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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문턱에 열어보는 거울 - 캐럴라인 냅 '명랑한 은둔자' [북적북적]

가을의 문턱에 열어보는 거울 - 캐럴라인 냅 '명랑한 은둔자' [북적북적]

[골룸] 북적북적 353: 가을의 문턱에 열어보는 거울 - 캐럴라인 냅 <명랑한 은둔자>
 
나는 명랑한 은둔자야.
 
해마다 느끼는 거지만, 가을이 온다는 뜻의 '처서'가 들면 "이렇게 더운데 무슨 '처서'야!" 소리가절로 나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이 '처서'를 지나면서, 정말 대기가 미묘하게 달라집니다. 더위의 두께가 얇아져 갑니다. 특히 아침저녁으로 완연히 달라지는 공기에 문득, 깨닫습니다. 이렇게 가을이 오고 있구나.

오늘의 책은 지난 2020년 국내 첫 출간 후 2년 만에 무려 14쇄를 찍는 기염을 토한 베스트셀러입니다. 이제 와서 [북적북적]에서 낭독하기 조금 겸연쩍은 면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가을의 초입에 참 잘 어울리는 책이라 더 늦기 전에 읽고 싶었습니다. 캐럴라인 냅의 [명랑한 은둔자]입니다.
 
술 없이 살아가는 일은 갈수록 쉬워진다.

그리고 살아가는 일은 갈수록 어려워진다.
 
캐럴라인 냅은 1990년대에서 200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젊은 여성 에세이스트로 명성을 날렸던 사람입니다. 자신의 알코올중독 경험과 (역시 일종의 다이어트 중독이라고 할 수 있는) 거식증 경험을 낱낱이 솔직히 드러낸 글쓰기로 큰 공감을 얻으며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습니다. 2002년 마흔 둘이라는 아까운 나이에 요절하지 않았다면, 지금도 나이와 함께 더해온 깊이가 담긴 글들로 많은 이들의 영혼을 어루만지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의 책 [명랑한 은둔자]는 혼자 사는 여성으로서 삶의 방식이 굳어져 가고 있던 그의 인생 후반부에 쓴 이런저런 에세이들이 모여 있는 책입니다.
 
수줍음 타는 사람들은 이 사실을 뼈저리게 인식하고 있다. 수줍음이 자신으로부터 많은 기회를 앗아간다는 사실, 수줍음 때문에 파티장에 들어가거나 동료들 앞에서 발표하거나 하는 간단하기 짝이 없는 일들마저 어렵게 느껴진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우리가 수줍음으로부터 개인의 책임에 관하여, 우리가 주변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관하여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고도 생각한다.
 
20여 년 전에 쓰여진 에세이들이고, 혼자 사는 여성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에세이들은 그동안에도 많이 나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자기객관성'은 오늘날까지도 유달리 빛을 발합니다.

캐럴라인 냅은 세상이 말하는 결혼적령기를 지나 혼자 사는 여성, 혼자 살면서 삶의 동반자로 그 어떤 사람보다 반려견을 더 마음 가까이 두고 있는 여성, 이른바 고기능 고학력자이면서 알코올중독으로 고생해 본 여성이라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특수한 입장을 끊임없이 파고들어 글감을 건져낸 작가였습니다. 어찌 보면 현대 도시 사회에서 이런 스타일의 삶을 이제는 꽤 일반적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아직은 '소수'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공감이 비슷한 경험으로부터 우러나오기 쉬운 것이라면, 캐럴라인은 다수의 공감을 얻기는 어려운 소재와 주제를 지독하게 파고드는 작가였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야기하는 삶의 자세, 삶의 고통, 기쁨, 슬픔, 그가 넘어졌던 찰나들과 극복해낸 순간들로부터 길어 올린 단상들은 어떤 독자에게든 가 닿을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독자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든, 들키고 싶지 않았던, 하지만 실은 누군가 알아주길 은밀히 바랐던 자기 자신의 모습을 그의 글들에서 적잖게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글들은 스스로를 들입다 파고드는 스타일의 많은 글들이 빠지기 쉬운 자기합리화나 미화, 자아도취, 자기연민을 철저히 배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샅샅이, 솔직하게 스스로를 들여다봄으로써 결국은 어떤 독자에게도 가 닿을 수 있는 객관을 달성해내는 작가의 성찰이란 이런 거구나, 새삼 생각하게 합니다. 누구라도 스스로를 비춰볼 부분이 있는 거울 같은 에세이들입니다.
 
나와 같은 입장이 된 것을 환영한다. 당신이 그동안 누리던 '부모님 은혜의 시기'가 이제 끝난 것이다. 부모님 은혜의 시기란 당신이 부모에게 복종하지 않아도 될 만큼은 나이가 들었지만 아직 부모를 걱정할 만큼은 나이가 들지 않은 시기, 그 짧은 기간을 뜻한다.
 
이런 죄책감의 일부는 이기적 충동에서 나올 것이다. 부모가 아픈 상황을 떠올리다 보면 부모가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상황이 떠오르는 법이고, 역사상 가장 오냐오냐 떠받들리며 자란 세대라고 할 수 있는 우리 세대에게는 그 상황이 그렇게 간단히 여겨지지 않는다. 솔직히 우리는 미래를 그릴 때 자신이 어떨지 상상하는 데 익숙하지, 남들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 상상하는 데는 익숙하지 않다.
 
우리는 각자의 부모에 대해서 오랫동안 남몰래 화낸다. 부모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사람이 아닌지, 우리는 그들이 어떤 사람이기를 바라는지, 우리가 어떤 실망과 단절을 겪었는지, 우리는 그들이 어떤 사람이기를 바라는지, 그들이 우리를 키운 방식이 왜 이렇게 꼬여 있었는지, 이 모두에 대해서 화낸다. 이 괴로움을 놓아버리는 일은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고, 자기 인식과 성숙함과 시간이 절묘한 비율로 섞여야 가능한 일이다.
 
집의 개념을 다시 생각해보라. 집 꾸미기는 미학적으로 만족스러운 물건들을 사들이는 일에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모호한 요소들, 즉 외로움을 견뎌보겠다고 마음먹는 일, 고독 속에서 행복하게 지내는 법을 익혀보겠다고 마음먹는 일과도 관련된 것이라고 생각하라.
 
캐롤라인 냅의 시선에 당연한 건 없습니다. 이를테면, 이 책에 수록된 글 중 여자들의 우정에 대해 이야기한 에세이가 캐럴라인 냅 특유의 방식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은 여자들의 우정을 단편적으로 쉽게 폄하해 버리곤 합니다. 반면 캐럴라인 냅은 여자들의 우정의 결을 날카롭고 섬세하게 짚어내서, 여자들의 우정이 왜 무수한 오해를 받는지, 왜 그런 오해들을 동반할 정도로 특별한지 차분히 함께 느끼도록 독자를 이끌어 갑니다. 여자들의 우정을 변명하거나 미화하기는 커녕, 오히려 그 우정의 불편하고 어색해 보이는 특징들을 깊이 파고드는 방식으로 그같은 사유에 도달합니다. 애정결핍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먼저 시원하게 인정해 버립니다. 자신이 얼마나 밑도 끝도 없는 결핍의 감정을 겪고 있는지. 그 결핍이 얼마나 불합리해 보이며, 대놓고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부끄러운 지경인지. 그 밑바닥까지 내려가서 결핍의 모양을 가늠해 냄으로써 자아에 대한 좀더 깊은 인식에 도달합니다. (이 글들을 오늘 낭독에서는 제외했습니다. [명랑한 은둔자]를 직접 펼쳐 읽어봐 주신다면 참 기쁘겠습니다.) 캐럴라인 냅에게 단순히 날카로운 통찰이 있을 뿐 아니라, '이것은 열정'이라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을 것 같은, 삶에 대한 진심어린 태도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분석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호프와 나는 서로에게 놀랍게도 앞으로 오랫동안 연락하고 지낼지도 모른다. 우리의 우정이 또다른 종류의 작지만 소중한 범주, 즉 일상적 접촉이나 지리적 근접성이 없어도 살아남는 관계라는 범주로 바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이 가능성이 현실이 될 만큼 우리가 오래 알고 지내진 않았고, 공통의 역사를 충분히 쌓지도 못했다. 그러니 처음에는 상황적 친구였고 그다음에는 마음의 친구였던 내 친구 오프는 이제 과거의 친구가 될 것이다. 훗날에도 내가 순수한 애정으로 똑똑히 기억할 친구가.
 
그날 아침, 저는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그 사실을 깨우쳤습니다. 어쩌면 퍼뜩 머릿속을 스친 생각에 불과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 순간의 생각이 점차 자라서 결국 저를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게 만들었습니다.

진실은 무릇 무척 단순하지만 알아차리기 어려운 것이죠. 저는 아빠를 사랑했어요. 하지만 아빠처럼 되고 싶진 않았어요. 저는 술을 사랑했지만, 아빠처럼 죽고 싶진 않았어요.

두 달 뒤, 저는 술을 끊었습니다.
 
가을은 역시 이렇게, 어느 귀퉁이엔 분명히 내 모습이 비춰지고 있을 맑은 거울 같은 에세이로 시작하는 게 제격 아닐까요. 들어주시는 모든 분들, 늘 깊이 감사드립니다. 이 가을에도 함께 책을 읽고 싶습니다.

*바다출판사의 낭독 허가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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