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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10년차 상담가인 내가 '1호선 투구남' 보고 운 이유

장재열|비영리단체 청춘상담소 '좀놀아본언니들'을 운영 중인 상담가 겸 작가

1호선 투구남 (사진=온라인커뮤니티)
지난 5월 마지막 주, 인터넷을 떠들썩하게 만든 존재가 있었습니다. 바로 '1호선 투구남'인데요. 특이한 사람 많기로 소문 난 1호선에서도 독보적인 비주얼로 단숨에 눈길을 사로잡았습니다. 얼굴을 완전히 가린 서양식 투구, 십자군 전쟁 기사 복장, 그리고 한 손에는 성경, 다른 한 손에는 닭 인형을 손에 쥔 청년. 가만히 앉아 있다가 누가 쳐다 본다 싶으면 닭 인형 장난감을 눌러 '꽥!' 소리를 내고, 다시 가만히 앉아 성경을 봅니다. 1호선에 흔히 출몰하는 관심 받고 싶어하는 사람이겠거니...하고 지나치려던 찰나 그의 정체가 공개가 되면서 반전이 일었지요.

스물일곱살의 나이. 그는 '은둔 청년'이었습니다. 10여 년 전 조현병에 틱 장애까지 진단받은 것이지요. 상담이 직업인 저조차 저 세 가지 병명을 듣고 그가 어떤 상태인지는 짐작이 갔지만, 그래도 왜 투구를 쓰고 나왔는지는 짐작하기 어려웠습니다. 자신을 중세 시대 기사라 여기는 망상일까? 아니면 환청 등의 영향인가? 그러나 제 예상은 모두 빗나갔습니다. 진짜 이유는 "왠지 이걸 입는다면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것 같아서"였습니다.

그는 오랜시간 은둔 상태로 지냈지만 간절히 집 밖으로 나가고 싶었던 거지요. 아직도 적지 않은 분들이 '은둔 청년'은 의지가 약해서 집에 틀어박히는 존재라고 생각하며 비난합니다. 부모 등골을 뽑아먹지 말고 공사장에라도 나가 돈을 벌라는 댓글도 참 많이 봅니다. 하지만 1호선 투구남 사례를 보신다면 편견이 조금은 사라지실 겁니다.

그의 지난 세월은 꽤 치열한 '알 깨기'의 연속이었습니다. 정신장애 진단을 받고도 사회생활을 해보려고, 치료를 받아가면서 어떻게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자리를 알아보고, 어렵게나마 일용직 근로를 나갔었다는 말에서 가슴 한 켠이 저릿했습니다. 그 상황에서도 일을 하려는 시도... 그건 정말 큰 용기를 낸 것이거든요. 그의 상태가 어떤 것이었는지, 같이 한번 상상해볼까요?

우선 내 머릿속에서 끝없이 환청이 들립니다. 그리고 의도하지도 않았는데 머릿속 생각들이 입밖으로 튀어나오고요. 집밖을 나서면 모든 행인이 나를 해치려고 빤히 쳐다봅니다. 이 모든 것이 1호선 투구남의 상태였습니다. 아니, 그 정도면 입원을 하든가 해야지 어떻게 일하러 다니냐고요? 물론 이 증상들은 가볍게 볼 만한 것들은 아닙니다. 하지만 적절한 약 처방과 의학적 도움을 통해 상당히 개선될 수 있고 일상생활도 우리와 함께 할 수 있습니다. 투구남 역시 그 과정을 통해서 일자리를 얻고 사회생활을 시도했던 건데요. 그가 결국 은둔하게 된 사건을 들으면서 저는 눈시울을 붉히고 말았습니다. 같이 그 순간으로 들어가 볼까요?

출근길. 생각보다 버스 안에 사람이 너무 많아 긴장 상태로 있던 그. 최대한 긴장하지 않으려고 출근 전에 보았던 유튜브 영상을 떠올리며 주의를 돌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자신도 모르게 그 영상 속의 독일어 대사 두 마디가 입밖으로 툭-튀어나온 것이지요. 모든 승객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대처하시겠어요? 주변 사람들에게 물었더니 답변은 다양했습니다. "독일어 공부하는 척한다"라던가 "그냥 고개를 푹 숙여요"라던가 "죄송합니다"라고 말한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즉, 빠르게 아무렇지 않은 척 한다는 게 공통점이었는데요. 하지만 투구남은 정반대였습니다. 그 순간부터 유리창에 머리를 쿵쿵 찍어댄 것인데요. 투구남이 말하기를 "저는 원래 이상한 사람이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라는 신호였다고 합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엥? 그러면 더 눈이 가는데?'라고 생각하셨을 거예요. 네,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신장애를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바로 이 지점입니다. 생각의 알고리즘이 다소 다르게 전개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 속을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투구남의 입장에서는 오랜 세월 동안 내적 갈등이 깊었을 겁니다. '나는 이상한 사람인가? 아니야. 나아질 수 있어. 아닌가? 나는 답이 없는 이상한 사람인걸까? 아니야, 치료받으면서 평범하게 살 수 있을 거야.' 희망과 절망을 오가는 나날들이었겠지요. 하지만 최선을 다해 간신히 사회로 스며들고 있던 순간에 증상 하나가 튀어나와 버린 거지요. 바로 그때, 절실히 잡고 있던 마음속 희망의 끈 하나가 '탁'하고 끊어져 버린 겁니다. 역시 나는 안되는구나, 역시 나는 이상한 사람이구나. 절망과 자포자기에 휩싸인 채로 유리창에 머리를 박았다면, 조금은 그가 이해되실까요?

1호선 투구남 (사진=온라인커뮤니티)
용기를 내 세상 밖으로 걸어 나온 1호선 투구남. (사진=온라인커뮤니티&엠빅뉴스 캡쳐)

그때부터 청년은 다시 집에서 은둔생활을 이어나갔고 4년이 지났습니다. 이번에는 그가 '얼굴이 다 가려지는 투구'를 쓰고 집 밖으로 나왔습니다.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아도 되는 보호막을 쓰고 세상밖으로 조금씩 걸어나왔습니다. 유명해져버린 투구남의 사례를 보고 비슷한 상황에 놓인 청년들이 꽤 희망을 얻었다고 전해집니다. 아마 제2의, 3의 투구남이 나타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 역시 버스 안에서의 투구남처럼, 어쩌면 조금 특이한 행동을 할 수도 있습니다. '이상한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다르게, 조금 더 따듯하게 바라봐 주면 어떨까요? 그 '이상함' 속에 어쩌면 치열한 삶의 의지가 숨어있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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