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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리스트] 그대로는 아니지만, 라임을 맞추며 반복되는 국가 폭력의 역사

 경남 함안에서 약방집 아들로 태어난 김진용 씨는 젊을적 돈 벌러 외지에 나갔다가 탄 어선이 납북되는 바람에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었습니다. 납북됐다 꿈에 그리던 조국으로 돌아왔지만, 기다리고 있던 건 '간첩질 한 것 아니냐'는 의심과 모진 조사. 반공법위반, 수산업법 위반으로 집행유예 판결은 받은 김 씨는 이후 50년 동안 간첩 낙인이 찍혀 감시를 받았습니다.

[김두홍/납북어부 고 김진용 아들]
경찰들이 와서 “누구랑 이야기 했습니까”. 아버지가 만난 사람들마다 다 따라다니면서...

고향으로 낙향해 농사일과 노동일 등, 먹고 살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했던 김진용. 그를 기억하는 이웃들은 한결같이 "그 사람이 간첩일 리가 없다"고 기억합니다. 이웃들은 김 씨가 먹고 살 수 있도록 밭도 내어주고, 일자리도 알아봐 주었습니다. 국가는 못 배우고 힘 없는 김 씨를 버렸지만, 그를 일으켜세운 건 이름 없는 이웃들이었습니다.

[안현주/납북어부 고 김진용 씨 이웃]
뭐 남한테 해를 끼치는 그런 사람도 아니고. 우연히 자기가 젊은 나이에 먹고 산다고 나와서 옳은 직장 없고 이래서 배 타다가 그래 했는데, 간첩에 그게 뭐 해당이 되는 말입니까. 그게. 
 
2017년, 사람들이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다고 했습니다. 김 씨는 어렵사리 누명을 벗고자 재심을 신청했지만 첫 재판부는 심리도 열지 않고 기각. 김 씨가 이에 불복해 열린 항고심 재판부는 그래도 국가기관에 자료를 내라고 요구하는 성의를 보였지만, 이번엔 당시 수사를 담당한 군과 국정원, 경찰이 자료를 내놓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흘러간 5년의 시간. 김 씨는 지난해 10월, 말기 담도암 판정을 받았습니다.

가망 없으니 그냥 죽겠다는 김 씨에게 이웃들은 "그래도 간암 치료 제일 잘 한다는 서울 병원에 가보기라도 하라"며 한푼 두푼 모은 700여만 원을 쥐어줬다고 합니다. 없는 살림 털어 치료비를 보아준 이웃들과 재심 결정을 받을 수 있을 거라는 실낱같은 희망에 기대, 김진용 씨는 하루하루 말라가면서도 삶의 의지를 놓지 않았습니다.

[김두홍/납북어부 고 김진용 아들]
“아버지 무죄 내일 납니다. 무죄 곧 나니까 조금만 더 버티세요”. 이래가지고 버티셨어요.

그리고 올해 3월, 정의당 이은주 의원실을 통해 1971년 당시 납북어부 수사기록이 세상에 드러나게 됐습니다. 지난 5월 SBS 탐사보도부 <끝까지판다> 팀이 보도해드린 문서입니다.
▶ 2022.05.15 8뉴스 [단독] 납북됐다 온 어부가 끌려간 곳…불법 수사 정황 기록 입수

이 기록은 항고심에 제출됐고, 재판부는 결국 "김 씨 등이 입항한 이후 약 40일간 경찰과 군부대에 불법 구금된 채 조사를 받은 사실이 인정된다"며 원심을 취소하고 재심 개시를 결정했습니다. 김 씨가 납북됐다 돌아온지 50년 만, 억울함을 풀기 위한 외로운 싸움을 시작한지 5년만이었습니다. 하지만, 말기 담도암으로 투병을 이어가던 김 씨는 재심 결정이 나오기 하루 전, 세상을 떠났습니다.

[김두홍/납북어부 고 김진용 아들]
눈을 뜨시고 돌아가셨어요. 눈을 감겨드렸는데도 계속 눈이 떠지더라고요. 아직도 그 장면이 생각나서 밤에 잠을 못 잡니다. 염을 할 때에도 눈을 뜨시고 그렇게...

간첩질을 하기엔 별달리 배운 것도 없고, 아는 것도 없었던 김진용은 왜 이렇게 한 많은 삶을 살다 죽어야만 했던 것일까요? 민주화가 되고, '민주 정부'를 표방한 정권들이 여럿 들어섰음에도, 왜 김진용은 누명을 풀지 못하고 죽어야 했던 것일까요?
 

'납북된 뒤 김일성 찬양행사 동원됐다', '마을 텔레비전 개수 알려줬다'며 간첩 낙인

1972년 고깃배를 타다가 북한에 납치된 김 씨. 고국에 돌아왔지만, 국가는 김씨를 비롯한 이들이 북한에서 간첩행위를 했다고 결론내렸는데요. SBS가 정의당 이은주 의원실을 통해 입수한 당시 수사 기록을 보면, 납북어부들이 했다고 조사된 '간첩질'이 어떤 것들이었는지 나와있습니다.

원종진 정반석 취파용
원종진 정반석 취파용
원종진 정반석 취파용
당시 대한민국 경찰과 정보기관들은 '북한의 강요로 김일성 찬양 행사에 동원됐다', '북한군 신문을 받으며 살던 마을에 텔레비전이 몇대 있다고 말했다'는 것들을 간첩 행위라고 기록해 놓았습니다. 이마저도 불법 수사와 폭행 등 가혹행위를 통해 얻어낸 정황도 짙습니다.
 
[박종식/당시 속초 여인숙 주인]
"(여관에서) 잠을 안 재우고 계속 돌아가면서 조사를 받았어요. 구타해서 소리를 지르고"

경찰이 만든 걸 검찰은 넘겨주고 법원은 결정했다

이렇게 힘없고 무고한 국민의 삶이 철저히 파괴되는 동안, 글도 못배운 이들이 푼푼이 벌어서 낸 세금으로 월급 받는 공무원과 엘리트들은 책임을 다하지 않았습니다. 간첩을 '잡아야'할 대공 경찰은 우리 국민을 고문해 간첩을 '만들고', 경찰의 불법수사를 감독해야할 검찰도 전혀 제 역할을 하지 않았습니다.
 
[류제성 변호사/납북어부 고 김진용 대리인]
납북귀환어부 사건은 분단 시대에 분단이 낳은 어떤 비극적인 사건이고, 그런데 이 사건을 수사기관은 적법 절차 같은 것은 완전히 무시하고 인권을 침해하는 고문을 통해서 수사를 했고. 검찰 역시, 검찰은 그 부분에 대한 불법 수사에 대한 통제 공익의 대표자로서의 역할을 전혀 하지 않았고,
 
조작 간첩을 만든 경찰들은 특진을, 이를 기소한 담당 검사들은 대개 꽃길을 걸었습니다. 

법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재판 과정에서 고문을 받았다고 호소해도, 허위 자백이었으니 살펴달라 호소해도, 재판을 담당한 판사들은 무식쟁이 어부들의 엉성한 외침보다는 정연하게 쓰여진 수사기관 조서와 유창하게 발설된 공판 검사들의 주장을 따랐습니다. 
 
[류제성 변호사/납북어부 고 김진용 대리인]
법정에서 그런 불법 구금과 고문 가혹행위를 진술하는 경우도 많이 있었는데 이제 법원은 뭐 그런 점에 대해서는 그냥 신경 쓰지 않았고, 피고인의 말을 전혀 들어주지 않았고, 공판조서나 판결문에도 이제 전혀 반영을 하지 않았던 거죠.
 
그리고 이런 것들 바로 잡아달라며, 죽을 때가 가까워져서야 겨우 목소리 내는 피해자들에게 이들 대한민국의 국가기관과 엘리트들은 여전히 소극적이기만 합니다.

[류제성 변호사/납북어부 고 김진용 대리인] 
민주화가 되고 난 이후에도 조명을 못 받은 거죠. 이 분들이 민주화운동을 하거나 투사가 아니니까, 배운 분들이 아니니까 자기 억울함을 호소를 못 했고... 

"역사는 그대로 반복되지는 않지만 라임을 탄다"

저희 <끝까디판다> 팀이 과거 있었던 국가폭력 피해에 대한 기사들을 쓸때마다 한 쪽 진영의 입장을 취하는 것으로 보이는 분들로부터 이런 취지의 댓글이나 이메일을 받곤 합니다. '옛날 일 지금 꺼내는 의도가 뭐냐', '다 지난일 이제 어쩌라는거냐'. 시간이 지난 뒤에도 계속 억울하다고 하는 이들에 대해 '과거의 일은 지겹다'고 반응하는 건, 적당히 망각해야만 내일을 살아갈 수 있는 개인으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개인들이 구축해놓은 '시스템으로서의 국가'마저 이런 반응을 당연히 여길 때, 당연하지 않아야 할 것마저도 당연해지는, '당연함의 악순환'이 시작됩니다. 
 
[김두홍/납북어부 고 김진용 아들]
돌아가시고 하루만에 하루 지나니까 나오는거 보니까는 '아...안되는갑다. 안 되는 놈은 안 되는가 보다...'

국가가 개인의 삶을 무너뜨리는 폭력은 최근에도 그 양태만 조금씩 달리할 뿐 반복되고 있습니다. 국정원의 조작 간첩 증거를 걸러내지 못하고 기소한 검사는 새 정부의 핵심 요직으로 진출했습니다. 피해자는 또 한 번 자신이 부정당하는 분노와 울분을 느낀다고 했습니다.

언뜻 보기엔 과거의 국가 폭력 사건과는 조금 결이 달라보이는 일들도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서해 공무원 피살사건'과, '귀순 어민 북송 사건'에서 갈라져있는 양 진영은 저마다 '인권'을 말하며 설전을 벌이고 있는데, 사건들은 진실 규명 과정과는 별개로 정치적 연료가 되어 소비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사건들은 사실관계와 그 규명 정도에는 차이가 있지만, 들여다보면 핵심 쟁점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이 일들 모두 국가의 부당한 권력 행사가 개인의 핵심적 권리를 심각하게 훼손했는지를 다투는 것들입니다. 어떤 사건은 이쪽 진영에서, 어떤 사건은 저쪽 진영에서 중요도를 부여하지만, 국가 권력과 개인의 관계라는 시각에서 바라보면, 50년의 시간을 두고 발생한 일들엔 공통적으로 돌아봐야할 점들이 있습니다.

'역사는 그대로 반복되지는 않지만, 라임은 탄다'는 마크 트웨인의 말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종종 권력을 남용하곤하는 국가는 사안을 그때그때 선택적으로 해결하기보다, 이 남용의 역사들을 스스로 고쳐나갈 시스템을 더 발전시켜나갈 수는 없는지 고민해야 합니다.  국가의 구성원이자, 언제든 당연한 권리를 짓밟힐 위험에 놓인 평범한 시민들도 생업의 와중 조금의 짬은 내서 고민해봐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나랏일을 하는 사람들은 더 많은 힘과 시간을 기울여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문제이겠습니다.
 
힘있는 이들의 결정에 삶과 가족이 무너져내려도, 상대적으로 힘 없고 평범한 사람들은 계속해서 '안될놈'으로 살아야하는 세상. 잘못을 저지른 국가기관과 엘리트들이 과오에 눈감는 일이 당연하게 반복되는 세상은 언제쯤 종식될 수 있을까요?  이런 세상이 계속되지 않는게 진영을 막론한 정의라고 한다면, 과거에 벌어진 국가 폭력 문제를 바로잡는 일만큼은 어렵지만 진영의 시각을 버리고 바라봐야 합니다.

(취재 : 원종진 정반석 / 영상취재 : 서진호 하륭 / 편집 : 김복형 / 제작 : D콘텐츠기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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