자는 전했다. 밤새 진행된 이날 홀덤 판에 모두 252명이 끼었다. 한 사람당 30만 원씩 딱 한 번 베팅했다고 쳐도 하룻밤 새 7,560만 원의 판돈이 세금도 없이 오간 셈이다. 카지노처럼 변질돼 버린 '변종 홀덤펍' 풍경이다.
 
노동규 취재파일
▲한 판 참가에 30만 원이 든다. 칩이 떨어져도 다시 참가할 수 있어 사실상 무제한 베팅이 가능하다.
  

현금화 가능한 '게임 참가권'…제2의 바다이야기?

 
돈 놓고 돈 먹기니 불법 도박 혐의가 짙다. 하지만 업주는 "불법이 아니다"고 강변한다. "장소만 제공했을 뿐 현금을 받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이게 무슨 소리일까. 업주 바로 앞에서 현금을 받고 '게임 참가권'을 내준 사람이 "나와 아무 관계없는 사람"이란 것이다. 어디서 많이 본 구조 아닌가? 2000년대 중반 나라를 어지럽힌 바다이야기와 유사하다. 당시 바다이야기 역시 상품권 주던 오락실 따로, 상품권 환전하던 환전상 따로 있었다.

이렇게 된 '배후'엔 거액 상금을 내건 변종 홀덤 업체들이 있다. 이들은 순수한 "마인드 스포츠 대회" 개최사로 포장해 대회를 주관한다. 연예인을 홍보 모델로 내세우기도 한다. 다음 달 서울 유명 호텔서 '3월 최종전'을 벌인다는 한 업체는 총상금으로 18억 5,000여만 원을 제시했을 정도다. 이들은 자신들이 개최하는 '상금 달린 큰 대회 참가권'을 '시드권'이라 이름 붙여 유통하고 있다.

텔레그램과 카카오톡 오픈채팅방 등지에선 이 시드권이 은밀하게 거래되고 있다. 사실상 현금 노릇을 하는 것이다. 이런 시장이 있는 덕분에 변종 홀덤 업체들과 제휴한 동네 홀덤펍들은 '시드권 몇 장'을 참가비용으로 해 '시드권 몇 십·몇 백 장'을 상품으로 내건 판을 벌이기도 한다. 홀덤펍 업주 입장에선 하룻밤 홀덤판을 벌인다 하면 임대료와 인건비, 에너지비 등 필수 비용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판을 찾는 참가자들은 오로지 종이 몇 장을 들고 와 참가하고 종이 몇 장을 받아간다? 얼핏 지속가능하지 않을 것 같은 구조가 가능해진 것이다.

검찰 강력부장 시절 도박 수사 경험이 많은 김현수 변호사(법무법인 로고스)는 이 같은 구조를 딱 잘라 "도박"이라고 규정했다. "게임에 이기면 현금 꽂아준다 하는 곳은 물어볼 것도 없이 도박"이고, 현금이 아니더라도 "시드권이 현금으로 교환 가능한 상황이니 참가자들은 '돈 벌 수 있다'는 기대로 참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 변호사는 "시드권이 현금 교환이 되게끔 만들어진 상황이 자연발생적이지 않을 것"이라고 수사 필요성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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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사 시절 도박 수사 경험이 많은 김현수 변호사는 "참가권이 현금으로 교환 가능해진 상황이 자연발생적이지 않을 것"이라며 수사 필요성을 역설했다.
 

책임 떠넘기는 지자체·경찰·사감위…늘어나는 중독자

 
하지만 단속은 잘 이뤄지지 않고 있다. 단속 주체부터가 모호하다. 홀덤 펍 또는 홀덤 바, 카지노 펍이나 카지노 바 등 내 건 간판은 다 달라도 일반음식점이나 자유업으로 신고한 업소가 대부분이다. 지자체 위생 관련 부서가 담당하는 게 보통인데 도박 증거를 잡아내기엔 역부족이다. 강남구청 위생과 관계자는 "관련 민원이 들어오는 게 너무 많지만 일일이 나가 볼 수가 없다"고 말했다.

카지노 등 사행행위를 단속하는 국무총리실 산하 사행산업통합감독위원회(사감위)는 "업무범위 밖"이라는 입장이다. 변종 홀덤펍은 법대로 등록한 '사행산업'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감위 관계자는 "불법 홀덤펍이 늘어나고 있는 건 인지하고 있지만 형법상 도박에 들어가는 사항이라 경찰이 단속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작 경찰은 "일반음식점으로 등록했으니 1차적으로 지자체 관할"이라고 여긴다. 국가수사본부 형사국 관계자는 "신고 들어온 사건 위주로 하는 게 우선이고, 조직폭력배가 운영하거나 하지 않는 이상 특별히 먼저 들여다보고 있진 않다"고 말했다.

이렇게 정부 기관과 지자체가 단속에 손 놓은 사이 변종 홀덤에 빠진 도박 중독자는 늘어나고 있다. 도박 중독을 치유하는 '한국단도박모임' 사무국장은 "요새 홀덤바 때문에 상담 전화가 자주 온다"며 "최근 한두 달 사이에만 열 명 정도는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연령별로는 20~30대가 가장 많다고 했다. 기자가 만난 30대 불법 홀덤 중독자는 "같은 테이블에 있던 남자 집에서 '아이가 아프다'는 전화가 걸려 왔는데 '지금 일 하고 있는 중이니 당신이 응급실 데려가라'며 계속 게임에 몰두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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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단도박모임 사무국장은 "최근 한두 달 사이에만 열 명 정도가 홀덤 중독 상담 전화를 걸어 왔다"고 말했다.
 

변종 홀덤펍 전국 2,000곳 추정…하루 최소 판돈 30억 원

 
업계는 도박 중독자까지 양산하고 있는 불법 변종 홀덤펍이 전국에 2,000곳이 넘는다고 추정한다. 판돈 5만 원에 30명씩 참가한다고만 낮춰 잡아도 하루에 오가는 돈이 최소 30억 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보수적인 계산이 이렇다.

음료와 음식을 팔며 간단한 여흥으로 홀덤 게임을 제공하던 기존 건전 홀덤펍들 마저 불법 변종화 유혹에 빠지는 실정이다. 서울 종로구에서 홀덤펍을 운영하는 오세경 씨는 "심리 게임으로서 매력을 가진 홀덤이 건전한 산업으로 커 갈 수 있는데 불법 업소들 때문에 사회적 시선이 안 좋아지고 법적으로 보호 못 받는 상황으로 갈까봐 우려가 크다"고 말했다.

최근 국회에선 홀덤펍을 '유사 사행행위'로 규정해 사감위가 감독하도록 하는 법 개정안이 발의됐다. 이 법을 발의한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이병훈 의원은 "바둑과 체스 같은 건전한 여가문화로 발전할 수 있는 카드 게임이 불법 변칙 영업으로 인해 도박으로 낙인찍히는 상황"이라며 "법안의 조속한 통과는 물론 문화체육관광부와 경찰, 방송통신위원회 등 관련 기관의 유기적인 협력 체계 구축을 위한 국회 차원의 노력을 계속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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