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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4천 달러를 주고 탈출 버스에 오르다"

우크라이나에서 만난 사람 2. '헤르손 탈출 시민' 알로나

[취재파일] "4천 달러를 주고 탈출 버스에 오르다"
우크라이나 키이우에서 '헤르손에서 탈출해온 피란민' 알로나 씨를 만났습니다. 그는 러시아군과 줄이 닿아 있는 브로커에게 4천 달러, 우리 돈 500여만 원을 준 뒤, 14살 아들, 남편과 함께 '헤르손 탈출 버스'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4천 달러는 우크라이나의 평범한 직장인 연봉과 맞먹는 큰돈이지만, 아들을 위해 탈출을 결심했다고 했습니다. 다음은 그가 들려준 탈출기입니다.

알로나/헤르손 탈출 시민, 인터뷰

# '심장이 터질 듯한 공포' 헤르손 탈출기


'탈출 버스'로 불리는 작은 버스를 타고 지난 6월 헤르손시를 탈출했습니다. 같은 버스에 다른 사람들도 여럿 타고 있었는데, 그들이 얼마를 줬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남편, 아들과 함께 버스를 타고 싶다고 하자 브로커는 4천 달러를 가져오라고 했고, 우리는 그 돈을 건넨 뒤 버스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헤르손을 벗어나 우크라이나군이 통제하는 지역에 도착할 때까지 수십 개의 검문소를 거쳐야 했는데, 그곳을 지날 때마다 정말 심장이 터지는 것 같았어요. 러시아군이 우리에게 어떤 질문을 할지, 무엇을 요구할지 전혀 예측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죠. 러시아군이 당장이라도 차에 올라 '당신은 이곳을 통과할 수 없다. 돌아가라'는 말을 할까 봐 공포에 떨었습니다.

각 검문소에 도착할 때마다 운전기사가 검문소를 지키는 러시아군과 따로 얘기를 나눴는데, 무슨 대화를 하는지 돈을 건넸는지 그런 건 우리로서는 알 수 없었어요. 다만 탈출 버스를 운행하는 사람들은 러시아군과 줄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알려져 있죠. 그런 점을 알고 있음에도 검문소를 통과할 때마다 겁에 질리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 "러시아군 시신이 버려진 불붙은 차가 내 앞에 멈춰 섰다"


4천 달러는 큰돈이지만, 그래도 탈출을 결심할 수밖에 없었어요. 나와 아들의 목숨이 걸린 일이었으니까요. 러시아군이 헤르손을 점령한 뒤 그곳에서 보낸 100일은 악몽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당시의 불안과 공포를 결코 잊지 못할 거예요.

시내에서 러시아군을 처음 본 건 3월 1일이었습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거리에서 Z 로고가 선명하게 새겨진 불붙은 차를 봤어요. 운전자가 없는 상태에서 그 차가 제게로 다가오고 있었는데, 순간 너무 놀라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차는 제 바로 앞에서 겨우 멈춰 섰고, 안에는 불붙은 러시아군의 시신 일부가 있었어요. 불탄 차는 이후에도 한 달 넘게 치워지지 않은 채 거리 그곳에 방치돼 있었습니다.

러시아군에 의해 점령된 헤르손에서 가장 크게 느낀 감정은 '두려움'이었어요. 아침에 일어나면 언제 바깥에 나가도 되는지, 나가서 먹을 거라도 사올 수 있을지 매일 두려움 속에 생각해야 했습니다. 밤마다 상공에서 무엇인가 폭발하는 소리도 들렸죠. 헤르손을 점령한 러시아군과 이곳을 탈환하려는 우크라이나군 사이 교전이 매우 치열했거든요. 거리에 나가면 무기를 든 러시아 군인들이 주변을 서성이고 있었고, 그게 헤르손의 일상이 됐죠.


알로나/헤르손 탈출 시민, 인터뷰

# "러시아 학교에 아이를 보내지 않으면 양육권을 빼앗는다 했다"


지방정부(**점령국 러시아가 임명한 친러 성향 지방정부)가 러시아 학교에 아이를 보내지 않으면 양육권을 빼앗을 거라고 해 무서웠어요. 이런 환경에 익숙해져야 했지만 도저히 그렇게 되지 않았고, 결국 우리가 고향을 떠나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됐습니다.

우크라이나가 헤르손시를 탈환했지만, 아직 집으로 돌아갈 엄두는 나지 않습니다. 살던 집이 부서지고 도시 인프라가 파괴된 점도 귀향을 어렵게 만드는 점이지만, 그보다는 매일 포격이 이어지고 있다는 점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직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쟁이 우리 삶의 많은 것을 앗아가버렸어요.

# 사진과 함께 사라진 한평생 삶의 터전


고향에서 찍은 사진이나 영상이 있는지 묻자, 알로나 씨는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담담하게 말했습니다. 그는 헤르손 탈출 버스에 오르기 전 자신의 휴대전화에서 모든 정보를 삭제했다고 했습니다. 사진과 동영상은 물론이고 SNS에 올린 모든 자료를 삭제했습니다.

그의 일상 속 사진이나 영상, 무심코 올린 글에서 러시아군이 의심스럽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을 발견할 경우, 그와 가족에게 화가 미칠 거란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탈출 시도가 무산되는 건 물론 죽음도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사라진 휴대전화 속 사진들처럼, 그의 한평생 삶의 터전도 지금은 파괴되고 지워졌습니다. 하지만 알로나 씨는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포성이 멈춘 고향으로 돌아가 파괴된 삶을 재건하는 일. 다른 많은 우크라이나 피란민들처럼, 그에게도 간절한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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