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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to. 보이지 않는 불안에 갇혀 힘든 당신에게

장재열|비영리단체 청춘상담소 '좀놀아본언니들'을 운영 중인 상담가 겸 작가

불안 희망 (사진=픽사베이)
20대 후반 어느 생일에 <화>라는 책을 선물받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대학 동기에게요. 받자마자 "뭐야. 나 화 너무 많다 이거냐?"라고 농담 반 진담 반 화를 냈었지요. 그 책을 다 읽고도 "별로 안 달라지네! 뭐야?"라며 또 화를 냈던 웃픈(?)기억이 납니다.

국내에서도 세계적으로도 베스트셀러였던 이 책, <화>를 쓴 틱낫한 저자는 베트남 출신의 불교 지도자입니다. 하지만 종교인을 넘어 세계적인 사회운동가로도 알려져 있는데요. 모국인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여 미국, 프랑스 등 세계 여러 국가를 거치며 반전 운동을 전개하여 세계인의 공감을 얻었습니다. 베트남 공산 정권에서 입국 금지 조치를 내린 후로는 서구권에 주로 머무르며 전 세계인에게 마음 돌봄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기도 했지요. 그중 하나가 바로 이 <화>라는 책이었습니다.

그 책을 읽은 지 정확히 10년이 지나, 저는 오랜만에 그 이름을 다시 접했습니다. 이번엔 영화관에서 말이지요. 틱낫한 스님이 세상을 떠난 올해 다큐멘터리 영화가 개봉 되었거든요. 영화는 공동체 마을 '플럼 빌리지'의 일상을 다루었는데요. 영화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나레이션과 함께 담담하게 흘러갑니다. 별다른 사건이 있지도 않고 기승전결이라고 할 것도 딱히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그곳에 살고 있는 수행자들과 일반인 방문객들이 함께 밥을 먹고 명상을 경험하고 그런 일상들이 흘러갑니다.

그런데 유독 신기하게 와닿았던 장면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각자 자기 할 일을 하다가 '댕~'하는 종소리가 나면 하던 일을 멈추고 다들 얼음처럼 가만히 있는 겁니다. 우리 어린 시절의 얼음땡 놀이처럼 말이지요. 약 10초 남짓 종소리가 울리는 동안, 수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일제히 가만히 멈추어 있는 광경은 꽤나 낯선 모습이었습니다. 영화적 연출은 아닐까? 생각하던 그때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곳 플럼 빌리지에서는 일정 시간마다 종을 울리는데요, 이때만이라도 잠시 멈춰서 '지금 이 순간에 머무르는' 연습을 하는 겁니다. 내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무얼 하던 중인지, 어떤 소리가 들리는지 오롯이 느끼는 거지요.

그 장면을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나는 하루 중에 지금을 살고 있는 순간이 얼마나 될까?'라고요. 우리는 하루 중 상당 부분 미래나 과거에 가 있지는 않은가요? "아닌데?"라고 생각하시는 분들, 먼 미래, 먼 과거 말고 이런 것들도 있지 않습니까?

"미팅 시간에 늦겠는데? 뭐라고 말하지?"
"맞다, 그거 미리 해놔야 하는데"
"아까 그 말은 생각할수록 열받네."

이렇게 아주 가까운 미래, 가까운 과거에 머무르는 생각들까지 모두 제외하고 나면, 하루 중에 온전히 지금에 있는 순간은 무척 적을 겁니다. 저 역시도 그 장면이 나오는 동안 저도 모르게 '아, 참 좋은데? 칼럼으로 써서 많은 분들께 소개하면 좋겠다. 뭐라고 쓰지?'라며 습관적으로 훅- 지금에서 벗어나 버리지 뭡니까.

집으로 돌아와 어플리케이션을 하나 깔았습니다. 영화에서처럼 불시에 랜덤하게 종소리가 울리는 앱이었지요. 이 칼럼을 쓰는 도중에도 두세 번 종소리가 울려서 노트북을 접고 잠시 지금에 머무르는 연습을 했습니다. 이 연습들이 '불안'과 '무기력'과 맞설 수 있는 좋은 방패가 되어 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지요.

불안 희망 (사진=픽사베이)

사회가 건강하지 않아서 일까요? 상담가 생활 10년 동안 불안과 무기력을 느끼는 분들이 오히려 늘어나고 있음을 느낍니다. 내 마음처럼 세상살이가 되지 않아서, 앞으로도 그럴까 봐 '불안'에 사로잡히는 사람들. 그 불안이 너무 오래되면 서서히 무기력에 젖어듭니다. 불안은 한데, 내가 뭘 해도 상황이 바뀌지 않는 것 같아서 조금씩 놓아버리는 거지요. 그런 우리에게 '삶의 주도권'을 되찾아 오는 연습은 꼭 필요합니다.

생각해 보면 '지금 이 순간, 이 찰나'의 선택은 사소하지만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생각을 멈추고 들숨 날숨에 집중할 수도 있고, 보던 칼럼을 꺼버릴 수도, 잠시 커피를 사러 나갈 수 도 있습니다. 인생은 찰나의 연속이고, 지금 이 순간으로 계속 돌아온다면 우리의 선택지는 적지 않습니다. 어쩌면 인생 전체를 통틀어보면 사람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어 보이지만, 순간순간의 선택은 오롯이 내게 칼자루가 쥐어지지 않았던가요?

내 시선을 현미경 단위로 좁히고 좁혀 지금을 바라보는 일, 너무 미래의 불안을 끌어와서 미리 껴안고 있는 우리에게는 꼭 필요한 연습 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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