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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이슈] 25년 만에 뒤집힌 '초원복국 사건' 판례…"우리가 남이가"를 아시나요

[D이슈] 25년 만에 뒤집힌 '초원복국 사건' 판례…"우리가 남이가"를 아시나요
오늘(24일) 대법원 선고를 받은 한 사건이 역사 속 한 사건을 소환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의 얼개가 과거 '초원복국 사건'과 핵심적인 사실 관계가 거의 동일하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건 내용은 이렇습니다. 지난 2015년 전남 광양시의 한 운송업체가 불리한 보도를 한 언론사 기자를 상대로 몰래 녹음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일어났습니다. 이 업체가 식당에 녹음 및 녹화 장치를 몰래 설치하면서 불거진 사건입니다.

당시 전남 지역의 한 인터넷 언론사는 수입이 금지된 '왕겨 펠릿'이란 바이오 연료가 썩은 채 방치돼 인근 주민들에게까지 먼지가 날리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소송 당사자인 해당 운송업체가 이 시설을 관리하고 있다는 내용을 보도했습니다. 운송업체 부사장 A씨와 관리팀장 B씨는 2015년 1월 24일부터 2015년 2월 12일까지 4차례에 걸쳐 해당 기사를 작성한 기자를 상대로 식사 등을 대접했습니다. 식당 내부에 몰래 녹음 및 녹화 장치를 설치한 뒤 기자가 부적절한 요구를 하는 장면을 확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문제는 식당 주인도 이런 장치들이 설치됐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겁니다. 1심 재판부는 "일반인의 출입이 허용된 음식점이라도 도청용 송신기를 설치할 목적으로 음식점에 들어갔다면 영업주의 명시적 또는 추정적 의사에 반하여 들어간 것으로 볼 수 있다"며 주거침입죄를 인정했습니다. 25년 전 '초원복국 사건' 때와 같은 맥락의 판결입니다. 그런데 2심에서는 이와 전혀 다른 판결이 나왔습니다. 2심 재판부는 "불법행위를 할 목적으로 들어간 것이 아닌 때에는 주거자나 관리자 등의 명시적 승낙에 따라 들어간 이상 함부로 주거자나 관리인의 의사 또는 추정적 의사에 반하여 들어간 것으로 볼 것은 아니다"라며 원심을 깨고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1심의 유죄 판단이 2심에서 뒤집힌 겁니다. 그리고 오늘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검찰 측의 상고를 기각하고 무죄를 선고한 2심 판결을 확정했습니다.

오늘(24일) 대법원 판결 기사 ▶ 
"주인 모르게 카메라 설치만으론 주거침입죄 안 돼"…'초원 복집 사건' 판례 바꿨다
 

'초원복국 사건'이란?…한국 선거 사상 초유의 '도청 스캔들'

정윤식 D심층 초원복국
14대 대통령 선거를 불과 일주일 앞둔 1992년 12월 11일 금요일 저녁, 부산시 남구 대연동에 있는 초원복국이라는 음식점에 부산 지역 정부 기관장들이 모였습니다. 현직 부산시장부터 부산경찰청장, 부산교육감, 부산지검장 등을 훗날 박근혜 대통령 비서실장까지 지낸 김기춘 당시 전 법무부 장관이 불러 모은 겁니다. 이들은 이 자리에서 '대선을 앞두고 지역감정을 부추겨 민주자유당 김영삼 후보를 당선시키자'는 모의를 합니다. 이 대화가 나흘 뒤인 12월 15일, 그러니까 대선 불과 사흘 전에 당시 정주영 후보가 속해있던 통일국민당에 의해 폭로됩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초원복국 사건'입니다.

음지에서나 가능했던 비밀 대화가 세상 밖에 드러나게 된 건 당시 통일국민당 관계자의 도청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검찰은 도청에 관여한 3명을 주거침입 혐의로 기소했고 대법원은 1997년 이들의 유죄를 확정합니다. "일반인의 출입이 허용된 음식점이라 하더라도 영업주의 명시적 또는 추정적 의사에 반해 들어간 것이라면 주거침입죄가 성립한다"는 이유였습니다.

민주자유당의 김영삼 후보, 민주당의 김대중 후보, 통일국민당의 정주영 후보의 3파전으로 진행됐던 14대 대선은 당시 집권당이던 민주자유당으로서는 만만치 않은 선거였습니다. 대선 1년 전인 1991년 기초의원과 광역의원을 뽑는 지방선거 결과 65%가 넘는 곳에서 승리했지만 노태우 정권과 민주자유당을 보는 국민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습니다. 1990년 3당 합당 이후 당 내부 권력 다툼이 계속되고 있었고 특히 당내 계파인 민정계의 기반인 대구·경북(TK) 지역에서는 김영삼 후보에 대한 반발 정서가 퍼지고 있던 시점이었습니다. 여론조사에서는 김영삼·김대중 두 후보의 초접전 양상이 거듭되고 있었고 대선 9개월 전 총선에서 31석이나 가져가며 약진한 통일국민당 소속 정주영 후보의 지지세 또한 만만치 않았습니다. 민주자유당 내에서 위기론이 팽배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 초원복국으로 모인 인사들의 면면은 말 그대로 화려했습니다. 김영환 부산시장, 정경식 부산지검장, 박일룡 부산경찰청장, 이규삼 안기부 부산지부장, 우명수 부산교육청 교육감, 박남수 부산상공회의소 회장 등 당시 부산지역 기관장 8명이 참석했습니다. 자리의 주최자는 당시 법무부 장관에서 물러난 지 1달쯤 됐던 김기춘 전 비서실장이었습니다. 이날 자리의 성격을 함축적으로 드러내면서 동시에 지금까지도 가장 많이 회자되는 표현은 역시나 "우리가 남이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개된 녹취록을 토대로 김기춘 전 비서실장이 부산 지역 정치·법조·경제 수장들 앞에서 실제 한 말을 옮기면 이렇습니다.
[김기춘 |당시 전 법무부장관]
"부산, 경남, 경북까지만 요렇게 딱 단결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 5년 뒤에는 대구 분들하고 서울 분들하고 다툼이 될는지…. 그때 대구 분들이 우리에게 손 벌리려면 지금 화끈하게 도와주고…. 안 그렇습니까"

"지역감정이 유치한지 몰라도 고향의 발전에 긍정적…. 경남, 부산이 508만인가 그런데 80% 투표하면 400만…. 그중에서 80% 얻는다 해도 320만인데 그것 가지고 되겠느냐고…."

"하여튼 민간에서 지역감정을 좀 불러일으켜야 해 (일동 웃음)"
(1992년 12월 11일 저녁, 초원복국 저녁 자리 발언 중)

'선거 개입' vs '불법 도청'…예상 외로 흘러간 사건의 여파

정윤식 D심층 초원복국

선거를 불과 1주일 남긴 시점에서 초유의 도청 스캔들이 터지면서 14대 대선 정국은 일순간 혼란에 빠지는 듯 했습니다. 집권당 정치 세력이 여당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지역 감정을 의도적으로 일으키는 정황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만큼 여파는 컸습니다. 초원복국에 도청기를 미리 설치하는 불법을 감행하면서까지 폭로에 나선 통일국민당으로선 분노한 경상도 표심이 정주영 후보에게 돌아서길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사건의 향방은 이후 통일민주당 측의 바람과는 다르게 흘러갔습니다.

여당인 민주자유당은 이 사건의 핵심이 '공권력의 선거 개입'이나 '의도적인 지역감정 조장'이 아닌 '불법 도청'이라며 맞받아쳤습니다. 불법 도청에 따른 위법성이 사회와 국민의 안전을 위협하는 해악이 크고 따라서 도청으로 인한 정보 취득과 공개 역시 지탄 받아 마땅하다고 주장한 겁니다. 집권 여당이 주도한 이 프레임에 부응하는 언론 보도까지 이어지면서 국면은 오히려 김영삼 후보에게 유리하게 돌아갔습니다. 사건 이후 부산, 경남은 물론 경북권에서도 김영삼 후보의 지지율이 높게 나타나는 등 표심 결집이 이뤄졌고 결국 김영삼 후보는 41.96%의 득표율로 33.82%를 얻은 김대중 후보와 16.31%를 득표한 정주영 후보를 제치고 14대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선거가 끝난 뒤 도청을 기획하고 진행했던 통일국민당 측 인사들은 주거침입죄로 처벌 받았습니다. 정주영 후보의 아들로 당시 통일국민당 정책위원회 의장을 맡았던 정몽준 후보 역시 도청 사건의 기획자로 지목되면서 쉽지 않은 처지에 놓였습니다. 김영삼 후보가 대통령이 된 뒤 정주영 후보와 현대가에 대한 정치 보복이 전방위적으로 진행됐다고 보는 시각도 많습니다. 대선 이후 현대그룹 명예회장으로 돌아간 정주영 명예회장은 김영삼 정권 시기 대통령선거법 및 특정경제가중처벌법 등을 위반한 혐의로 기소됐고 현대그룹 역시 김영삼 정권에서 여러 차례 검찰 수사와 세무조사를 받았습니다.

정 명예회장은 유죄 판결을 받은 뒤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사면됐습니다. 이후 김영삼 전 대통령이 2001년 정 명예회장의 타계 이후 빈소를 찾아 조문하면서 '사후에야 화해를 했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주거침입 유죄 확정됐던 도청 스캔들 사건…25년 만에 재조명된 이유


'초원복국 사건'은 이렇듯 한국 정치사에 길이 남을 스캔들로 기록됐습니다. 그리고 초원복국에서 이뤄진 불법 도청을 유죄로 확정 지은 당시 대법원 선고 또한 한국 정치사는 물론 유사 판결시 언급되는 주요 판례로 남았습니다. 대법원은 당시 식당 주인이 도청용 송신기를 설치하려는 목적의 출입을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주거침입 혐의를 유죄로 인정했습니다. 불법 선거운동을 적발하려는 목적으로 도청을 했더라도 타인의 주거에 도청 장치를 설치한 것을 정당 행위라고 보기 힘들다고 판단한 겁니다.

정윤식 D심층 초원복국

그런데 시간이 흘러 25년이 지난 지금 대법원은 다른 판단을 내놨습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노태악 대법관)는 주거침입 혐의로 기소된 A 씨 등 2명의 상고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오늘(24일) 오후 확정했습니다. 음식점에서 상대방과의 대화를 녹음 또는 녹화하기 위해 식당 주인 몰래 장치를 설치하거나 제거한 행위가 주거침입죄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판단입니다. 대법원은 주거침입죄가 성립되려면 '사실상의 평온 상태'가 침해됐는지 여부를 판단해야 된다고 설명했습니다. 즉, 식당 주인의 이른바 '평온 상태'가 실제로 침해됐다는 사실이 인정돼야만 주거침입죄가 성립된다는 겁니다. '초원복국 사건' 이후 25년 만에 대법원 판례가 뒤집힌 셈입니다.

전원합의체는 그러면서 일반인들에게는 다소 낯설 수 있는 '평온 상태'라는 표현을 언급했습니다. 전원합의체는 "일반인의 출입이 허용된 음식점에 영업주의 승낙을 받아 통상적인 출입 방법으로 들어간 경우 주거침입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면서 "A씨 등이 이 사건 음식점의 영업주로부터 승낙을 받아 통상적인 출입 방법에 따라 들어간 이상 사실상의 평온 상태가 침해됐다고 볼 수 없으므로 침입 행위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덧붙였습니다.

전원합의체가 언급한 '평온 상태'란 피해자가 자신의 의사에 반해 누군가로부터 정신적·심리적 피해를 입음으로써 깨지거나 위협될 수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주거침입죄란 형법상 사적 생활 관계에 있어서 누군가가 사실상 누리고 있는 주거의 평안함, 즉 '평온 상태'를 보호해야 할 보호 법익이 있는데 이것이 실제로 침해됐는지가 전원합의체 판단의 쟁점이었던 걸로 보입니다. 전원합의체는 "설령 영업주가 A씨 등의 실제 목적인 녹음 및 녹화 장치 설치를 알았다면 출입을 승낙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보더라도 주거침입죄는 성립하지 않는다"고도 밝혔습니다.

대법원

이 사건에서 A씨에게 사실상의 '평온 상태'가 침해됐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한 전원합의체의 다수 의견에는 김재형·안철상 대법관을 제외한 11명이 동의했습니다. 두 대법관은 별개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두 대법관은 "'사실상의 평온상태를 해치는 모습'이라는 의미는 추상적이고 불명확해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며 "사실상의 평온 상태가 침해됐는지에 따라 침입 여부를 판단하더라도 거주자의 의사에 반하는지를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요소로 삼아 주거침입죄의 성립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다수 대법관들과 마찬가지로 주거침입죄로 처벌할 수는 없다면서도 '거주자에 의사에 반하는지'를 가장 중요한 요소로 삼아야 한다'는 의견을 낸 겁니다.

오늘 대법원 전원합의체 선고로 '초원복국 사건'은 또 다른 기록을 더하게 됐습니다. 한국 정치사는 물론 형법 교과서에까지 실리며 주요 판례로 남아있던 '초원복국 사건'의 주거침입죄 유죄 판례는 이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디자인 : 채지우 / 제작 : D콘텐츠기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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