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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법을 지키지 않는 법원

최정규 | '상식에 맞지 않는 법'과 싸우는 변호사 겸 활동가

판사봉 사진
의뢰인 : 변호사님, 재판은 언제 열리나요?

나 : 소장 접수 순서대로 기일이 잡히고 보통 6개월 정도 걸리는데, 요즘 코로나19로 재판이 밀려 더 늦게 열리기도 합니다.

의뢰인 : 첫 재판 열리는 데 6개월이 걸린다고요? 변호사님. 민사소송법 제199조에는 "판결은 소가 제기된 날부터 5월 이내에 선고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나 : 네? 민사소송법 몇 조요? 그런 규정이 있어요?

변호사라는 직업 특성상 나는 여러 의뢰인을 만난다. "변호사님만 믿습니다"라며 사건을 맡겨둔 채 아무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의뢰인도 있고, 위처럼 법 조항을 직접 꼼꼼하게 찾아본 뒤 나에게 알려주는 성실한 의뢰인도 있다. 의학 논문까지 찾아보며 새로운 치료법이 나왔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환자가 의사에게 아주 편한 존재가 아닌 것처럼, 처음 들어본 것 같은 법 조항을 내미는 의뢰인 또한 변호사에게 아주 편한 존재는 아니다. 그러나 때로는 이런 꼼꼼하고 성실한 의뢰인들 덕분에 많이 배우고, 더 많이 고민하게 된다.

위 대화에 등장한 의뢰인 덕분에 알게 된 법 조항을 물끄러미 바라보니 지금까지 재판이 지연되는 걸 답답해하는 의뢰인들에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법관을 변호했던 나에게 화가 났다. 재판이 질질 끌리는 동안 시민들이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었다. 아래 민사소송법이 그것을 정확하게 말해준다.
 
민사소송법 제199조 (종국판결 선고기간) 판결은 소가 제기된 날부터 5월 이내에 선고한다. 다만, 항소심 및 상고심에서는 기록을 받은 날부터 5월 이내에 선고한다.

법원을 찾는 시민들은 재판이 빠르게 진행되어 본인이 겪고 있는 억울한 상황이 끝나기를 고대하기 마련이다.

직장 상사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다가 용기를 내어 회사 감사실에 신고했지만 오히려 불이익을 받게 된 노동자도 그런 기대를 갖고 법원을 찾았다. 그러나 현실은 기대와 달랐다. 2020년 4월 법원을 찾았지만 1년 2개월이 지난 작년 6월에서야 첫 재판이 열렸고, 1심 판결은 올해 5월로 예정되어 있다. 소가 제기된 날로부터 5월 이내에 선고된다는 법조항과는 달리 판결 선고에 무려 25개월이나 소요된 것이다.

외국인에게 눈을 맞아 실명이 된 중상해를 입은 피해자와 가족들이 가해자가 외국으로 도망가지 못하도록 막아달라는 호소를 저버린 경찰의 책임을 묻기 위해 시작한 국가배상소송 당사자도 답답한 건 마찬가지다. 2년 동안 진행된 1심 재판에서 딱 두 줄짜리 패소 판결문을 받고 지난해 5월에 시작된 항소심은 10개월이 지난 올해 3월에서야 첫 재판이 열렸다. 소가 제기된 날부터 5월 이내에 선고가 아니라 첫 재판이라도 열리기를 시민들은 학수고대하고 있다.

법을 지키지 않는 법원.
재판 지연의 책임은 과연 누구에게 있을까?


1차적 책임은 대법원이다. 판결의 선고는 소가 제기된 날로부터 5월 이내에 한다는 규정은 민사소송법이 제정되어 시행된 1960년 7월 1일부터 지금까지 줄곧 존재했다. 헌법 제27조 제3항 "모든 국민은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는 헌법 조항을 실현하기 위해 규정된 것이다. 그 규정을 지키지 못할 만큼 판사 1인당 사건 수가 늘었다면 대법원은 법관들이 은근슬쩍 민사소송법을 위반하는 것을 내버려둘 것이 아니라 국회를 설득해 판사 정원을 늘려나가는 일을 마땅히 했어야 한다. 만약 국회가 설득되지 않았다면 시민들에게 읍소했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대법원이 이 민사소송법 규정을 준수하기 위해 법관들을 독려하고, 아무리 독려한다 한들 지킬 수 없으니 법관을 증원해달라고 국회를 설득하고, 또 국회를 설득하지 못했다는 소식은 단 한 차례도 접하지 못했다.

대법원이 자신들의 책임을 저버린 상황에서 이 법은 법전에는 존재하나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법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불편과 피해는 고스란히 시민들이 감당하고 있다.

정부와 국회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사법제도 개혁을 추진하기 위한 대통령 자문기관인 '사법개혁추진위원회'가 설립된 것이 1999년 5월. 김대중 대통령 '국민의 정부' 시절이다. 그리고 2005년 노무현 대통령 '참여정부'에서도 '사법개혁추진위원회'가 가동되었다. 그러나 시민들의 삶과 직결되는 '신속한 재판 구현'은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다.

검찰 개혁을 기치에 5년을 매달렸던 문재인 정부도 법원 개혁에 소홀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사법농단사건으로 전직 대법원장이 구속 기소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기에 시민들은 법원 개혁에 많은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시민들이 피부로 느낄 수 있는 변화는 전혀 없었고, 억울해 찾아간 법원에서 더 억울해 못 살겠다는 시민들만 늘어나고 있는 형국이다.

물론 변호사인 나 또한 이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재판이 지연되어 고통받고 있는 의뢰인이 재판 지연의 고통을 호소할 때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법관들을 변호하지 말았어야 했다. 이건 당연한 일이 아니라고, 법관들이 민사소송법 규정을 위반한 것이라고, 신속한 재판을 진행해달라고 법원를 향해 외쳤어야 했다. 그러나 '신속한 재판을 받을 국민의 권리'가 구현되지 않은 '헌법 정지 상태'에 나 또한 눈을 감았다.

이제 5월이면 새로운 정부가 시작된다. 공정과 상식의 회복을 선거구호로 걸어 당선된 윤석열 정부에 요청한다. 시민들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이 지긋지긋한 재판 지연의 상태, 민사소송법을 지키지 않고도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돌아가고 있는 법원의 위법 상황, 신속한 재판을 받을 국민의 헌법상 권리가 구현되지 않은 헌법 정지 상태를 하루빨리 종식시키는 것이 공정과 상식의 회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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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규 변호사 상식에 맞지 않는 법과 싸우는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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