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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멘터리] 다시 돌아온 '마라도나의 시간'

이주형 기자의 씨네멘터리 #52

     4년의 기다림, 월드컵이 시작됐습니다. 한국팀의 첫 경기는 격세지감을 느끼게 합니다. 남미의 강호 우루과이가 ‘뻥 축구’를 하다니요. 과거에 후방에서 불안하게 공을 돌리다 전방으로 뻥 차 넣거나, 측면 ‘치달’에 이은 센터링에 의존하던 단순한 축구를 하던 게 누구였던가요. 유럽 출신의 한국 축구 대표팀 최장수 감독과 손흥민을 비롯한 유럽 리그 주전 선수가 포진한 한국팀은 결과와 무관하게 축구를 이해하며 뛴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사실 이해한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지요. 어떤 것을 이해하고 그것을 체화하는 수준까지 나아가야 가능한 것이 프로의 세계니까요. 게다가 매 순간 순간 팀 스포츠인 축구는 11명이 유기적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한국 축구의 수준은 진일보했음에 분명합니다. 

  카타르 월드컵 개막 직전인 지난 18일, 영국에서는 축구공 한 개가 경매에 나와 31억 원에 낙찰됐습니다. 월드컵 역사상 최악의 순간과 최고의 순간에 사용된 축구공이었습니다. 최악의 순간은 바로 1986년 멕시코 월드컵 8강전 아르헨티나 대 잉글랜드전 후반 6분이었습니다. 이른바 ‘신의 손’에 맞은 볼이 잉글랜드 골망을 흔들었습니다. 최고의 순간은 불과 4분 뒤 찾아왔습니다. 중앙선 부근부터 60미터 드리블로 수비수 5명을 제치고 넣은 월드컵 사상 최고의 골이었습니다. 두 골의 주인공은 잘 아시는 것처럼 ’축구의 신’ 마라도나.(그렇다면 ‘신의 손’이 맞긴 하네요) 멕시코 월드컵은 사실상 마라도나로 시작해 마라도나로 끝난 ‘마라도나 월드컵’이었습니다. 그래서 세계의 축구팬들은 자국팀의 승부도 승부지만, 매 4년마다 마치 고도를 기다리듯 다시 한 번, 누군가에 의한 '마라도나의 시간'을 기다립니다. 월드컵을 맞아 마라도나를 다룬 영화 “디에고”(웨이브, 애플TV, 네이버 시리즈온)를 꺼내 봅니다. 

디에고

     사람은 과연 어느 정도까지 자신을 향한 열광과 기대, 칭찬과 환호에 감당할 수 있을까요? 다큐멘터리 영화 “디에고”는 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2016년 “에이미”로 아카데미 장편 다큐멘터리상을 받은 아시프 카파디아 감독의 이른바 '천재 3부작'(“세나:F1의 신화”, “에이미”, “디에고”)의 마지막 작품입니다. 

"제가 한 게 아니라 신(神)이 한 거예요." 

영화를 보니 마라도나는 멕시코 월드컵 8강전 '신의 손' 논란 이전에도 어느 인터뷰에서 이미 자신의 능력과 관련해 신(神)을 언급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신의 손’이 갑자기 나온 말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어쩌면 마라도나는 갑자기 튀어나오는 천재성과 신기(神氣)에 스스로도 놀라 어떤 순간에는 자신이 신의 현현(顯現)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그렇게 믿지 않았다면 그 영욕의 삶을 버텨낼 수 있었을까요. 
  1984년, 바르셀로나에서 이적한 마라도나가 몸담았던 나폴리 사람들에게 마라도나는 구세'주'였습니다. (한국팀 부동의 센터백 김민재 선수가 지금 이곳에서 뛰고 있습니다) 이탈리아 남부 도시 나폴리는 세계 3대 미항이라는 명성과 달리 이탈리아에서 가장 가난하고 더러운 도시였습니다. 유벤투스 팬들이 이런 응원가를 부를 정도로 부유한 중북부 도시 사람들의 조롱과 모욕의 대상이었죠. 

“개들도 뛴다. 나폴리인들이 온다. 지진의 제물. 절대 씻지도 않지. 나폴리 쓰레기. 이탈리아 전체의 수치. 나폴리인들아 열심히 일해라. 마라도나를 위해 몸을 팔아야 할 테니” (1985년 11월 3일, 나폴리 VS 유벤투스 전)

당시 나폴리는 리그 중하위권을 맴돌던 팀. 마라도나는 이적 다음 시즌 팀을 3위로 끌어올리더니 86-87시즌에는 세리에A 리그 우승을, 88-89시즌에는 팀 역사상 최초로 UEFA컵 우승까지 안깁니다. 영화를 보면서도 믿기 어려웠지만 거의 마라도나 혼자 '멱살 잡고 끌고 간' 결과였습니다(이 점에서 마라도나는 펠레, 메시, 호날두처럼 빅클럽에서 팀 동료들의 지원을 충분히 받은 스타 선수와 비교되기도 합니다). 이탈리아 북부 도시들에게 업신여김과 설움을 당하던 나폴리는 글자 그대로 뒤집어졌습니다. 마라도나는 '축구의 신'이 아니라 그냥 ‘신’이 되었습니다. 물론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우승을 안긴 그의 조국 아르헨티나에서도 말할 나위가 없었죠(실제로 '마라도나교'가 존재합니다).

나폴리에 입단하는 마라도나 (영화 "디에고" 중)
바로 거기서부터 마라도나의 몰락이 본격화합니다. 그를 향한 찬양과 숭배는 마라도나의 모든 것을 덮어버렸습니다. 집 밖으로 나다닐 수도 없는 마라도나는 더 이상 이성을 가지고 세상을 살기 힘들었습니다. 우상으로서 대중의 기대를 충족시켜줘야 한다는 압박, 모든 면에서 항상 기대 이상을 보여줘야 한다는 압박… 마라도나가 받은 찬사와 환대만큼이나 그가 느꼈을 정신적 압박은 저로서는 상상하기조차 힘듭니다. 마라도나의 내면 아이인 디에고는 방황을 시작합니다. 술, 마약, 여자 문제를 잇따라 일으키며 디에고와 마라도나는 점점 더 사이가 멀어집니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부에노스아이레스 빈민가 7남매 중 장남이었던 그는 15살 때부터 가장 노릇을 해야 했습니다. 그의 개인 트레이너였던 페르난도 시뇨리니는 말합니다.
"그에겐 디에고와 마라도나 두 개의 자아가 있었죠. 디에고가 자신은 없지만 훌륭한 소년이라면 마라도나는 축구산업과 미디어의 요구에 부응하고자 스스로 만들어낸 인물이었죠. 그래서 그는 약점을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에게 말했죠. 디에고와는 끝까지 가겠지만 마라도나와는 그러지 않을 거라고. 그러자 그가 말했어요. 하지만 마라도나가 없었다면 난 여전히 빈민가에 있었을 걸." 

이 영화의 원제는 그래서 “디에고 마라도나”입니다. (타이틀이 뜨는 화면에서 '디에고'와 '마라도나'의 폰트 색깔이 다릅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한국에서는 “디에고”라는 제목으로 개봉했습니다) 1989년 UEFA컵 우승 후 마라도나는 나폴리를 떠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나폴리 구단주가 놓아주지 않죠.
"하라면 해야죠." 담백하게 내뱉는 그의 덤덤한 얼굴이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마라도나는, 그리고 그의 ‘내면 아이’ 디에고는 신(神)의 위치에서 내려오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뭇 사람들은 그를 계속 신의 위치에 두고 즐기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디에고가 아닌 마라도나만을 원했던 거지요. 이럴 땐 대중이 신(神)입니다. 

마라도나는 초인적인 능력으로 나폴리에 리그 두 번째 우승을 선사하지만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준결승전에서 아르헨티나 국가대표로 뛰면서 얄궂게도 나폴리 홈구장에서 이탈리아 국가대표팀과 맞붙습니다. 이 경기가 아르헨티나의 승리로 끝나자 이탈리아의 미디어와 사법당국, 세무당국 모두가 마라도나에게 등을 돌립니다. 물론 마라도나의 잘못도 있지만 그전까지만 해도 다들 애써 눈감아주던 것들이었습니다. 마라도나는 하루아침에 인간계로 추방돼 악동으로 망가져 갑니다. 마라도나가 신이 됨으로써, 다시 말해 넘을 수 없는 선을 넘어섬으로써 분노한 신이 그를 파멸로 몰고 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축구선수로서는 신이었으나, 그라운드 밖의 세상에서 홀로 남겨질 때는 인간일 뿐이었습니다. 

1991년 4월 26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마라도나가 코카인 소지로 체포당하고 있다 (영화 "디에고" 중)
최근 연예인이나 유명인, 정치인들의 사례에서 보듯이 특정 대상을 향한 너무 큰 기대와 열광, 추앙은 서로에게 압박이 되고, 배신이 되고, 반감이 되고, 왜곡이 돼서 돌아오곤 합니다. 특히 전에는 유명인과 팬, 지지자 사이를 미디어가 이어줬다면 지금은 소셜미디어의 범람으로 유명인과 팬이 'D2C'(Direct to Consumer) 관계가 되어 훨씬 더 직접적으로 만나게 되면서 긍정과 부정, 양쪽의 진폭과 극단성은 더 커진 것 같습니다. '디에고’와 ‘마라도나'에서 보듯이 자기 자신과도 소통이 막히기도 하고 자아가 분열하기도 하는데 나와 남 사이는 결코 팬과 스타, 우상과 지지자라는 관계로 무균질화하거나 단순화할 수 있는 게 아닐 겁니다. 영화에서 마라도나의 여동생은 말합니다. "오빠는 열다섯 살 이후로 자기 인생이 없었어요. 그의 삶은 대단한 동시에 끔찍했죠." 

지나친 기대는 대개 결핍 욕구에서 비롯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음이 편해지려면 다른 사람은 물론 자신에게도 지나친 기대를 걸지 말아야 한다네요. 심리 치료에서는 자기 보상을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데, 많은 사람이 타인이 자기를 행복하게 해주지 않는다고 우울해하지만 사실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가장 가까운 사람은 바로 자신이라고요. 인간은 마치 식물처럼 사랑을 받지 못하면 시름시름 말라가는 존재지만, 불특정 다수의 과도한 사랑에도, 자기 자신을 향한 과도한 기대에도 시들어 가기 마련입니다. 마라도나가 잘 나갈수록 힘들었을 내면 아이 디에고. 천진한 디에고와 악동 마라도나, 그 두 사람이 하늘나라에서는 다시 손을 맞잡고 편안하게 쉴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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