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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멘터리] "길다 길어"…3시간짜리 영화의 시대

이주형 기자의 씨네멘터리

[씨네멘터리] "길다 길어"…3시간짜리 영화의 시대
《더 배트맨》 제공: 워너브라더스
 
틱톡처럼 짧은 영상을 보는 시대인데 3시간짜리 영화를 볼까? 넷플릭스도 2배속으로 보는데 2시간 넘으면 지루해하지 않을까? 심지어 9편이나 되는 TV시리즈도 유튜브 1시간 몰아보기로 보는데, 왜 영화는 자꾸 길어지는 것 같지?

이런 모순을 이해해보려는 시도들이 국내외 미디어에서 한창입니다. 여러분은 어느정도 길이의 영화가 좋으십니까? “재미있으면 2시간도 짧고, 재미없으면 1시간도 길다” 같은 정답 말고 말입니다. 저는 2시간 안팎의 러닝타임이 좋습니다. 딱 그정도 시간동안 암전된 극장에서 이야기와 이미지에 푹 빠졌다가 나오는 것이 제 일상의 호흡과 리듬에 맞고 생리적으로도 적당합니다. 지루하면 화장실에 더 가고 싶어지거든요.

최근 영화 러닝타임
《더 배트맨》 2시간56분 · 《스파이더맨》2시간 28분 · 《007:노타임투다이》2시간43분
지금 전세계 박스오피스를 강타하고 있는 《더 배트맨》의 러닝타임은 2시간56분, 3시간에서 고작 4분 빠집니다. 배트맨 시리즈는 해가 갈수록 점점 길어져 왔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 3부작 중 2005년 《배트맨 비긴즈》는 2시간19분, 2008년 《다크나이트》는 2시간32분, 2012년 《다크나이트 라이즈》는 2시간44분이었는데, 이번에 12분 더 늘었습니다.

극장 롱런 중인 《스파이더맨: 노웨이홈》도 2시간28분으로 프랜차이즈 역사상 가장 깁니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뒤따른다’는 스파이더맨의 메시지를 증명이라도 하듯, 긴 상영시간에 맞는 코로나 시대 최대 흥행을 기록했지요. 

전세계 역대 흥행 수익 2위에 올라있는 《어벤져스:엔드게임》의 러닝타임은 무려 3시간1분. 앞선 세 편의 어벤져스 시리즈가 2시간20분대인 것에 비하면 30분 이상 길어졌습니다. 
 지난해 상영했던 《007:노타임투다이》도 2시간43분, 역시 역대 007시리즈 중 가장 길었습니다. 이밖에도 지난해 개봉작 중 《듄》(2시간35분. 이것도 파트1에 불과하다는 사실…), 《이터널스》(2시간37분. MCU 영화 중 두번째 긴 러닝타임), 《라스트 듀얼》(2시간32분), 올해 개봉한 《하우스 오브 구찌》(2시간38분) 등 2시간 반이 넘는 영화가 요즘 수두룩합니다.  

요즘 영화만 길어졌을까? 과거에는?
그렇다면 요즘 영화만 갑자기 길어진 걸까요? 그건 아닙니다. 1939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3시간58분), 1959년 《벤허》(3시간32분), 1962년 《아라비아의 로렌스》(3시간47분), 1972년 《대부》(2시간55분) 등 지금보다 더 긴 명작 흥행영화들도 많았습니다. 다만 당시에는 영화 상영시간 중간에 휴식시간(인터미션)이 있어서 화장실도 가고 스트레칭을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최근 20년간 제작된 영화 러닝타임 (1999-2018) 출처:https://stephenfollows.com/

  요즘 영화가 길어진 것 같다는 느낌적 느낌을 뒷받침해줄 객관적인 데이터를 찾아봤습니다. 영화데이터분석가 스티픈 팔로우스가 최근 20년간 전세계에서 제작된 모든 영화의 데이터를 분석한 데이터가 있었는데요, 1999~2009년까지 10년 동안은 영화의 러닝타임이 계속 줄다가, 이후 10년 간인 2010년~2018년까지는 줄곧 올라갔습니다. 장르별로 보면 뮤지컬과 액션 영화의 러닝타임이 각각 1시간47분과 1시간45분으로 가장 길었고, 다큐멘터리와 애니메이션, 호러영화가 1시간26분, 1시간28분,1시간30분으로 짧았습니다. 

영화가 길어지는 건 마블영화 때문이다?
영화가 다시 길어지고 있는 이유는 뭘까요? 블록버스터, 그 중에서도 소위 ‘세계관’을 표방하는 프랜차이즈 수퍼히어로 영화의 득세가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나올 때마다 세계적인 흥행을 기록하는 마블의 어벤져스나 스파이더맨같은 영화의 ‘세계관 서사’는 등장인물이 많고 이야기도 복잡해서 캐릭터별 적정 분량을 챙기다보면 러닝타임이 길어지게 마련입니다. 또 이런 영화들의 열성팬들에게는 러닝타임이 주요 고려대상이 아닙니다. 그들은 오히려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을 더 많이, 더 멋지게 보여주기를 원하죠. 고객들의 이런 수요는 제작자들로 하여금 영화 길이를 늘이는 것에 대한 부담감을 없애줍니다.
 뉴욕대 영화학 교수 다나 폴란은 버라이어티지와 인터뷰에서 CG로 범벅이 된 길고 긴 수퍼히어로 영화의 어떤 장면들은 불필요해보인다고 말합니다. 마치 돈 쓴 것을 과시하려는 장면처럼 보인다고요. 그래도 전세계 역대 최고 흥행 수익을 올린 영화 10위 안에 프랜차이즈 수퍼히어로 영화가 절반인 5편을 차지하고 있으니(어벤져스 3편, 스파이더맨, 스타워즈) 영화가 길어질 명분은 충분합니다.
 
오스카 작품상 후보작과 흥행 상위작의 평균 러닝타임. 출처:stephenfollows.com

 둘째, ‘러닝타임이 길수록 좋은 작품이다’라는 인상을 준다는 점입니다. 앞서 언급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처럼 긴 영화들이 명작 평가를 받듯이, 러닝타임이 길수록 오스카 수상에 유리하다는 속설도 은근히 긴 영화를 만들고 보도록 제작자와 관객들을 부추긴다는 것입니다. 스티픈 팔로우스가 분석한 자료를 보면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오른 영화들의 러닝타임이(노란색 실선) 상대적으로 길다는 것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습니다. 지난 20년 동안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작이 평균 2시간 미만이었던 때는  2011년과 2018년 단 두해 뿐입니다. 또 이 그래프를 보면 일반 영화보다 흥행 상위권에 오른 영화의 러닝타임이(회색 실선)상대적으로 긴 현상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셋째, 바뀐 영화 관람 습관입니다. 스트리밍 서비스의 급격한 확산으로 시리즈 몰아보기에 익숙해진 관객들은 비교적 긴 시간의 관람에도 잘 적응하게 됐다는 가설입니다.

 마지막으로 영화산업에 디지털 장비들이 도입된 것과 연관이 있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필름 녹화가 사라지고 디지털 저장기기로 촬영하면서부터 필름값, 후반작업 비용, 배급, 상영 경비가 절감돼 예전에 비해 영화를 길게 만드는데 부담이 덜하는 겁니다.
  하지만 영화의 러닝타임이 길어지면 제작자와 극장의 예산과 수익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칩니다. 세 시간 가까운 긴 영화는 제작비를 높일 수 있고, 하루에 상영할 수 있는 회차를 감소시켜 수익성을 악화시킵니다. 그래도 러닝타임이 긴 프랜차이즈 블록버스터는 아이맥스같은 특수상영관 상영을 통해서 티켓 가격을 높일 수 있습니다. 다만 높은 티켓 가격은 관객들로 하여금 더 스펙터클한 영.화.같.은. 장면을 기대하게 하고, 그런 기대는 다시 대규모 특수효과 예산을 쓰게 하는, 선순환인지 악순환인지 모를  패턴을 만들게 될 공산이 큽니다. 

영화는 계속 길어질 것인가?
영화수입배급사협회장을 맡고 있는 정상진 엣나인필름 대표는 스트리밍 서비스에서 느낄 수 없는 몰입감을 주고, 드라마 시리즈와 차별성을 주기 위해 영화가 길어지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고 말합니다. 또 코로나로 한국 영화가 개봉을 미루면서 상대적으로 길고 볼만한 대작 외화의 스크린 독과점이 자연스럽게 인정되고 있는 분위기도 영화가 길어지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다면서, 극장 입장에서는 3시간짜리 영화를 4번 상영하는 것보다는 2시간짜리 영화를 5번 트는 것이 객단가 측면에서 유리하다고 덧붙였습니다. 
 이신영 롯데컬쳐웍스 커뮤니케이션팀장도 영화의 러닝타임이 길어지면 상영회차가 줄기 때문에 다양한 영화를 다양한 시간대에 편성하기 어려워져 관람권이 제약을 받을 수 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과연 이런 현상은 계속될까요? 
 임아영 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마케팅팀장은 코로나 시기에 상대적으로 경쟁이 치열하지 않은 상황에서 극장에서 안정적인 성공을 보장할 작품들이-이를테면 수퍼히어로 영화- 러닝타임이 길어서 러닝타임이 길어졌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지만, 이 시기가 지나고 중소규모 영화들이 원활히 수급되면 상황은 달라질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내 인생 영화들의 러닝타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효시로 간주되는 《죠스》(1975)의 러닝타임은 2시간4분입니다. 《스타워즈:제다이의 귀환》(1987)은 2시간13분입니다. 블록버스터, 프랜차이즈 영화인데도 2시간 남짓한 러닝타임을 갖고 있습니다. 결국 의지의 문제가 아닌가 싶은거죠. 
  관객을 스크린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든 서스펜스의 대가 히치콕은 영화의 러닝타임은 방광의 수용량에 달렸다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덩케르크》와 《매드맥스:분노의 도로》처럼 스케일이 큰 영화도 좋아하고, 《화양연화》와 《비포선셋》같은 작고 개성있는 영화들도 좋아합니다. 모두 2시간 이내 영화들입니다. 물론 《아라비아의 로렌스》처럼 4시간 가까운 영화도 제 인생 영화 목록에 들어있기도 합니다.
 《내셔널 트레져》를 만든 존 터틀타웁 감독은 버라이어티지와 인터뷰에서  “길다는 이유로 좋은 영화는 없다. 반대로 짧다는 이유로 좋은 영화도 없다. 하지만 나는 긴 영화보다는 그저 그래도 짧은 영화가 좋다”고 말했습니다. 

  장르불문, 두 시간 안팎의 영화가 저에게는 적당합니다. 영화가 길다고 특별히 포만감이 더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물론 《드라이브 마이 카》(2시간59분)처럼 드라마 흐름상 차곡차곡 느리게 관객들의 감성을 축적해나가야할 때는 또 다르겠죠. 영화는 러닝타임으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여운으로 보는 겁니다. 저는 러닝타임은 짧아도 여운이 긴 영화가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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