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SBS 뉴스 상단 메뉴

[취재파일] 진짜 '식용유 대란'일까? 물가 보도가 말하지 않는 것들

'기대 인플레이션'. 가계와 기업 등 각 경제 주체들이 가진 물가 상승률에 대한 전망을 뜻하는 용어입니다. 높을수록 물가 불안 심리가 가라앉지 않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지난달 통계청이 발표한 4월 소비자물가지수는 4.8%. 2008년 10월 이후 13년 만에 최고 상승률을 기록했는데, 기대 인플레이션율도 3.1%로 9년 만에 최고 수준이었습니다. 지금도 많이 뛰고 있지만, 앞으로 더 오를 거라는 불안 심리가 퍼져 있다는 의미입니다.
 

안 오르는 게 없다…그런데 진짜 '대란'이었나?

식용유 (사진=연합뉴스)

물가를 취재하면서 듣는 현장의 분위기도 짐짓 달랐습니다. 특히 밥상에 꼭 오르는 품목들 가격이 널뛰자 이를 취급하는 자영업자는 물론, 장바구니에 담기도 망설여진다는 소비자들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그만큼 물가 오르는 걸 피부로 느끼는 분들이 많다는 뜻이겠지요. 그런데 밀가루도 오르고, 계란도 오르고, 식용유도 올랐다는 내용을 취재하면서 마음에 걸렸던 부분이 있었습니다. 제가 쓴 기사를 비롯한 많은 보도들이 해당 품목의 '최고가'를 기준으로 고물가 현상을 보여주면서 때론 현상보다 더 자극적인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점이었습니다.

예컨대, 지난주 많은 기사에서 보였던 '식용유 대란' 용어가 그렇습니다. 일부 창고형 마트의 식용유 1인당 구매 개수 제한 정책을 다루면서 이를 '품귀 현상', 나아가서는 '대란'으로 해석한 보도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식용유 업계 관계자와 해당 마트 관계자의 분석은 좀 달랐습니다. 실제 소비자들이 식용유를 이전보다 많이 찾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창고형 마트의 경우 2주 전보다 구매량 3.5배 증가) 물량 공급에 차질을 빚고 있지는 않다는 겁니다. 대란이라고 하기엔 마트에 쌓여있는 식용유도 꽤 수북했습니다. 실제 식용유를 만드는 기업 관계자에게 정말 생산에 차질을 빚고 있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답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이렇게 잘 팔리는데 저희가 (생산을) 줄일 이유가 없어요. 국제 대두 가격이 지난 2~3년 너무 많이 오르고 있고, 최근에 많이 올라서 원가 부담이 는 건 사실인데 그렇다고 식용유를 만드는 양이 줄어든 건 아니거든요."
 

일부 사재기 조짐…"공급엔 문제없어"

그렇다면 해외 작황은 어떨까요 . 결론부터 말하자면 국내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콩기름의 원료가 되는 대두 역시 가격이 급등하긴 했지만, 국내 공급을 우려할 수준은 아닙니다. 해외 곡물 관측을 담당하는 이미숙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은 대두 주생산국인 브라질과 남미 지역에서 수확이 이뤄지고 있고, 라니냐로 인해 작황이 그다지 좋지는 않지만 이미 이런 상황이 가격에 선반영되어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앞으로 몇 개월 동안에는 가격이 다소 오를 요인이 있지만, 국내 수급에는 큰 문제가 없을 걸로 보이고 '공급 대란', '가격 폭등'으로 까지 해석하기는 어렵다는 겁니다.

물론 '미리 사두려는 심리'에는 공급만 영향을 미치는 건 아닙니다. 가격이 앞으로 계속 뛸 거라는 불안이 엄습하면 당연히 쟁여두는 걸 선택하는 소비자들이 늘어날 겁니다. 실제 자영업자 카페에서는 식용유 사재기 움직임이 있는 것도 사실이고요. 일부 식자재 마트에선 대용량 식용유 재고 확보에 차질을 빚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가정용 식용유는 전체 식용유 소비의 10% 정도에 불과한 상황에서 구체적인 근거 없이 대란을 언급하는 게 적절할까요? 한 유통업계 관계자는 이런 식의 보도가 결국 공급업체와 유통업체로 하여금 가격을 올리는 좋은 핑곗거리가 된다고 토로했습니다. 사실을 부풀린 보도가 그간 언론이 지적해오던 '인플레이션 기대 심리를 자극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겁니다.
 

지나친 불안 대신 있는 그대로의 현상 담아야

대형마트 식용유 판매 (사진=연합뉴스)

현재 물가를 끌어올리는 원인의 상당 부분이 국제 유가 급등과 원자재값 상승 등 해외에 있습니다. 원인을 당장 근본적으로 차단하기 어려운 만큼 더욱이 물가 심리 안정에 주력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가격이 오르는 현상' 이면의 근거를 충실히 제시할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뉴스에서 하도 오른다고 하니까 쟁여둔다'는 시민의 말은 오래 귓가를 맴돌았습니다. 앞서 언급한 인터뷰이들 역시 '언론이 가격 상승을 부추기는 측면이 있다'고 조심스럽게 지적했습니다. 모두 반박하기 어려운 말들이었습니다 . 물가 상황이 엄중하다면서도 그동안 '높이 뛴 가격 현상' 위주로만 기사를 써온 저에 대한 질책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식용유 대란?'을 취재하며 느낀 소회와 반성을 길게 기록한 이유입니다.



(사진=연합뉴스)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