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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멘터리] '우영우'와 '오징어게임'의 갈림길에서

이주형 기자의 씨네멘터리 #41

[씨네멘터리] '우영우'와 '오징어게임'의 갈림길에서
     영상콘텐츠업계에서 소리 없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최근 몇 년 사이 한국 영화나 드라마가 미국 콘텐츠의 대안으로서 흥행과 비평 양면에서 크게 성공하자 그 과실을 놓고 벌어지는 ‘내 몫 찾기’는 더 치열해지고 있습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와 "오징어게임" 등의 히트 이면에는 수많은 갑과 을의 계약서가 숨겨져 있습니다. 계약서는 갑과 을의 힘의 크기, 즉 협상력에 따라 현행법에 의거해 쓰여집니다. 이 업계에서 영상콘텐츠가 벌어들이는 수익의 분배를 좌우할 법적 권리를 우리는 지식재산권(IP) 또는 저작권이라고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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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수요일, 영상콘텐츠업계 큰 행사들이 각각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와 국회에서 같은 시각에 열렸습니다. 먼저 DDP에서는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주관한 ‘국제방송영상마켓’이 열렸는데,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제작자가 말하는 K-콘텐츠’ 콘퍼런스에는 이 드라마를 제작한 에이스토리의 이상백 대표가 발표자로 나왔습니다.

“ENA채널을 먼저 선택했던 건 아니고요, 처음에는 넷플릭스가 방영 확정을 먼저 해줬습니다.”

그러니까 이 드라마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작품이 될 수도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이상백 대표는 넷플릭스를 통한 방영에는 합의를 하면서도 '넷플릭스 오리지널' 제안은 거절했습니다. KT계열의 ENA채널에도 방영권만 팔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I.P (Intellectual Property, 지식재산권)가 결국 저희 같은 작은 제작사들이 생존할 수 있는 중요한 토대거든요. 일반 제작사들은 외주 제작을 하기 때문에 대부분 플랫폼에다 I.P를 넘길 수밖에 없는 구조고요. I.P가 있어야지 다른 비즈니스를 할 수 있는데 이게 없으면 계속 작은 수익만 나는 하청업의 반복적인 틀에서 벗어날 수 없는 구조기 때문에 “킹덤”(에이스토리가 제작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입니다) 때도 사실은 너무 안타까웠어요.”

에이스토리는 지금 "우영우"를 웹툰으로 만들어 5개국에 수출 협상을 진행 중이고, 뮤지컬 세 편도 개발 중이라고 합니다. 이게 다 I.P를 넷플릭스나 ENA채널에 팔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지식재산권을 투자배급사나 유통사에 파는 순간, 원작에서 파생하는 모든 상품에 대한 권리도 다 넘겨주게 됩니다.
 
     그런데 “우영우”와는 다른 길을 택한(택할 수 밖에 없었던) 작품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오징어게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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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백 대표가 DDP에서 발표 중일 때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대회의실에는 한국영화감독조합(DGK) 소속 감독과 시나리오작가조합 작가 2백여 명이 모였습니다. 감독조합에 따르면 이렇게 많은 감독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은 사상 처음이라고 합니다. 그중에는 이른바 ‘천만감독’이라 불리는 “한산”의 김한민 감독, “해운대”의 윤제균 감독, “신과 함께”의 김용화 감독, “태극기 휘날리며”의 강제규 감독 등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징어게임”의 황동혁 감독도 조용히 자리를 함께 했습니다. 천만감독들이 국회에 총출동한 이유는 저작권법을 개정해 창작자들이 제대로 보상받게 해 달라고 촉구하는 토론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습니다.

8월31일 국회에서 열린 저작권법 일부 개정안 토론회 (사진=연합뉴스)
  감독들이 개정을 요구하는 저작권법 제100조입니다.

<저작권법 제100조>

① 영상제작자와 영상저작물의 제작에 협력할 것을 약정한 자가 그 영상저작물에 대하여 저작권을 취득한 경우 특약이 없는 한 그 영상저작물의 이용을 위하여 필요한 권리는 영상제작자가 이를 양도 받은 것으로 추정한다.
(밑줄은 필자)


     영화 같은 영상저작물의 경우 다양한 전문 분야의 창작자가 협업하는 공동창작물이기 때문에 이들이 일일이 각자의 의견을 모아서 플랫폼과 협상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저작권을 제작자에게 양도해서 단일한 통로로 플랫폼과의 협상력을 높여 영상저작물을 유통시키고 법적 분쟁을 최소화합니다. 이러한 양도 자체는 국제적으로도 보편적입니다. 저작권 양도 후에는 작가나 감독 같은 원천 창작자에게는 저작인격권이 보장될 뿐(아주 간단한 예시로 크레딧에 창작자를 명기하거나 뺄 수 있는 권리) 저작재산권은 귀속되지 않습니다. 특히나 미국은 투자배급사인 대형 스튜디오의 힘이 아주 막강해서 유통 단계가 아닌 창작 단계에서의 최종편집권도 스튜디오가 단호하게 행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유럽에서는 상대적으로 예술가를 존중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창작자의 저작권을 폭넓게 인정하고 창작자 보상에 대한 제도적 뒷받침도 튼튼한 편입니다. DVD나 공CD 같은 저장매체에는 복제의 가능성이 내포된 걸로 보고 판매될 때마다 일정한 저작권료를 징수해 창작자에게 일부분을 나눠줄 정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지금은 과거와 달리 스트리밍 서비스를 비롯한 각종 디지털 동영상 플랫폼들이 활성화돼 현재 작품은 물론 과거 작품까지 끊임없이 세계 어디선가 상영됩니다. 하지만 “오징어게임”처럼 대형 히트작이 나와 엄청난 수익을 벌어들이더라도 플랫폼이나(이 경우 넷플릭스) 투자배급사에 양도된 I.P 또는 저작재산권 때문에 창작자들은 손가락만 빨고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감독들이 모여서 창작자들도 추가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국내법적 근거를 마련해 달라고 촉구한 겁니다. 

  실제로 외국의 경우를 보면 봉준호 감독은 “옥자”의 작가이자 감독으로서 영화의 추가 재생에 따라 넷플릭스로부터 ‘재상영분배금’을 받습니다. 봉준호 감독이 미국작가조합과 미국감독조합 회원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박찬욱 감독은 프랑스 저작권단체로부터 ‘개인사본수당’이라는 이름의 일종의 저작권료 또는 보상금을 받고 있습니다. 다만, 창작자가 보상을 받는다는 결과는 비슷하지만 미국과 프랑스의 경우는 보상금 지급의 개념 자체는 판이합니다. 프랑스는 “저작권자가 대가를 받고 노무를 제공했다는 이유로 저작권의 향유(지적이고 정식적이며 경제적 성질)를 손상시킬 수 없다”는 프랑스 저작권법의 정신을 바탕으로 저작권 단체를 통해 창작자들에게 보상금을 분배하지만, 전술했듯이 미국은 저작권을 스튜디오가 완벽히 통제하는 대신 오랜 역사의 작가조합, 감독조합, 배우조합 등 직능별 길드가 파업권 등 노사협상력을 바탕으로 창작자에 대한 2차 시장 추가분배금 지급을 관철시켰습니다.  

     이날 창작자에 대한 보상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토론회에 나선 ‘천만 감독’들은 사실 자신들에게는 이러한 보상이 큰 의미가 있는 건 아니라고 솔직하게 털어놓았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스스로 제작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자신들도 배고픈 시절, 희망이 보이지 않던 시절, 영화감독을 ‘직업’이라고 말할 수 없던 시절을 거쳤고, 운 좋게 살아 남았기 때문에 생활고에 시달리는 대다수 후배 감독들을 위해 나설 수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윤제균 감독은 감독조합 대표이기도 하지만 이해관계가 완전히 엇갈리는 CJENM 계열사 대표이기도 합니다) 

  한국영화감독조합이 2년 전 조합원 258명과 비조합원 57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영화감독은 평균 4.5년 동안 영화 한 편의 기획부터 개봉까지 전 과정에 관여하며 평균 1,800만 원의 연봉을 받습니다. 이처럼 최저연봉에도 못 미치는 돈을 받으면서 영화 한 편 만드는데 4~5년을 매달리니 대부분의 감독들은 경력 내내 5회 이하의 계약밖에 맺지 못합니다. 자기들이 좋아서 하는 거지, 누가 시켰나? 라고 한다면 더 할 말은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예술을 만들어내고 향유하는 존재이고, 예술의 사회적 기능을 인정한다면 좋아서 하든 시켜서 하든 권리와 분배의 정의 문제는 이 직종에도 존재합니다. 

영화감독들

 또 기회를 얻기 힘든 대부분의 돈 없고 힘 없는 감독들을 위해서는 천만 감독처럼 사회적인 영향력이 있는 유명 감독들이 나서서 대신 목소리를 내줘야 상황의 진전을 볼 수 있습니다. 이날 LA에서 화상으로 참여한 박찬욱 감독은 경제적인 문제를 떠나 창작자로서 존중받고 싶다는 것도 ‘정당한 보상’을 요구하는 이유라고 밝혔습니다. 영화는 예술이고 기술이고 산업입니다. 크리에이티브한 측면도 중요하고 유통도 중요합니다. 서로가 협력해서 시장을 이끌어가는 만큼 창작자들에게도 정당한 몫을 달라는 주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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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가 아니었으면 “오징어게임”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고, 지금 같은 수준의 ‘K-콘텐츠’의 활황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오징어게임”은 국내에서 아무도 받아주지 않은 프로젝트였습니다. 황동혁 감독도 I.P를 가져 간 넷플릭스가 투자 실패의 위험을 떠안고 제작을 책임지면서 창작자인 자신은 온전히 작품에만 몰두할 수 있었고, 창작의 자유도 마음껏 누렸다고 밝혔습니다.  
  넷플릭스를 비롯한 플랫폼, 투자배급사, 제작사도 할 말은 있습니다. 위험이 큰 엔터테인먼트 상품에 투자해서 흥행 실패의 부담도 고스란히 짊어지고, 대가도 지불하고 저작권을 양도받았는데 왜 추가 보상을 요구하느냐는 겁니다. 대가의 이중 지급이라는 거지요. 그런 측면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계약이든 시간이 흐르고 상황이 바뀌면 늘 서로가 다른 조건을 탐색하기 마련입니다. 예를 들어 거꾸로 제작사나 투자사, 플랫폼이 위기에 처하면 창작자나 저작권자가 양보해야 하는 경우도 생길 수 있는 겁니다. 웹툰 ‘송곳’의 대사처럼 서는 데가 바뀌면 풍경도 달라지는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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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날 국회에서는 저작권법 일부 개정안이 38명 의원의 서명으로 발의됐습니다. 이번에 발의된 개정안은 이중 지급 아니냐는 반론을 염두에 두고 ‘제작사’가 아니라 “영상저작물을 복제·배포·방송·전송 등의 방식으로 최종적으로 공중에게 제공하는 자(‘영상물최종공급자’)가 영상저작물을 제공한 결과 발생된 수익에 대하여 정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권리(보상권)를 가진다”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한마디로 저작권료가 아니라 별도의 보상금이란 얘기이고, 제작사가 주는 것이 아니라 플랫폼이 부담한다는 말입니다. 상임위 통과는 크게 어렵지 않을 전망인데 사흘 전 정기국회가 개막했으니 빠르면 이번에 본회의 상정까지도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꽤 길게 썼는데도 미처 담지 못한 기타 국가의 사례들와 각 이해관계자들의 다양한 사정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쯤 쓰고 나니 “범죄도시”의 빌런 장첸의 목소리로 “영화 한 편 보러 왔는데 뭐 그런 거까지 알아야 되니?”라고 하는 말이 음성 지원으로 들리는 것 같네요. K-콘텐츠와 영화 시장의 이면에는 이러한 이슈와 배경들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이런 요소들은 어떤 형태로든 관객들이 보는 콘텐츠에도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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