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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멘터리] 바빌론, 화려하고 쓸쓸한 브래드 피트의 뒷모습

이주형 기자의 씨네멘터리 #62

“끝난 사람”이라는 일본 소설이 있다. 주인공 다시로 소스케는 도쿄대 법대를 나온 엘리트다. 대형 은행에서 잘 나가던 그는 임원 승진에서 미끄러진 뒤 자회사로 가서 정년 퇴임하게 된다. 정년 퇴직을 ‘생전 장례식’으로 여기는 그는, 자신을 사회적으로 ‘끝난 사람’ 취급하는 주변의 시선이 괴롭다. 

일본에서 베스트셀러에 올랐던 이 소설을 “링”의 나카다 히데오 감독이 2018년에 영화로 만들었다. 타치 히로시가 퇴직한 남자의 심정을 실감나게 연기해 42회 몬트리올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았고, 일본의 국민 여동생이었고 한국에도 팬이 많은 히로스에 료코도 나온다. 소설과 영화 둘 다 보았는데, 사실 책이 훨씬 재미있다. 남의 일 같지 않은 ‘끝난 사람’의 심정을 때로는 가슴이 뜨끔하도록, 때로는 눈물이 찔끔나도록 유머와 페이소스를 섞어 적나라하게 펼쳐 놓았기 때문이다.

지난 주 개봉한 영화 “바빌론”은 ‘끝난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다만 이 영화는 그것을 지극한 영화적 화려함 속에 감추어 놓았다.

"바빌론"에서 무성영화 스타역을 맡은 브래드 피트 (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라라랜드” 데미언 셔젤 감독의 신작 “바빌론”의 주연인 브래드 피트도 어느덧 올해로 환갑이다. 꼭 30년 전, “흐르는 강물처럼(1993)”에서 플라이 낚시줄을 던지던, 영원히 늙지 않을 것 같던 미청년도 이제 할리우드의 올드스쿨이다. 그도 이제 ‘끝난 사람’일까? 

“바빌론”은 “라라랜드”에서 시간을 한참 더 거슬러 올라간다. 1920년대, 이번에도 역시 할리우드. 

무성 영화 대스타인 잭 콘래드(브래드 피트)는 영화 두 편이 잇달아 실패하자 위기 의식을 느낀다. 큰 맘 먹고 막 도입된 신문물인 유성 영화에 출연하지만 스크린에서 그의 목소리를 처음 들은 관객들의 비웃음만 사고 만다. 이 광경을 커튼 뒤에서 두 눈으로 확인하고 씁쓸하게 극장을 빠져나오는 잭. 

설상가상으로 20년 동안 자신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온 연예 칼럼니스트 엘리노어조차 ‘잭 콘래드는 이제 끝났나?’라는 제목의 칼럼을 내놓는다. 이를 보자마자 잭은 단걸음에 엘리노어의 사무실로 쳐들어간다.

“내가 LA로 왔을 때 집집마다 대문에 뭐라고 써붙여 놨는지 알아? ‘개와 영화 배우 출입금지’였어. 그걸 바꾼 사람이 나고, 할리우드를 일으켜 세운 사람이 바로 나야. 당신, 왜 그렇게 썼어?”

잠깐 뜸을 들인 엘리노어는 대답한다. 당신이 진짜 알고 싶은 건 내가 왜 기사를 그렇게 썼는지가 아니라, 관객들이 왜 당신의 연기를 보고 비웃었는지가 아니냐고. 할리우드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 칼럼니스트는 이어서 잭의 폐부를 찌른다.

“이유는 없어(There is no why). 그래서 당신이 할 수 있는 것도 없어. 그냥 당신의 시대가 간 것일 뿐이야.” 

"바빌론"도입부 할리우드 '대환장'파티 (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바빌론”은 영화 역사가 무성 영화(silent film)에서 유성 영화(talkie)로 넘어가는 중요한 시기를 그린다. 당시는 할리우드에 자유의 기운이 넘쳐 흐르던 시대이기도 했지만, 술과 마약과 섹스가 범람하던 타락과 방종의 시대이기도 했다. 

영미권 언론의 “바빌론” 리뷰들에는 ‘아찔한(dizzying)’, ‘방탕(debauchery)’, ‘과도(excess)’, ‘주지육림의(orgiastic)’, ‘광란(frenzy)’같은 표현들이 거의 빠짐없이 등장한다. 이미지든 소리든 이 영화는 모든 것이 과잉이다. 

술과 마약에 취한 인간이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쾌락적 행위가 배설물과 토사물과 뒤섞여(은유적 표현이 아니다. 마고 로비의 오바이트 장면은 압권) 젖과 꿀처럼 흐른다. “뉴요커”지가 “얼마나 많아야 너무 많은 걸까(How much is too much?)”라는 의문문으로 “바빌론” 리뷰 기사를 시작할 정도다.

상당한 시대 고증을 거쳤다는 “바빌론”을 통해 본 영화 산업의 초기의 모습은 제 정신으로는 도저히 버틸 수 없을 것 같은 현장이다. 임금을 올려달라며 손을 놓은 엑스트라들을 총으로 위협해서 전투씬을 찍는가 하면, 석양을 배경으로 대규모 부감 전투씬을 찍어야하는 감독은 해는 넘어가는데 카메라가 도착하지 않자 정신이 나가기 일보 직전이다. 유성 영화 시대 초기라서 방음 부스에 들어가 영화를 찍던 촬영 감독은 질식사하고 만다.

이 영화 속의 영화에서도 주연 배우인 브래드 피트와 마고 로비 등이 주인공이지만, 이들 외에도 연예 칼럼니스트, 연주자, 감독, 엑스트라, 제작자, 카메라 대여업자, 짐꾼까지 영화와 관련된 모든 직업인들이 3시간9분 동안 “바빌론”을 빼곡히 채운다.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사실 영화 그 자체다. 

저스틴 허위츠의 음악은 "바빌론"의 기둥이다 (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3시간 넘게 산만하고 정신없이 달려가는 이 영화를 일이관지(一以貫之)하는 것은 저스틴 허위츠의 오리지널 스코어들이다. “라라랜드”에 이어 두 번째 아카데미 음악상에 도전하는 저스틴 허위츠의 작업실은 감독인 데이언 셔젤의 작업실 바로 옆 방이다. 편집본을 계속 들여다보면서 음악 작업을 할 수 있다는 얘기다. 저스틴 허위츠의 하버드대 룸메였던 데이먼 셔젤은 음악에 맞춰서 편집을 바꿀 정도로 음악을 존중하는 감독이다.

그래서 그런지 “바빌론”은 영화에 음악을 깐 것이 아니라 음악에 영상을 붙인 것 같다. 단언컨대 “바빌론”의 음악만 따로 들을 수는 있어도(지금 그렇게 하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음악없이 “바빌론”을 볼 수는 없다. “바빌론”이야말로 진정한 유성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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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나는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영화 그 자체라고 말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바빌론”은 마지막에 이 영화의 가장 문제적 장면을 등장시킨다.  

‘영화사랑 몽타주(BBC)’, ‘오스카 스타일 몽타주(인디펜던트)’, ‘영화의 일생(감독 본인)’이라 불린 엔딩 시퀀스에서는 “달세계 여행”, “안달루시아의 개”, “오즈의 마법사”, “벤허”같은 고전 영화부터 “터미네이터2”, “매트릭스”, “아바타”에 이르기까지 영화 예술 백여 년 역사의 명장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데미언 셔젤의 야심과 영화에 대한 애정이 넘쳐 나는 “바빌론”의 엔딩에 대해 많은 평론가들이 ‘셔젤 경력 중 가장 잘못한 부분(falsest material in Chazelle’s career-로저에버트닷컴)’, ‘제대로 오판한(wildly misjudged-인디펜던트)’이라는 등의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실제로 이 장면은 영화 전체로 보면 튀어도 너무 튄다. 하지만 나는 싫지 않았다. 좋았다. 내가 젊은 시절 보았던 영화들이 스크린을 초단위로 지나갈 때 내 인생이 지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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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D)
당신의 시대는 끝났다는 엘리노어의 ‘팩폭’에도 잭은 냉정함을 유지한다. 엘리노어는 잭을 응시하면서 천천히 그에게 다가간다. 그리고 조금 전보다 훨씬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한다. 

“끝났다는 걸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거 알아. 누구도 뒤에 남고 싶어하지 않을테니까. 하지만 백 년뒤에 당신과 내가 이미 세상을 떠났을 때, 누군가 언제라도 당신의 영화 필름을 영사기에 걸면 당신은 다시 살아나는거야.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 ...(중략)...

“50년 뒤에 태어난 아이가 스크린에서 반짝이는 당신의 이미지를 우연히 보고 당신을 친구처럼 느끼게 될거야. 그 애는 비록 당신이 마지막 숨을 쉴 때 첫 숨조차 쉬지 않았지만 말이야. 당신은 재능을 타고 났어. 감사하게 생각해. 당신의 시대는 갔지만 당신은 천사와 유령들과 함께 영생을 사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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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은 안 늙었구나…”

최근 화제 속에 상영 중인 “슬램덩크”를 본 어느 영화팬의 가슴 찡한 한줄평이다. 우리는 늙어가지만, 그리고 배우들도 늙어가지만, 우리가 젊었을 때 본 영화 속의 배우들은 영원히 그 모습 그대로다. 제임스 딘과 장국영이 ‘영원한 젊음(forever young)’이듯 말이다. 영화는 우리 대신 젊음을 살아간다. ‘끝난 영화’는 없다.

“라라랜드(2016)”에서 이미 과거의 할리우드를 향한 애정을 드러내며 갓 서른 넘은 나이에 화려한 오스카 마수걸이를 했던 데미언 셔젤은 이번엔 작정한듯 과유불급(過猶不及)의 영화를 만들어냈다. 평가도 “라라랜드”에는 못 미치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35mm 코닥 필름으로 찍은 이 '과유불급'에 매혹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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