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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멘터리] 영화와 함께 다시 돌아온 가객 정태춘

이주형 기자의 씨네멘터리 #26

내 더운 가슴 안아주오

# "내 뜨거운 가슴 안아주오"라고 하는 것과 "내 더운 가슴 안아주오"라고 하는 것은 꽤나 다릅니다. 비록 유사어라 할지라도요. 싱어송라이터 정태춘은 '뜨거운 가슴' 대신 '더운 가슴'이라고 쓸 줄 아는 사람입니다. 정태춘 데뷔 40주년 프로젝트에서 시작된 다큐멘터리 영화 "아치의 노래, 정태춘"을 보다가 문득 '더운'이라는 단어의 선택이 마음 속에 머물렀습니다. '뜨거운 가슴'은 클리셰인 나머지 그렇고 그런 통속적인 느낌 외엔 역설적이게도 가슴을 뜨겁게 자극하는 것이 없지만, 오히려 온도를 낮춘 '더운 가슴'은 노골적이지 않고 은근한 데가 있는 데다가 수줍은 듯 고백하여 마음을 움직이는 데가 있습니다. 1984년 발매된 정태춘과 박은옥의 첫 공동 음반에 실린 '사랑하는 이에게'라는 히트곡의 노랫말입니다.

영화 "아치의 노래, 정태춘" ⓒ인디플러그
아, 대한민국
하늘엔 조각 구름 떠있고 강물엔 유람선이 떠있고 / 저마다 누려야 할 행복이 언제나 자유로운 곳 / 뚜렷한 사계절이 있기에 볼수록 정이 드는 산과 들 / 우리의 마음 속에 이상이 끝없이 펼쳐지는 곳 

# 1983년 발표된 정수라의 히트곡 '아, 대한민국'입니다. 5공 군사독재 초기에 이른바 '건전가요'로 발표된 곡이라 차라리 반어법(irony)으로 썼다고 하는 게 더 믿기 쉬울 정도의 가사입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3년 밖에 안 지난 데다가 진실의 터럭조차 폭압적으로 감춰져 있던 시절에, 대한민국이 '행복이 언제나 자유로운 곳'(행복이 자유롭다니, 지금 보니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이고 '우리의 마음 속에 이상이 끝없이 펼쳐지는 곳'이라니요.

   그로부터 8년 뒤 "아, 대한민국…"이란 앨범을 발표한 정태춘은 동명의 타이틀 곡에서 진짜 반어법과 리얼리즘을 섞어 통렬하게 노래합니다, 그런데 이 앨범은 비합법, 반합법, 한마디로 불법 음반이었습니다.

우린 여기 함께 살고 있지 않나 / 기름진 음식과 술이 넘치는 이 땅 / 최저임금도 받지 못해 싸우다가 쫓겨난 / 힘없는 공순이들은 말고 / 하룻밤 향락의 화대로 일천만원씩이나 뿌려대는 저 재벌의 아들과 함께 / 우린 모두 풍요롭게 살고 있지 않나 / 우린 모두 만족하게 살고 있지 않나 (정태춘 '아, 대한민국...' 중)

사전검열 폐지를 위해 공개적으로 불법 카세트테이프 유통에 나선 정태춘 ⓒ인디플러그
87년 민주화 투쟁에 힘입어 6공화국이 출범하고 많은 금지곡들이 해금됐어도 당시는 여전히 공연윤리위원회(이하 공륜)의 가요 사전심의제도가 살아있던 시절이었습니다. '사전심의'는 사실상 검열이었습니다. 검열이 얼마나 창작자의 정신을 옥죄고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는지 잘 아실 겁니다. (검열을 소재로 한 미타니 코우키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 영화 "웃음의 대학"에서 '역설적으로' 잘 드러나 있습니다) "내가 이런 노래를 만들어서 발표하려고 하는데, 괜찮을 깝쇼?"하고 미리 국가의 허락을 받는 제도니까요.

일부러 불법 음반을 만들어 판 예술가

# 1991년, 공연윤리위원회의 전면 개작 지시와 사전심의 거부하고 '아, 대한민국…' 음반을 발매한 정태춘은 1993년 다시 사전심의를 받지 않은 채 새 앨범 '92년 장마, 종로에서'를 발표합니다. 주무부처인 문화체육부도 이번에는 가만있지 않습니다. 음반 및 비디오물에 관한 법률(이하 음비법) 위반으로 정태춘을 고발해 정태춘은 불구속 입건됩니다. 이 사건 공판 과정에서 정태춘은 사전심의에 대한 위헌법률심판제청을 합니다. 1995년에는 서태지와 아이들 4집 "컴백 홈" 중 '시대유감' 가사에 대해 공륜이 개작 지시를 하자 서태지가 가사를 전부 삭제하고 연주곡으로 바꾸면서 사전검열 제도가 사회적 이슈로 떠오릅니다. 결국 국회가 나서 이 문제를 조사하고 음비법을 개정하면서 1996년 가요 사전검열 제도는 완전히 폐지됩니다. 같은 해 '사전심의는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 판단도 나왔습니다.
  당시에 '문화 대통령'으로 불렸던 서태지가 합류해서 더 큰 이슈가 되긴 했지만 정태춘이야말로 사전검열 문제를 앞서서 제기하고 없앤 투사 예술가입니다. 정태춘이 없었다면 가사를 사전검열 받는 -그래서 더 무서운 자기검열을 만들어내는- 반문화적이고 반예술적인 행태가 언제까지 이어졌을 지 모릅니다. 가요사전검열을 폐지하고 표현의 자유를 쟁취한 일이 오늘날 K-POP의 초석을 놓은 사건이라고 평가한다면 지나친 주장일까요?

# 지난 18일, 정태춘의 노래와 인생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아치의 노래, 정태춘"이 개봉했습니다. 개봉 닷새 만에 1만 명 관객을 넘어서며 일별 박스오피스 5위에 올라있습니다. 이 영화에는 정태춘·박은옥의 노래 28곡이 '감상할만한 분량'으로 포함된 '음악 영화'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영화는 정태춘을  세상에 알린 데뷔곡 '시인의 마을'(1978)로 시작합니다.

'나는 일몰의 고갯길을 넘어가는 / 고행의 방랑자처럼 / 하늘에 빗긴 노을 바라보며 / 시인의 마을에 밤이 오는 소릴 / 들을테요'라는 노랫말을 쓰는 이 서정 시인이 어떻게 투사가 됐는지 궁금하게 만드는 오프닝이었습니다. 투사 이전의 정태춘은 1979년 'MBC 10대 가수 가요제'에 나와 신인상을 받은 '연예인'이기도 했지요. 운동복을 입고 MBC '명랑운동회'에 나가 매트 위를 뛰고 구르던 그가 점차 변해가는 과정과 변해가는 노래들을 보고 들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것들을 발견하며 스크린에 집중하는 동안 28곡이 끝났고, 영화도 끝났고, 시사회장 스크린 앞에서 정태춘 씨와 잠깐 마주 앉았습니다.

영화 "아치의 노래, 정태춘" ⓒ인디플러그
노래를 떠났던 이유

# 영화에도 나오지만 정태춘 씨는 2000년대 들어서 십여 년  동안 스스로 노래를 끊었습니다. 창작 활동을 접고 세상과 만나지 않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대신 사진을 찍고, 가죽 공예를 하고, 붓글씨를 썼습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절필'이었습니다. 사전검열을 철폐하는데 앞장서 다른 창작자들은 물론이고 자신을 억압하는 장애물을 걷어 치우고 자유로운 예술 활동의 판을 깔아놓은 이가 결국 그 판에서 스스로 떠났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졌습니다. 

- 절필은 투항인가요, 아니면 저항인가요? 아니면 그냥 그런 결정이었을 뿐인가요?
- 복합적이죠. 일종의 저항이라고도 할 수 있고요. 나는 변화돼가는 우리 사회의 상황과 세계의 상황들, 문명이랄까 이런 것들에 적응하고 싶지 않았어요. '나는 그곳에 같이 빨려 들어가지 않겠다'라고 생각한 부분이 있었고, 한편으로는 시장이 나를 배척한 부분도 있었죠. '정태춘의 음악은 시장에 적합하지 않아'하는 (사회적, 대중적) 판정 같은 것들을 느끼는 거죠. 그래서 '나는 스스로 유배를 떠날래'하고 내가 빠져 나온 것도 있죠.


그러고 보니 정태춘은 1993년 음비법 위반으로 기소될 빌미를 제공하는, 아니 기소되기 위해 일부러 불법으로 발표한 '92년 장마, 종로에서'에서 이렇게 노래한 바 있습니다.

다시는 / 다시는 종로에서 깃발 군중을 기다리지 마라 / 기자들을 기다리지 마라 / 비에 젖은 이 거리 위로 사람들이 그저 흘러간다 / 흐르는 것이 어디 사람 뿐이냐 / 우리들의 한 시대도 거기 묻혀 흘러간다 / 저기 우산 속으로 사라져 가는구나 / 입술 굳게 다물고 그렇게 흘러가는구나

# 정태춘 씨는 한 달 전부터 다시 노래를 만들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벌써 13곡이 썼다고 합니다. "노래는 일기"라고 말하는 정태춘은 "(음악 인생) 초기에는 개인적인 일기였고, 중반 이후에는 사회적인 일기였고 메시지였다"고 덧붙였습니다. 그러면서 다시 창작 활동을 시작한 지금은 "노래가 일기여야 된다고도 생각하지 않고 메시지여야 된다고도 생각하지 않고, 그냥 정말 좋은 작품을 쓰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아치의 노래, 정태춘"에는 중간에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데뷔 40주년 기념 콘서트로 광주를 찾았을 때 벌어진 일입니다. 만석이 된 대형 공연장에서 정태춘 씨가 '5.18'이란 제목의 노래를 시작하는데 한 관객이 일어나 외칩니다. "정태춘 씨, 나는 노래를 들으러 왔지 이념을 들으러 온 게 아니예요!" 이 말을 외치고는 관객은 그대로 공연장을 나가버립니다.
  이념과 노래를 분리할 수 있을지, 일과 인생을 분리할 수 있을지, 이론과 실천을 분리할 수 있을지, 생각과 행동을 분리할 수 있는지, 가치관과 삶을 분리할 수 있을지, 5.18 즈음 개봉한 이 영화가 곱씹게 만드는 또 다른 대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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